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9월 26일 수업 후기

작성자
은남
작성일
2016-10-03 23:42
조회
3621
디가니까야 4, 5경 수업후기입니다.

1. 계행에 대해서
저를 비롯한 초보학인들은 계행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왜냐면 해탈에 이르게 하는 무엇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는 것 같고, 해탈은 힘들지만 조금씩 하면 될거야 라는 희망을 투사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현옥샘은 계행을 완전히 다 수호할 수 있어서 해탈하는 게 아니며, 해탈을 어떤 규정된 지점으로 보면 안된다고 하였지요. 불교를 처음 접하면 해탈을 이미지로 가지고 있는 게 있는 것 같고, 그런 해탈을 위해 우리시대 할 수 있는 계행이 뭔가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부처님의 계행을 우리시대에 맞게 해석해 보고자 하는 욕구도 있는데, 계행을 우리의 상식에 맞닿게 번역한다거나, 현재를 참아가며 힘들지만 조금씩 해나가면 될거야 식으로 하면 안될꺼라고 하였습니다. 계행을 이야기하다가 이런 책을 읽고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 궁금하다고 하였는데, 현옥샘은 책을 읽고 움직이는 것 같은 것은 정서에 충격을 받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능동적인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는 거고, 꼬치꼬치 물고 넘어가야 한다고 하셨지요.  <불교와 글쓰기> 라는 타이틀로 공부하면서 어떤 것이 계행일까를 묻게 하는데요, 선배학인들이 말씀하신대로 물흐르듯이 모호하게 글을 쓰거나, 큰 주제를 던지기만 하거나, 누구나 빤하게 생각되는 상식적인 내용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왜 이것을 가져왔는지 알 수 없게 쓰거나 하면 계행이 안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게 정말 샘이 하고 싶은 이야기일까?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을 좀 더 하려고 해보셨어요?’ 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남았는데, 쓰다보면 이게 아닌데 하는 곳이나, 이상한 곳을 아는데도 어물쩍 넘어가 버리는데 ‘생각을 좀 더 해보기’가 가장 큰 계행인 것 같습니다.

2.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
「디가니까야」 경에서는 타인의 마음을 보는 행위를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서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타자의 마음을 분명히 알기 까지는 자신의 몸에 대한 앎을 통과하고 신기한 신통을 체험하고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되는 앎을 터득한 이후에야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평소에 ‘니 마음 이해해’ 라는 말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이었는지 저도 새삼 깨달았어요...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서 하는 행위를 하려면 삼매로 ‘오염을 여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어떤 타자앞에서든 ‘유연해 지고 적응성이 뛰어나고 부동에 도달 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오염을 여의한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연못이나 거울에 비유되곤 해서 마음을 티끌없이 투명하게 만들어야 하는 상을 갖게 되는데 이 또한 마음에 대한 이미지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마음 본연의 상태와 작동방식을 자신 안에서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인가?이 또한 거울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오해가 있는게 아닐까 하였는데, 거울을 통해 비춰본다는 것은 어떤 전제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공에 기반해서 그것에 대한 이해에서 오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말씀들을 나누었습니다. 아뭏튼 은하쌤 과제로 마음에서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처음 공부할 때 공부하다 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분별심이 더 올라오지 않느냐, 탐진치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도 있었네요. 이에 대해 그런 관계들이 바로미터 역할을 하는 때가 있더라, 내가 휘둘릴는 걸 보면 내가 아직 공부가 덜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지요.

3. 변환의 지점은 어디에서
현옥샘은 계행이 욕망의 재배치로 바뀌면 계행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맞는 말인데, 그러면 무엇을 하는 만큼만 되지 않나? 내가 상정된 한계만 넘어가겠구나, 고만고만한 것만 넘어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어떤 변환점이나 어떤 계기 즉 어떻게 나를 맞닥뜨리는 상황 속에 집어 넣을 것인가하는 고민이 든다고 말씀하셨어요...수경쌤은 수행과 공부라는 것은 일상의 축인 것 같고 일상을 꾸려나는 것, 내 몸이나 정신을 단련하는 이유는 사건들 앞에서 어떤 변곡점을 그릴 것인가를 결정해 주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내가 일상에서 어떻게 지냈느냐가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요. 화엄경에서 선재를 볼 때 그렇게 많은 대중이 있는데 왜 선재만 사건이었나를 생각해 보면(팔자기도 하지만)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비등점이 끓어 오르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일상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의 문제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넵 저는 현옥샘의 고민이나 수경쌤의 말씀이 아직...아, 저는 공부와 수행이 어떤 점에서 여전히 따로인 듯해요...왜냐면 후기 쓰는데 어찌나....

후기 많이 늦었죠? 수업 후기를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쓰기 싫다고 몇날 며칠을 버티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어요...글에 대한 두려움, 후기를 쓰는 것이 나 자신의 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게 있는 것 같고... 아이고 이런 교훈적인 결론도 도식적이지만... 내 마음이 자연스러워질때까지 써봐야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전체 2

  • 2016-10-04 13:44
    타인의 마음을 알기 위해 내 몸에 대한 앎을 통과한다? 쌤, 이거 무슨 의미인가요@.@ 신통을 체험하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건요? 설명해주셔야 할 게 많은 것 같은데요ㅎㅎ 후기 쓰는 거 어려운 거 모르는 사람은 후기 써본 적 없는 사람뿐이죠. 앞으로도 종종 기회 드릴게요. 이게 공부가 꽤 되잖아요, 아시다시피. 씨익-

    • 2016-10-09 17:46
      댓글을 이제사 확인요.. 타자의 마음에 대한 앎이 있기까지 앞에 네 가지 단계를 쓴 것인데요, 지혜의 다발에서 1. 통찰에 대한 앎 2.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에 대한 앎 3. 다양한 신통에 대한 앎 4. 하늘귀에 대한 앎을 생각하면서 3번과 4번을 간단히 줄여서 '신통을 체험하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으로 썼는데 그러게 뜬끔 없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