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171024 절차탁마M 후기

작성자
지은
작성일
2017-10-26 15:15
조회
128

이방인


이번 시간은 각자의 에세이를 가지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각 분들이 다룬 주제는 네 가지로 취합할 수 있었는데요,


1. 법정의 이방인


뫼르소가 일상에서 세상을 '감각'하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상황과 장소의 맥락에 따른 감정을 '느껴야 하는' 사회적 압박 보다는 지금 내가 있는 이 장소가 나에게 주는 자극이 먼저 피부로 와닿는 것이죠. 뫼르소가 세상을 감각하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뫼르소가 어머니 관을 열지 않겠다고 할 때도 사람들은 "이해한다"고 넘어가고, 그는 애인도 만들고 친구들과 해변가로 놀러가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다릅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라는 '충분히 슬퍼해야만' 하는 맥락 속에서 그가 담배를 피고 무덤덤한 모습을 보인 것은 '해서는 안될 짓'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혜원샘은 개인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삶을 영위하던 뫼르소는 법정이라는 사회적 표상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자, '이방인'이 되어버린다고 지적합니다.


법정이라는 세계는 감정이 특화된 곳이기도 합니다. 맥락에 따라, 사회적 관습에 따라 느껴야 하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고 단죄하는 곳이니 만큼, 그 안에서 뫼르소를 회유하려는 판사나 사제는 철저히 그 사회의 관습(종교)에 따라 사고하고 그에 따른 감정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가령 죄수는 무조건 눈물을 흘리며 속죄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사함받는것이 당연한 것이죠. 윤순샘은 판사에게는 그가 믿는 세계가 의심된다면 판사의 삶이 무너진다고 지적하면서 그는 누군가가 그 세계를 거부할 수는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뫼르소는 '죄인'이지만 후회하거나, 자책하거나,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판사나 신부를 당황스럽게 하고, 그 상황을 믿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2. 폭력


보영샘이 다룬 주제는 '폭력'이 난무한 세계, 그리고 폭력의 연속성이었습니다. 신체적 폭력 그리고 정신적 폭력 두 가지를 다루었는데요, 1부에서는 살라마노가 개를 학대하고, 레몽이 그의 정부를 때리고,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이는 등의 신체적 폭력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 폭력이라는 주제는 매우 복잡했는데요, 단순히 신체적으로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 외에 그것이 어떻게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지, 또 폭력을 방관한 자는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또 공간이 바뀌면 가해자가 피해자로 바뀌는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는데요, 뫼르소는 해변에서 아랍인을 총으로 쏠 때에는 가해자였지만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사회가 단죄하는 피해자로 변합니다.


보영샘은 신체나 정신적으로 남을 억압하는 행위를 폭력이라 규정하였는데요, 이 때 뫼르소가 자신에게 가해오는 정신적 압력 (판사나 사제가 신을 믿고 회개하라는 압박)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상대방에게 윽박지르는 행위 또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나아가 법원이 개인에게 가하는 사형제도 또한 폭력의 행위로서 해석될 수 있겠죠. 폭력은 참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3. 공백


저는 뫼르소의 '공백'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가치판단이나 사회적 표상이 작용하지 않는 뫼르소의 내면을 공백이라 표현한 것인데요, 타인들이 뫼르소를 찾아와 자신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뫼르소는 그저 잘 들어주는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그저 잘 들어주기만 하는 수동적인 사람인지, 모든 사람들이 뫼르소에게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뫼르소의 상사나 그의 이웃들은 뫼르소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들은 뫼르소를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기는 커녕 뫼르소를 야심이 없고, 어머니에게 무심한 사람이라고 마음대로 재단하였습니다.


4. 마지막 장면


이 날 우리 학인들의 숙제는 이방인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코멘트를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뫼르소는 사제에게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그 전까지의 뫼르소는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극들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기 보다는 그 자극들을 그저 감각하는 데에 그쳤다면, 사형을 앞두고 믿음을 강요하는 사제에게 고함을 치면서는 자신을 재단하는 사회에 대해 분노와 기쁨의 감정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사회적 관습과 편견에 굴복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과 죽음을 맞이하면서 역설적으로 새 인생을 다시 살 기분을 느끼는 뫼르소의 모습은 무얼 뜻하는 것일까요? 자연의 정다운 무심함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해석할 여지가 많은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문화와 제국주의


까뮈의 <이방인>을 읽은만큼, 진도를 살짝 뒤집어 2장 7의 '카뮈의 제국주의 경험'의 발제문을 먼저 읽었습니다. 사이드는 카뮈가 기존 식민주의자들의 인식을 되풀이했다고 말합니다. 즉 알제리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만 하는 '열등한' 지역이라는 인식이 카뮈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그가 작품에서 알제리의 존재를 주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카뮈는 "순수한 알제리인만으로 구성되는 알제리는 경제적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논평했다고 합니다. 발제를 맡은 보염샘은 사이드를 읽으면서 대위법적 독해를 지적하며 꼭 소설에 언급되지 않은 부분들도 들춰내어 읽는것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소설은 우리의 무의식에 파고들어 사회적 맥락에 대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소설의 풍부한 해석을 위해서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코멘트도 덧붙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제국주의적 태도는 비단 지배국가와 피지배국가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이방인에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언급들을 보면, 살라마노가 그의 개를 학대하는 것과 레몽이 그의 정부를 구타하는 것이 등치되는 모습은 카뮈가 여성을 개와 동일선상에 놓고 표상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뫼르소가 결국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사형수다라는 선언은 인간사회의 시간과 맥락을 다 탈각해 버린다는 측면에서 제국주의적이기도 합니다. 시간과 맥락이 없는 세계라면 굳이 소설의 무대가 프랑스가 아닌 알제리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알제리는 역사적 맥락이 없는 국가인 걸까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아무런 맥락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 본위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텅 빈' 공간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태도는 매우 제국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지배국가가 피지배국가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채 마지 처음부터 피지배국가였던 듯이, 그래서 식민지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움과 지배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태도인 것이죠.


1인칭 시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암흑의 핵심>의 말로우의 1인칭 시점과 마찬가지로 <이방인> 또한 뫼르소라는 인물의 1인칭 시점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이러한 언급구조 또한 사이드가 지적하는 제국주의와 맞물려 있습니다. 유럽인이라는 독자를 미리 상정하고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독점적으로 이야기하는 말로우와 뫼르소. 말로우는 자신의 인식체계로 선명히 다가오지 않는 세계를 안이하게 '모른다' 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넘겼다면, 뫼르소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저 레이몽은 아랍인 여자를 때렸다, 자신은 아랍인을 죽였다 등의 '사실'만 나열할 뿐 그들의 입장에서 본 레이몽 또는 뫼르소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죠.


뮤지컬 <아이다>에 대해서도 제국주의적 태도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암흑의 핵심>이 '모른다' 말했다면 <아이다>는 '내가 다 말해주겠다'는 태도였습니다. 베르다는 자신이 혼자 그 작품을 기획함으로서 창조적 자아가 만들 수 있는 예술로서의 이집트와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왜곡된 표상으로서의 이집트를 혼동했습니다. '순수'하게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겠다는 의도는 듣도보도 못한, 철저히 유럽 취향으로 재단된 이집트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죠.


선민샘은 '여성화된 식민지'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유럽인들의 많은 회화작품을 보면 '일본풍'의 옷을 입고 있는 '젊은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유럽 본국의 여성들은 남성들의 보호를 받고, 집 안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성녀'로서 자리매김하고, 비유럽권 여성들은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고 그래서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창녀'로 표상화됩니다. 실제로 식민지 원주민이 지배자 국가에 갔을 때 그 국가의 여성들에 '강간 충동'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많아 연구가 되었었다고 합니다. 식민 국가의 남성성에 흠집을 내고 싶은 심리적 기제라고 하는데요... 섬뜩합니다.



사이드를 읽으면서는 고전에 대한 인식을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선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냥 "오 까뮈의 이방인...무조건 좋을거야"라는 인식이 옅어졌다고나 할까...?ㅎㅎ  특히나 사이드의 대위법적 독해는 내가 말하는 것 외에 말하지 않는 것, 생략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어 우리의 무의식 체계를 좀 더 깊이 들여다 보는 느낌입니다.

전체 2

  • 2017-10-27 14:25
    어제의 나와 싸우는 읽기, 읽었던 것들을 의심하는 읽기 속에서 4학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온갖 통념들과 맞서보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화이팅!!

  • 2017-10-27 14:43
    '모른다'를 넘어서 이제는 '알려주겠다!'라는 태도가 제국주의에서는 한 계열로 통한다는 게 소름돋는 이야기 같아요. 저도 카뮈 이방인은 마냥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태도에 대해서 돌아보게 만드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