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11.21 절탁 M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11-26 23:02
조회
99
171121 절차탁마 M 후기

 

<문화와 제국주의>를 이번 시간을 끝으로 다 읽었습니다. 처음 책을 샀을 때는 언제 이걸 다 읽나 하는 압박(;;)이 있었습니다만 어느새 다 읽고 에세이만 앞두고 있습니다. ㅎㅎ

 

미국 제국주의

 

이번 시간에는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요. 미국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지만, 그러나 말해야 하는 것은 정해져 있는’ 나라입니다. 분명 어떤 나라도 식민지로 삼고 있지 않고 내걸고 있는 슬로건은 자유입니다만, ‘미국’이라는 표상이 갖는 영향력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사이드는 헤게모니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중심의 형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지배는 직접 해외를 침략하고 그 영토를 전유하는 게 아니지요. 미국은 미디어를 활용합니다. 가령 다른 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하더라도 그것의 의미는 뉴스와 전문가를 대동한 미디어로 한번 포장되어 유포되지요. 미국은 자유, 민주를 수호하는 경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이것은 미국에 대항하는 세계에 대한 정보는 모두 ‘테러리스트’로 환원되는 것이며, 그 외 다른 해석의지가 없는 편협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막강한 지배력 안에서 세계는 다시 제국주의적으로 편성된 것입니다.

 

<악마의 시>

 

사이드는 제국주의 시대의 대위법을 말했습니다만, 작금의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는 ‘복수적’, ‘잡종적’인 것의 발명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텍스트가 잡종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텍스트를 발굴하고 또 텍스트를 잡종적이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이드의 저격지점은 분명합니다. 바로 영문학. 가령, 사이드가 가장 문제 삼는 작품 중 하나인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둘러싼 논의는 ‘중심’을 이루는 영문학의 편협한 해석의지를 보여줍니다. <악마의 시>는 이슬람 문제를 영어로 쓴 작품인데, 이슬람 사회 같은 경우는 ‘감히’ 아랍어가 아닌 영어로 ‘우리’의 문제를 썼다고 비난하며, 영문학계에서는 이 작품을 그저 이슬람 문제에 대한 고발 작품 정도로 소화한 것이죠.

사실 사이드식으로 보자면, <악마의 시>는 영어로 아랍문제를 쓴 혼종적인 이야기인데, 문화적 근본주의를 영위하는 이슬람권에서도 영문학 안에 들어와 있는 이슬람 문화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학계에서도 그 잡종성을 읽어내지 못한 채 그들 각각이 익숙한 방식으로만 이 작품을 대한 것입니다. 사이드는 <악마의 시>를 옹호한 소수의 이슬람권 지식인과의 소통도 하지 못한 채 익숙한 서양 독자로서 작품을 바라보는 영문학계의 편협함과 백인중심 우월의식을 비판합니다.

영문학은, 백인사회는 잡종성을 떠안고 싶지 않아하지요. 성가시고 불편하니까요. 살만 루시디가 망명 생활을 할 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그에 대해 갖는 감정은 증오나 괘씸함이었겠지만 영어권이 그에게 갖는 감정은 곤란함이 아니었을까요? 내 옆집에 당장이라도 테러를 당할 수 있는 아랍인이 살고 있다는 곤란함 말입니다. 사이드는 이런 생각은 제국주의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결과라는 것을 밝히고 또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다르게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이드가 영문학계에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어가 미국 제국주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문학에서 다루는 것은 주로 영미권 작품들이지만, 사실 그러면서 ‘영문학이 아닌 것’으로서 많은 영어 문학들, 그리고 영문학을 다르게 읽을 수 있는 가능성들이 모두 빠져나가 버립니다. 그것들을 다 무시하고 늘 보던 방식으로 보는 엘리트주의를 비판한 것이죠.

사이드는 모두가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범지구적 대위법을 제안합니다. 잡종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엘리트의 선도는 일어날 수 없는 문제인 것이죠. 문제는 중심으로 수렴하려는 움직임입니다. 한 가지 정체성으로 정리하려는 움직임은 흑인/백인/야만과 같은 표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 속에서 사람이 망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빌러비드>입니다. 백인들이 규정한 ‘흑인성’에 스스로 갇혀버린 흑인들의 커뮤니티에서 일어난 비극이 <빌러비드>의 저변을 흐르고 있지요.

 

도구화 되어가는 영어

 

한때 대학마다 영어강의 붐이 불었던 적이 있었지요.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철저히 가르쳐서 원어민 수준으로 만들어 놔야 한다는 생각도 유행했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붐이 좀 덜한 것 같습니다. 단순히 제가 학교 다닌 지 오래되어서 그런가? ㅎㅎ 한때 영어 교육 문제가 뉴스를 계속 탔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고요.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외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듭니다. 모두가 번역기를 끼고 자국어를 하면 알아서 번역되어 상대방에게 가 닿는 것이죠. 영어는 한때 제국의 언어였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 제국의 언어부터 익혀야 하는 역설을 겪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영어의 위상이 그때만 못한 것 같습니다. 기술 발전에 따른 외국어 교육 비용 절감, 이건 좋은 것일까요?

사이드는 제국주의의 공과를 말할 때, ‘이동’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제국주의는 모두를 이동하게 만들었다는 공(功)이 있다는 것이 사이드의 생각입니다. 왜 자기 땅을 떠나는 것이 사이드가 보기에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근본’, ‘근원’에 붙잡히게 되면 ‘근원’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을 구분하려고 하기 때문일 겁니다. 종주국 중심의 세계 편성을 꾀했던 제국주의적 논리를 따르는 것이죠.

사이드는 언어 안에 들어있는 불균형과 잡종성에 주목합니다. 이때 영어의 이동하는 가능성을 전유, 이용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내 말’을 잘 전달하는 ‘잘 되는 의사소통’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성태’인 언어를 상정하지요. 하지만 실제로 ‘내 말’, ‘전달해야 할 무엇’은 없습니다. 대화는 ‘근본’인 ‘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소통하며 만들어지는 혼종적인 것이니까요.

자국어로 말하면 언어의 잡종성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어느새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이 있어서 말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지요. 하지만 외국어로 말할 때 우리는 의미를 형식화/과장/축소하며 내가 사실은 굉장히 빈곤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주

 

<문화와 제국주의>는 제국주의로 인한 이주에서 시작하여 적극적인 ‘이주’를 권하는 내용으로 끝납니다. 사이드는 ‘어디를 가든 타향’으로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후고의 말을 인용합니다. 어딜 가든 타향의식을 갖는 자... 이건 어떤 것일까요? 선민쌤은 이주의 적극적인 모델로 망명이 있다고 합니다. 망명은 떠나온 곳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으며 또 정치적인 선택이지요. 이것은 다른 세력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것과 다른 능동성과 독립성을 수반합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출발했던 존재이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그러니까 충분히 숙고하고 비판한 다음, 거기서부터 이탈하는 운동성. 이것은 영원히 ‘완성태’를 모르는 ‘잡종성’ 자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음 시간에는 에세이 초고 발표합니다.

 

화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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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1-28 01:51
    결국, 어떤 잡종이 될 것인가? 의 문제가 남습니다. 절탁 M의 마지막을 앞두신 여러분 전 학기를 종횡무진 횡단하시면서 잡종적고도 문제적인 에세이를 쓰시기를! 기대할께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