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11.14절탁M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17-11-20 17:01
조회
89
11/14절탁M 후기

 

<빌러비드>

절탁M 문학의 마지막 텍스트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였습니다. <빌러비드>는 1856년에 있었던  실화를 모티브로 만든 소설입니다. 도망친 노예가 붙잡힐 지경에 처하자, 자식에게 노예의 삶을 살게 할 수 없다고 아이를 죽입니다. 두 살 배기 딸을 칼로 베어 죽이고 다른 자식들도 죽이려 하지만 실패합니다.  실제 사건에서 살인 사건의 주인공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고 합니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이었기 때문이죠. 죽은 노예의 아이는 당연히 ‘잃어버린 재산’ 정도가 되는 것이겠죠.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재판 받길 원했던, 그래서 자신에게 살인죄가 적용되길 바랬던 노예의 바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살해한 흑인 여성 노예의 이야기는 인종과 젠더의 문제를 함께 제기하고 있습니다.

 

남을 살린다.

딸이 노예의 삶을 살지 않도록 살인을 한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모성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성이 본능적인 부분도 분명 있겠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를 헌신적으로 기르는 사회적 강요에 의해, 또 주 양육자 여성에 의해 길러지면서 학습된 부분이 많지요. 그런데 이것이 인간에서 배제 당한 흑인 여성노예에게 오면 모성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백인여성에게 강요되던 모성은 흑인여성에게는 모성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지요. 사물화 된 인간에게서 인간이 태어난 것과, 인간에게서 인간이 태어난 것은 모성성과 인간성이라는 이중의 모순에 직면하게 되고 샘은 이 문제를 지성과 잔혹성이 결합된 문제제기라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작품의 현재 시점은 노예제가 해방 된 상태입니다. 세서는 딸 덴버와 시어머니인 베이비 석스의 집 124번지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빌러비드라는 죽은 아이의 영혼이 회귀하면서 과거를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빌러비드에게 말해주면서 자신이 기억하기를 거부했던 과거와 마주하게 됩니다. 빌러비드는 세서의 과거를 소환하는 기제가 되는 셈이죠. 이 과정에서 세서는 혼돈과 자기 상실을 경험합니다. 이 때 세서는 딸 덴버와 자신을 짝 사랑하던 폴디의 등장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나갑니다. <빌러비드>에서는 세서의 예처럼 아무도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구원을 받는 형태입니다.

여기에 모성의 중요한 테마가 있는데요, 모성은 남을 낳는 행위입니다. 남을 살리고 남을 구원하는 과정을 모성이라고 본 것입니다.

 

모리슨은 세서의 모성이 한 개인에서 시작했지만 실은 아프리카에서 끌려 온 노예들에 그 기원이 있다고 봅니다. 노예제가 해방된 상태에서도 노예의 기억을 가지고 살고 있는 한 해방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방은 정치적으로 해방이 선언 되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지요. 과거 역시 ‘없다’라고 무시하거나 망각한다고 극복되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죠. 노예로 살았던 자기해석과 자기탄생을 해석하지 않으면 현재를 제대로 살아갈 수 없고 과거를 직면할 때 미래가 있습니다. 세서의 미래는 딸 덴버이겠죠. 그래서 세서가 빌러비드에게 과거의 용서를 구하고 자신이 다 소진된 때에 덴버가 살아나게 됩니다. 샘은 과거의 역할이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괴로움에 맞설 수 있을 때 자신의 과거와 직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 읽었던 레비는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였죠. 예술과 자기기억으로 스스로 고독을 해소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리슨은 나의 죄와 나의 업으로 남을 구원합니다. 단지 나의 자식만을 살리는 모성이 아니라 구원으로서의 모성의 의미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해방의 길로 나서게 하는 <빌러비드>는 ‘말할 수 없는 일’을 대면하는 다른 방식인 것 같습니다. 특별하고 소중한 고통을 나누는 방식 말입니다.

124번지 집

세서가 살고 있는 집은 과거의 모든 일이 벌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세서는 그 집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유의 순간에도 집을 떠나지 않지요. 세서가 자유로웠던 때는 노예 시절 스스로 강물을 건너 이 곳으로 도망쳤던 28일간이었습니다. 그 때 그 곳은 백인이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죠. 해방이 된 현재 백인은 도처에 있습니다. 이 공간에 유령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세서는 과거로 빠져 들어가겠다고 결단을 하지요. 과거로 간다는 것은 원인을 분석해 보고 인과를 따져보는 행위입니다. 이 움직임과 결단이 만들어 내는 결과가,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 것인가? 토니 모리슨은 이 부분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즉 사건으로 다가가는 과정이 중요하고 그 과정에 일이 발생합니다. 과거로 다가가는 과정은 일이 벌어지는 과정인 것이죠. 그래서 실상 사건의 실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일을 만들고 일을 벌이는, 완료될 수 없는 그 과정만이 있습니다. 해서 주인공들은 개별 존재로 단자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서, 빌리버드, 덴버, 폴디, 베이비석스, 등은 일련의 과정 안에 놓여 있습니다. 결국 덴버가 124번지를 박차고 나가면서 베이비 석스와 신시내티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덴버는 세서가 빌러비드 때문에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을 때 세상을 향해 문을 연 자입니다. 덴버는 노예제를 경험해 보지 않은 새로운 존재로 새 시대를 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신

베이비 석스는 신시내티 공동체의 수장이고 가장 연장자이기도 합니다. 흑인 여성노예들이 공동체를 이루면 한계가 극복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여기서 배신이 일어납니다. 배신의 원인은 베이비 석스에 대한 질투이지만 그 이면엔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베이비석스의 공동체를 향한 강력한 리더쉽으로 공동체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러나 재력이 있었던 그녀는 풍성한 잔치를 벌여 도를 넘게 되고, 모든 일을 해주려 하는 등 혼자서 공동체를 이끌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자치 공동체에서도 자유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과거 농장주였던 가너부부는 흑인을 ‘사내’라고 명명하는 매우 친절한 백인이었죠. 가너씨가 죽자 농장은 무법천지가 됩니다. 규정을 정하던 주인이 없어지자 이 시스템을 내면화한 흑인들은 그냥 노예이고 짐승들일 뿐이었습니다. 규정을 정하고 지배하는 자가 베푸는 선한 의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베이비석스도 복음을 말하는 자였지요. 복음이 부과되는 공동체는 온전하기 어렵습니다. 자치 공동체원들도 이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베이비석스는 또 백인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낳은 자식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유일하게 흑인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나를 키웠습니다. 석스는 자식을 부정하였고, 남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한계가 공동체의 배신을 불렀습니다. 자유는 함께 이루어내는 것이고, 서로를 살리는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실패는 세서와 덴버로 이어지며 확장되고 순환되어 해방의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배신은 해방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씨앗이 됩니다.

이처럼 모리슨이 자유를 말할 때는 단자화 된 개인의 자유를 말하지 않으며, 사건을 그 자체로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통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말해져야 하며 그런 후 자신이 직접 자기서사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서사의 기승전결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우린 노예입니다.

 

<문화와 제국주의>

 

이번 시간 문화와 제국주의는 3-5장의 협력, 독립, 그리고 해방과 4-1장의 미국의 우세: 공적영역의 투쟁까지 공부했습니다.

해방은 문화적 독립

지난 시간 사이드는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가 구별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민족해방 투쟁의 모태가 된 반식민주의 운동이 끝나면, 민족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반제국주의 운동이 다시 일어나야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5장에서는 그 운동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진정한 해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이드는 해방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가장 우선되는 것이 제국의 지배를 끊는 것입니다. 제국은 언어로써 문화를 공고히 한 자들입니다. 제국의 언어로 명명하고 계몽합니다. 그래서 “민족해방 투쟁은 민족 독립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민족 해방 투쟁이 문화적으로는 반드시 민족 독립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526) 반제국주의 운동의 핵심은 이 제국의 문화를 끊는 방식이어야 하고 다시 말하면 언어 행위로 하는 방식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언어적 대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사이드는 제국주의를 전복하기 위하여 폭력이 꼭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때의 폭력은 ‘문화’의 최후의 반대급부로서의 폭력입니다. 이는 언어지배에 대한 강력한 저항입니다. 인식의 전환인 이론과 실천이 함께 하는 ‘정화’로서의 폭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폭력이 제국주의 투쟁의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식민지가 제국주의 행위주체에 대한 저항한 연후엔, 구원과 문화의 서사를 구성할 수 있어야합니다. 빌러비드도 살해라는 폭력을 경유하고 있지요. 그러나 폭력이 모순을 모두 극복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후 자신들의 서사를 다시 구성하려고 하지요.

여기서 경계해야 할 중요한 점은 새로 구성한 문화가 다시 문화 제국주의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누가 제국주의를 구성하고 있고, 누가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는지 주체들의 반성적인 시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제국주의 운동은 민족을 벗어나야 완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폭력 투쟁의 주체도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민족 안에 있으나 민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자들, 여성, 소수자, 장애인 등이 주체로 나서야 될 것입니다. 인간도 혼종 된 존재이고 문제 역시 혼종 되어 있지요. 이 어려움 때문인지 아직 이 과정을 성공한 나라는 없습니다. 반식민 투쟁을 끝내고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넘어가려는 시점에 미국이라는 거대 문화제국이 등장하고 세계는 다시 새로운 제국 아래 재편됩니다.

 

미국 미디어,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미국의 등장으로 기존의 수직적 관계에서 통치를 하고 받던 제국주의의 구조는 변형이 생깁니다. 미국은 식민지를 원격 지배한 경험이 없고, 역사인식도 없습니다. 기존 제국주의가 식민지 공간을 시간적으로 재배치하고, 식민지를 역사의 발달 수준에 따라 규정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식민지간의 차이에 무지합니다. 미국이라는 중심과, 주변국이 있을 뿐입니다. 주변국의 차이는 모두 소멸시키고 시장의 편의에 의해 추상화하여 봄으로써 국가들의 개별성은 무시됩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제국주의로의 비젼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야만에서 진보로, 과거에서 현재로 도달해야 할 어떤 지점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대신 시장 질서를 근거로 합리적 조정을 하고자 하는, 지도자의 위치가 아니라 조정자의 위치를 택합니다. 법의 배달자로서 세계의 부정을 바로 잡고, 모순과 일관성 없는 악마를 추방해내는 세계의 경찰 노릇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3세계에 대한 폭력도 서슴지 않습니다. 이 역할로 자신들의 역사도 설명하려고 합니다.

미국의 역사는 아메리칸 토착민들과의 전쟁의 역사였지요. 이 정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학문이 동원되었고, 이 논리를 보급하기 위해 미디어가 동원되었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미국의 세계정복 논리가 그대로 전파되고, 세계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또 미디어는 미국 국내의 사람들에게는 외국문화의 편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아랍인은 위험한 인물로 규정되고, 중동전쟁에 미국이 사익을 위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도 숨기게 됩니다. 그저 ‘우리’라는 책임으로 완화시키고 있습니다.

미디어의 등장으로 소설의 시대를 갔습니다. 과거엔 대위법적으로 읽어볼 자료라도 있었지만 이젠 자료조차 없습니다. 제국주의 내에서 보이던 혼종성조차 없어졌습니다. 학문도 너무나 전문화되어 지식인 내부의 비판의식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어디인지, 더 냉정히 보아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더 읽어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전체 1

  • 2017-11-21 00:16
    - 사이드는 문화적 정통성을 고집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제국주의'가 작동한다고 하겠지요. '여기'에는 이런 문화, '저기'에는 저런 문화. 자신을 특정한 공간 안에 구겨 넣은 채, 타인도 세계도 보지 않으려는 아집! 책의 마지막에 사이드는 '망명'을 아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데요.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떠나려는 존재만 제국주의도 식민주의도 침투할 수 없는 해방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 저는 <빌러비드>에서 그 분위기가 제일 신기했습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갇혀버린 자들의 숨막힘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 했어요.
    마지막에 여주인공들은 그 밀폐된 공간 밖으로 '사람을 먹지 않은 아이'를 내어보내지요! 정말 멋있는 결말이었습니다.
    = 정옥 쌤의 에세이도 멋있게, 멋있게!! 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