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5.10 절차탁마 M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5-13 19:49
조회
332
렉티오 디비나(신성한 읽기)시대의 끝에서 후고는 천년 전 그리스 시대의 암기법을 가지고 옵니다. 새로운 읽기가 출현하는 시대에 그는 렉티오 디비나도, 그리고 후에 오게 될 학자식 읽기도 아닌 다른 읽기를 사유함으로써 읽기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새로운 읽기를 생각하기 위해 고대로 돌아갔던 후고를 따라 일리치 역시 중세로 돌아가 읽기의 변화가 일어난 지점을 탐색합니다.
12세기 수도사 후고가 살던 시대는 드디어 두루마리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모양의 '책'이 나오던 시절이라고 합니다. 두루마리로 존재했던 신의 말씀은 어느 하나 함부로 덧붙이거나 뺄 수 없는, 그야말로 통째로 외워야 하는 것이었는데 책으로 만들게 되면서 읽기의 방식도, 그리고 신의 말씀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게 된 것이죠. 물론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책의 형태로 만들어진 신의 말씀은 휴대할 수 있었으며 원하는 부분을 나누어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책을 읽는 사람들은 비로소 신의 말씀을 외우고 체현하는 것을 넘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고 또 그 지식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고는 이 전환기에 기독교의 신성함이 되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렉티오 디비나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후고는 기독교의 신성함이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가 제안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거기서 신의 뜻을 찾고, 또 신의 뜻 안에서 자기 위치를 확인하는 읽기 방식은 신의 말씀을 읽는 자기 자신, 자아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렉티오 디비나와는 이미 다른 것이 되어 버렸죠.
'책'은 그것을 소유하는 '나'를 갖게 했습니다. 그 발견을 후고는 신의 뜻을 읽고 거기에서 자기 위치를 알게 됨으로써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이자 누구나 신을 떠날 수 있는 위기로 보았습니다. 물론 그가 강조한 것은 전자였고요. 자기만의 기억의 궁전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리스 시대의 기억술을 가지고 와 그것을 그리스도 이래의 역사적 구조물로 만든 것도 후고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요. 그가 중시한 것은 철저한 독해와 암기를 동반한 그리스도 이래의 역사 구조물 안에서 자기가 갖는 의미였으니까요.
후고의 이런 사고와 당시 수도사들이 텍스트를 읽으며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일리치는 말합니다. 그는 '최종 원인'이라는 것을 들어 얼마나 그당시의 사고와 우리의 사고가 다른지 알려주는데요. 가령 돌멩이가 땅으로 떨어지면 우리는 그가 중력을 따랐다고 보지 돌멩이가 땅바닥과 만나려는 욕망으로 떨어졌다고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돌멩이가 공중에 던져지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중력이라는 단일한 원인이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최종 원인'식으로 사고한다면 돌멩이의 미래는 신만이 아십니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만 그건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가봐야 아는 것인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돌멩이가 그 섭리 가운데 어느 맥락 안에 있느냐 입니다.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테니까요.
일리치는 '학자식 읽기를 기념하기 위해' <텍스트의 포도밭>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읽기를 통찰하는데요, 우리는 텍스트를 이미 책도 아니고 스크린으로 보고 있죠.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고, 검색해서 바로 눈에 담고 넘겨버리고요. 일리치는 우리가 향유하는 기술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기술의 변화 안에서 간과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후고의 읽기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오면서요. 지금 우리 시대에 후고의 통찰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마도 텍스트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독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하고 그야말로 '정보'로 남는다는 것일 겁니다.
이번 시간에 단테의 <신곡>을 이번에 다 읽었습니다. 지옥을 거쳐 연옥, 천국에 오른 단테의 순례는 삼위일체의 빛을 보는 지점에서 끝납니다. 저는 기독교적인 사고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있는지, 계속 구원이나 은총은 천국에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계속 은총이 천국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들었으면서요. 순례자 단테가 천국에 가서 계속 되풀이하여 말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을 경험하고 그것을 도저히 쓸 수 없다고 울상짓죠. 그런데 주변은 온통 쓰라는 말 뿐입니다. 결국 순례자 단테는 씁니다. 쓸 수 없다고 하면서요. 은총을 경험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쓰는 것 뿐이라고 수경언니는 말했습니다. 색의 세계인 지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빛의 세계를 경험한 자는 다시 색의 세계로 돌아와서 쓰는 것이라고요.
정말 많은 존재들이 단테에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이면서 단테에게 쓰라고 말했고요. 그래서 순례자 단테는 씁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요. 정말 기존에 있던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말을 만들어서 썼다고 해요. 번역서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없던 말을 만들어서까지 단테는 구원을 향한, 혹은 지혜를 향한 등정을 어떻게든 써 놓은 것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지적 여정으로서의 순례는 또한 구원의 여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익숙하고 아는 것들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세계를 모두 쓰면서 단테는 구원 또한 그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단테의 전기를 읽었는데요. 정말 파라만장합니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하는(^^:;;;) 단테는 교황의 역정을 사 추방 당하고, 또 자기 동료들과도 불화를 사고, 우정을 맺은 친구는 일찍 죽어서 또 중앙에서 밀려나고...그 와중에 고향 피렌체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는데다 단테와 그 가족까지 사형선고를 내려 쫓아버립니다. 단테는 자신이 고향이라고 여기는 곳에서는 계속해서 추방상태였던 것이죠. 그와중에 단테의 소원은 고향에서 최고의 시인이라는 증거로 월계수관을 받는 것이라고 <신곡>에서 밝힙니다. 피렌체인이면서 또 계속 피렌체 밖을 떠돌아야 했던 시인 단테 이야기를 <신곡> 마지막 시간에 읽으면서 그가 말하는 구원이 어떤 것이었는지 (<신곡> 마지막 시간에^^;;)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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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13 21:32
    다음 시간부터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차고 넘치는 제프리 초서의 세계로 떠납니다. 14세기 중세 영국 사람들은 세계를 어떻게 경험했고 어떤 이야기들을 하며 살았는지 살펴보아요^^ <캔터베리 이야기> 전체서문부터 5부까지 읽고 공통과제 해오심 됩니다. <텍스트의 포도밭>도 꼼꼼히 읽어오시고, 정옥쌤, 발제도 잘 부탁드려요. 간식은 혜원이. 그럼 돌아오는 화요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