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10월 31일 절차탁마 M 후기

작성자
보영
작성일
2017-11-02 19:15
조회
120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를 만듭니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라면 남의 것도 마구잡이로 빼앗고, 내가 주인일 수 있다면 나와 같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는 이들이 제국주의자입니다. 주인인 ‘우리’와 노예인 ‘너희’ 분류하기, 이 분류를 특정 장소와 묶어내기, 그 분류와 장소에 등급과 위계를 부여한 다음 그 밖의 관계는 허락하지 않기가 바로 제국주의의 전략입니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 바다 건너 세계로 뻗어나가며 식민지를 확장하지만, 유럽 내부에도 식민지가 있었으니 바로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유럽이 유럽 안에 만들어 둔 식민지, 공동체 내부의 타자였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지배-피지배 관계는 형성되고 차별받는 집단이 있기 마련이지만, 어느 시점에 이것이 정도를 넘어섰습니다. 유대인은 없어져야한다는 생각이 싹텄던 시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에 집어넣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 믿고 싶지 않은 인간의 바닥을 보았던 작가 프리모 레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랑함을 담아 쓴 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를 이번 주 읽고 이야기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세계대전을 버티고 살아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서사의 중축을 담당하는 것은 게달레, 멘델, 파벨, 레오니드, 라인, 표트르 등등을 비롯해 ‘게달리스트’라고 불리는 유대인 유격단입니다. 국적도 다르고 성향도 각기 다른 이들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여정을 함께합니다. 이들은 울리빈 부대와 다르게 엄격한 위계 서열을 두고 있지도 않고, 전쟁 틈에도 음악을 연주하고 축제를 벌입니다. 소설에서 이들은 어떤 종교 색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거나 규율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표트르같은 사람도 받아들이고, 부대를 떠나는 사람들은 떠나게 두는 열린 태도를 지녔습니다. 처음 소설을 읽고 저는 유대인이라는 공통점으로 이들이 모여 있다 생각했는데, 함께 이야기하다보니 오히려 이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으로 가자는 지향점은 그냥 공통의 구호일 뿐 오늘날 이스라엘 일부가 보이고 있는 팔레스타인 학살과 굳이 연결 지을 필요가 없다는 걸 느꼈어요.

이들 중에는 유대인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말만으로 묶을 수 없는 공동체인데, 그럼에도 이들이 다른 유격대원들은 이들과 말을 섞지 않으려 하거나 같은 부대에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라 분류되는 이상 모든 다양한 개성이 유대인이라는 한 가지 종류로 환원되기 때문이지요. 게달리스트들은 이 때 분노하거나 무기력해지지 않고 어찌되었든 그들끼리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마주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이것이 그들이 끝까지 살아남은 힘이 아닐까요? 분노나 증오, 억울함 같은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어쨌든 순간순간에 해야 할 일을 하고 감정에 적당한 거리감을 두는 일이 말입니다. 폐쇄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자기 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한 레오니드가 죽는 것은 그가 그 거리두기에 실패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살아남아 죽는 자들

이처럼 게달리스트들은 고생 끝에 살아남아 종전을 맞이하지만, 그 이후에 꽃길이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멘델처럼 오히려 갈 고향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프랑신이 증언하는 것처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자살을 합니다. 수치심은 홀로코스트 문학이 다루는 큰 주제인데요, 선민샘은 이들이 느끼는 수치심을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는 막막함에서 비롯되는 마음이라 해석하셨습니다. 짐승처럼 수용소에서 살 때에는 인간에 대해 신에 대해 질문할 여유가 없었지만, 살아남은 후 목격자들은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을 했는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그 질문에 대답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 인간이 수용소를 만들었고-> 그 수용소에는 신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게 되는 수용소에서, 신이 준 어떤 도덕률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을 겪은 사람들은, 이들은 이제 인간도 신도 아닌 무엇에 기대어야 할까요? 대답을 찾지 못해 드는 낭패감. 이해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고 답을 찾고 싶지만 답을 찾을 수 없을 때의 자기 모멸감, 당혹스러움, 막막함, 인간에 대한 부끄러움, 어쨌든 살아남았기에 죽은 이들의 경험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말해야한다는 모순된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들은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일까요?

소설이 묘사하듯이 세계대전과 강제 수용소, 이유 없는 대량 학살, 증오를 경험하며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고, 포로수용소 문은 열렸고, 그렇다면 이제 그 질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부담스럽고 괴로우니까,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잊으려고 하고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이 질문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레비가 글을 쓴 이유이자 스미노르프가 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이유인걸까요?

작은 순간을 고치며 살아가는 자들

레비에 소설에 주로 나오는 인물들은 큰 부대를 지휘하거나 세상을 바꿀만한 이념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많은 인물들은 부대에서 낙오했거나 다치거나 굼뜬 이들입니다. 그러나 소설은 바로 이들을 통해 불쌍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일방적인 피해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욕망과 힘을 가지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보듬으며, 때로는 죽고 때로는 살아남아 어쨌든 이런 저런 작은 시도를 거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역사책에 세 줄로 남을 시간이 소설에서는 400페이지가 넘게 구체적으로 펼쳐집니다. 유대인이라는 추상화된 명칭으로 지정되는 사람들이 멘델, 레오니드처럼 각자 이름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거창한 추상적 감정으로 수렴되지 않고 그 때 그 때 사는 모습, 지점 지점의 삶, 구체적인 인간, 그 구체적인 인간이 지점마다 바라보는 다양한 생의 장면을 이 소설이 담으려 하는 것 아닐까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부르지만 이들 누구도 사연이 같은 사람이 없고 사연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을 설명하는 추상적 프레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다양한 결을 펼쳐 보이는 것이 레비가 하려고 했던 일 아닐까요? 레비의 소설에는 도구를 쓰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이 나옵니다. 멘델은 시계수리공이고, <멍키스패너>라는 작품에는 멍키스패너로 기차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요. 고상한 이념이나 도착지가 있지 않고, 전체 설계를 바꿀 수도 없고 부정하지도 않고 그저 순간순간을 고치며 이어지는 게 삶이라는 이야기를 레비가 하고 있는 걸까요? (이 부분에서 저는 카프카가 떠올랐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고 어쨌든 맞닥뜨린 지점에서 출구를 찾아내려는 태도가요)

문화와 제국주의

레비가 이토록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개별성을 기록하고 그 개별성이 만나 생겨나는 다양한 삶의 결을 되살리고자 했다면, 그 반대 축에 제국주의가 있습니다. 제국주의는 한 가지 공통된 기준으로 전 세계를 통일하려 했습니다. 하나의 기준, 즉 우월한 우리와 열등한 우리라는 두 가지 분류 틀로 모든 사안에 위계를 부여한 것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은 이 분류 틀을 모든 영역에 똑같이 적용해 위계 밖을 생각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은 달라지고, 조건에 따라 규율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순간순간의 위계도 달라져야 하는데 제국주의는 그 유연성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다 똑같은 것으로 균질화시키고, 개성은 지워버렸습니다. 사람은 물론 어딘가에 속해 살아가고 만든 제도에 의지해 살아가지만, 그 제도에는 유연하고 구멍이 많아서 맘대로 드나들 수 있어야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것 아닐까요? 제도에 기대야 풀리는 문제가 있다면, 제도로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제도를 드나들 빈틈이 여기저기 많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역시 카프카가 떠올랐습니다... 마성의 카프카...)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19세기 리얼리즘 문학은 기존 위계에 단단한 벽을 더 쌓아올렸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와 협력했다고 사이드는 분석합니다. 이 시기 문학 작품은 A에서 B로 여행해 다시 A로 금의환향하는 서사가 대부분인데, 내 해석을 의심하지 않고, 내가 A에서 쓰는 분석 틀에 새롭고 낯선 상황 B를 끼워 맞추는 구조가 제국주의 지배 구조와 맞닿아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계대전을 겪고 이 문학 흐름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시점도 종점도 중요하지 않고 한 장소로 수렴되지 않는 이야기, 위계를 무시한 서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을 모더니즘이라고 불렀는데, 제국주의 시대 문학처럼 단선적인 시간 흐름을 따라 진행되지 않고, 성장하거나 발전해 돌아오는 인물이 나오지 않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 진행되는 게 특징입니다. 그러나 사이드는 이것 역시 제국주의의 유산이라고 분석합니다. 시점과 종점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어쨌든 작품 속 주인공 한 사람으로 모든 방향이 수렴되는 것 아닌가, 위계나 도착지가 없다고 하지만 어쨌든 저 곳으로 갈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 아닌가, 소설을 통해 특정 장소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이를 테면 이 소설 읽고 소설 배경이 된 곳에 가고 싶다는 식으로) 하는 것이 사이드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내가 아니면 누가?

이번 세미나는 제가 평소 궁금했던 부분, 고민하던 문제와 많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지 더 재미있었고, 수업의 여운도 길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 하는 레비의 질문은 저의 질문이기도 했거든요. 레비처럼 극한의 인간 바닥을 본 것도 아닌데 저는 이상하게 인간에 대한 실망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좀 더 멋져야 할 것 같고 좀 더 세속적인 욕망에서 자유로워야 할 것 같고, 어딘가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 환상? 이 있었는데,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은 제가 생각한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거든요. 저는 한 사람이 가진 수많은 결을 용납하지 못하고 모든 게 다 멋진 사람, 아니면 모든 게 다 별로인 사람 이런 극단적인 두 축으로 사람을 나누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멋진 사람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으면 안 되는데, 하는 식으로 고정된 상을 덧씌우려했고 그래서 실망했던 게 아닐까요? 사실 사이드가 말하듯 정체성은 여러 층위가 뒤섞여있는 것일 텐데 말예요. 인간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설명할 길 없을 때 막막해하고, 이상적인 인간상을 설정한 다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낮잡아보려던 저의 태도가 바로 제국주의자의 태도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저도 다를 것 없는 사람이면서 왜 이런 오만한 관찰자이자 심판관이 되었을까요... ) 지금까지 내가 살던 방식은 이 제국주의 틀 속에서 맴도는 것뿐이었고 나도 모르는 새 폭력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너무 실망스러운데.. 이런 지난 삶에 대한 후회 때문에, 그리고 또 이걸 깨달은 지점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삶에서 빠져나올 출구는 있을까 찾아 헤매며 괴로웠는데, 레비의 ‘시계 고치기론(?)’이 저에게 실마리를 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제 인생을 전부 부정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지우고 처음부터 인식을 다시 쌓아올릴 수도 없을 겁니다. 그저 지금 찾아낸 고장 난 지점을 고치고 그렇게 하나씩 나를 다듬으며 이어가는 일이 쌓여 삶이 되는 것 아닐까요..? 어떤 설계도를 따라 직선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왔다 갔다 하면서 채워지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사이드나 레비가 말하듯 순간순간 마주한 상황을 잘 지나갈 수 있게 그 때 그때 알맞은 나를 꺼내는 힘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삶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지, 그래서 순간을 어떻게 지날 것이며, 어떻게 그 힘을 키울지 제대로 고민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제가 어떻게 세상과 얽혀있는지 살펴볼까요. 내가 아니면 누가,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외면하고 싶은 모습을 빼낼까요. 혼자서는 결코 하지 못할 이 실마리 찾기를 같이 하는 이 시간이 참 소중하다 느꼈습니다. 여전히 그 과정에서 저는 길을 잃고 헤매겠지만 헤매다 가끔은 빈틈을 찾기도 하고 그러는 것 아닐까요? (카프카 선생님의 말씀처럼...) 일단 걸어야 하고, 작은 순간의 조각을 마주해야 보다 큰 삶을 해석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론 본론 결론을 다 떠올린 다음 글을 쓰려 하면 절대 못 쓰지만, 일단 논리에 맞지 않는 문장 몇 줄이라도 쓰기 시작해야 내가 무엇을 쓰려 하는지 알게 되듯이 말이에요... (물론 쓰고 나서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지만요.) 미루지 말고 써야하는 이유가 다시 한 번 분명해졌습니다 ^^...(또 다시 반성)

다음 시간에는 각자 정한 주제로 <지금이 아니면 언제>에 대한 에세이를 써 옵니다.

그리고 <문화와 제국주의> 3장 4챕터까지 읽어옵니다.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일단 하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냥 하도록 해요...

저는 이제 그럼 좀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거란 핑계로 미루고 미루었던 이방인 숙제를 하러 가야겠어요...

그럼 다음 주에 만나요!
전체 2

  • 2017-11-03 16:35
    수리공 보영! 정말 이번주엔 작심한듯 멍키스패너를 들었군요! 만세! ^^

  • 2017-11-04 09:52
    작은 것을 고치며 살아가기! 이게 참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인간을 사유하면서도 멍키스패너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