[5.24] 옥타비오 파스

자의식의 성장은 대화와 독백이라는 언어의 두 가지 기능을 위협한다. 대화는 다의성에 기초하고, 독백은 동일성에 기초한다. 대화의 모순은, 각자가 타인들과 말할 때 사실은 자기 자신과 말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독백의 모순은, 자아가 결코 자신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을 듣는 타인이기 때문이다. 詩란 언제나 용어의 전환을 통해 이러한 불화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되어왔다. 그것은 대화 속의 나를 독백 속의 너로 바꾸는 것이다. 시는 ‘나는 너’라 하지 않고, ‘나의 나는 바로 너’라고 말한다. 시적 이미지는 ‘타자’이다. 의사불통이라는 근대의 현상은 주체의 복수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개별의식의 구성요소로서 ‘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들과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의 암세포 같은 증식은, 세계가 이미지를 상실한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 파편과 분산 속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 하나 속에서 타자를 인지하는 것은 언어에게 은유의 능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활과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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