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M

절탁M후기 (가르강튀아)

작성자
미리
작성일
2017-06-05 23:56
조회
296
소설 읽기가 참 어렵지만 저는 특히 오독이 많아 소설 후기를 자청했습니다. 이번 책은 프랑스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였습니다. 첫 시간은 써온 글을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매번 듣는 동일한 코멘트 중 하나가 핵심적인 주제를 맥락을 잡아 깊게 파라는 것이지요. 하고자하는 얘기를 던져 놓고 전개시키지 못하고 자기식대로 읽어버리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싶습니다ㅜ

가르강튀아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소설로 지난 시간 초서와는 200년의 차이가 있는 책이지요.  많은 기초지식이 필요해 쭉쭉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비롯해 역사적 사실과  많은 개념들, 그 때까지의 지식의 베이스위에 쓰여 진 책이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인문주의 소설’로 분류된다고 설명을 해 주었는데요, 라블레가 <우신예찬>을 쓴 에라스무스나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모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는 글을 읽을 수 있는 계층이 지식인층으로 한정되어 있었기에, 준비 된 독자를 위한 것이었다는 거죠. 해서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많은 해석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근대 교육이 실시 된 이후에 나오는 소설은 더 이상 어려운 지식과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감정과 심리, 내 주변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그려지기 때문이지죠. 해석이 불필요해지면서 시대를 대변하던 소설의 위상도 달라졌다는 생각이 드네요.  토론에서는 오히려 고전에서 세련 된 느낌을 받는다고 한 분도 있었지요.

르네상스 시대에 이러한 인문주의적 풍토가 생긴 것은 십자군 전쟁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십자군 전쟁이 동방으로의 포교라는 명분으로 시작했지만 알다시피 전쟁은 실패했죠. 그런데 그때까지도 그리스, 로마문화를 계승하고 해석하고 있던 그 동방에서 철학을 들여오게 된 것이지요. 전쟁을 했는데 철학이 들어온거죠. 그 계기로 인문학 집단인 후마니타스가 생기고 신의 말씀이나 천국에 대한 연구가 아닌, 바로 이 땅 현재를 고민하고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국가도 그 중 하나였는데 빈자(貧者)나 어린이들을 구제해 줄 이상적인 공동체의 형태로 인식했기 때문이지요. 이 고민이 의미 있는 것은, 현재를 고민하기 위해 현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에라스무스가 우신(愚神)을 예찬하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그로써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고민했다면, 토마스 모어는 상상의 국가를 만들어 이상모델로 고민하고, 그 정점에서 라블레도 같은 고민을 합니다. 라블레에게는 수도원이 그것인데, 그 곳은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가감 없는 욕망의 장이 됩니다. 외부의 규율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규율로 살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는 공동체의 형태이죠. 흘러넘치는 욕망 그대로를 인정하고 누리는 그런 삶 말입니다.

수도원은 건축 디자인 자체부터 특이합니다. 높은 벽으로 둘러쌓인 과거의 수도원이 아닌 벽을 없앤 수도원이죠. 규율은 단 하나 '원하는 바를 행하라'는 것 뿐입니다.  여자도 들어 올수 있고 심지어 수도사들은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위선자, 고리대금업자, 편협한 신앙심을 가진자, 만족을 모르는 법률가들이죠. 수도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삶을 행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세속안에 있는 공동체, 이름이 수도원이라는 아이러니한 작은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민중들의 조롱과 웃음과 유머가 넘쳐나는 카니발과 같은 현장이지요. 가르강튀아 첫 페이지 서문에는 술꾼과 매독 환자에게 이 글을 바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지요. 이후 엄청나게 먹고 마시고 싸고 토하고 떠드는 얘기들로 채워집니다. 심지어 가르강튀아는 기형적으로 큰 사람이지요. 가르강튀아의 놀이만으로 한 장이 채워지기도 합니다. 카니발의 특징은 모든 것이 허용되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카니발은 웃음과 해학으로 모든 것을 까발리는 것이죠. 신성 모독을 통해 신을, 권위로 다가오는 습속 법등도 귀족이나 사제 법관들을 공격하면서 무화시키고, 자연이 주는 두려움도 아무것도 아닌 양 웃음으로 넘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카니발은 민중들의 욕망이 언제나 분출하고 흘러넘치는 고정되거나 정형화되지 않는 운동의 현장입니다.

이것을 그로데스크 리얼리즘이라고 한다고 하네요. 천상의 것, 고귀한 것을 땅으로 끌어내려 일상으로 그리는 것이지요. 비일상적인 것들이 일상이 되면서 특유의 활력을 만들어내는 시간이 됩니다. 피, 어둠, 장애, 죽음등 어둡고 으스스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은 양 현재로 불러내, 비웃거나 폄하하거나 기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해학과 유머로 비틈으로써 삶의 한 현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라블레는 에라스무스에게서 백치와 광기를, 중세 카니발에서 패러디를 차용해 글을 썼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정리 될지 무척 궁금해 하면서 책을 읽다가 마지막에서 수도원으로 정리가 되어 좀 뜬금없다고 생각되었어요. 쪽글을 쓸 때도 정리를 수도원으로 맞추면서 너무 매끈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요. 그런데 그 수도원이 라블레가 그리는 작은 공동체의 모델이고, 정형화 된 공간이 아니라 카니발과 같은 현장으로 욕망이 그 자체로 인정되는 곳이라는 점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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