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사성제 팔정도 세미나 > 8차시 후기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21-06-09 21:46
조회
2631

     四聖諦 八正道 세미나 8차시 후기


 ‘正業, 바른 행위’에 대하여


벌써 사성제 팔정도 세미나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첫 번째 하신 설법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그 초전법륜의 핵심내용이 사성제 팔정도입니다. 부처님은 삶을 관통하는 근본진리로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제시하시고, 고통과 번뇌가 소멸되어 열반에 이르는 올바른 수행법을 말씀하셨죠. ‘도성제(道聖諦)’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8가지 수행방법(八正道)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말과 행동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수행 방법인 것이죠. 팔정도에 있는 ‘계율, 선정, 지혜’의 삼학은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이 동시에 갖추어진 아주 실용적인 가르침인 것이죠.


그래서 팔정도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의 실제 삶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질문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특히 저번 주 ‘正語’를 공부하며 벼라별(?) 이야기들을 즐겁게 나누었는데요, 이번 세미나에서도 ‘正業’을 공부하며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습니다.


계율을 중국어로 ‘쿵후’라고 한다는데요, 공부라는 말이죠. 우리는 공부를 머리로 한다고 생각하는데, 쿵후는 ‘몸의 단련’이랍니다. 즉 계율이란 ‘몸의 단련’이고 그것이 공부라는 거죠. 그러고 보니 ‘쿵후팬더’라는 영화에서 구여운 팬더 포가 책상 앞에서 끄덕끄덕 졸면서 책을 펼쳐놓고 공통과제 하는 모습은 보지 못한 거 같네요^^ 공부란 게 사는 일과 따로 있는 그런 게 아니라,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하는 모든 것이라는 말이겠죠. 그렇다면 그 공부는 결국 하나의 습관이 될 때까지 몸으로 단련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건강한 삶이 바로 계율이겠지요. 그렇다면 계를 지킨다는 건 ‘자연스럽게 사는 일’과 다르지 않겠지요. 밤엔 잠을 자고, 낮엔 햇빛 받으며 몸을 움직이는 일. 이렇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연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가 ‘正業’일 것입니다.


八正道의 ‘正’은 ‘中道’입니다. 中道로서의 ‘바른 행위’. 중도는 부처님의 경험적 실천에 바탕을 두고 제시하신 새로운 실천론이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당시 사람들이 쾌락주의, 즉 욕망의 격정에 몸을 맡기는 생활 태도와 고행에 의해 도를 닦고자 하는 금욕주의라는 실천태도를 비판하셨죠. 자신이 몸소 체험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붓다가 되기 전 고타마 싯다르타는 더 할 나위 없이 충만한 쾌락을 누리며 살았지요. 그의 아버지가 고타마의 미래에 대해 염려한 나머지, 고타마를 왕궁에 붙들어 두기 위해 그런 환경을 조성했던 것이죠. 그런데 고타마는 그런 생활을 다 버리고 출가합니다. 그런 생활로부터는 苦를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실마리도 얻을 수 없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출가한 고타마는 어느 누구보다 열성적인 금욕주의자로 6년 동안 고행을 실천하죠.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도 번뇌를 벗어날 수 있는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찾아낼 수 없었죠. 고타마는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체험을 통해 붓다는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할 수 있었고, 새로운 실천론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中道’였습니다.


중도란 ‘두 가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실천입니다. 그래서 ‘中’은 ‘正’이고, 正은 ‘알맞음’입니다. 쾌락주의나 금욕주의가 하나의 고정적 입장이라면, 중도는 고정적인 어느 한 점을 지키려는 태도가 아니죠. 그래서 그것을 ‘알맞게 죄여서 미묘한 제 소리를 낼 수 있는 거문고의 줄’에 비유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이 中道가 여덟 가지 실천 항목으로서 나열된 것은, 아마도 인간 생활의 모든 면이 그렇게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곧잘 극단적이 됩니다. 그래야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배가 ‘터지게’ 먹고, ‘너무’ 재밌고, ‘정신줄 놓고’ 뭔가를 보고, ‘열심히’ 공부하고...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행동이 어떤 궁극적인 행복과 만족도 주지 않는다는 걸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붓다가 제시한 중도의 실천방법은 궁극적이며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죠. 그래서 불교는 ‘평상심이 진리’라고 합니다. 바른 행위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조화와 올바른 관계를 형성합니다. 바른 행위는 다른 사람들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모든 이에게 안도와 평화를 주지요.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도 행위에 의해 규정되고 현명한 자도 행위에 의해서 규정되나니, 인간의 통찰지는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행위가 인격을 만든다(248)고 하죠.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 말로 짓는 좋은 행위,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를 실천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자제’이며, 이를 위해 ‘방일’과 ‘몽상’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방일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이 새삼 다른 느낌으로 가슴에 와닿습니다. ‘방일치 말고 정진하여라. 나는 평생 노력해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왔다. 너희도 방심하지 말고 정진해라.’ 부처님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부처님도, ‘평생 노력해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왔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할 말이 없습니다.


업과 윤회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더랬죠.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론'으로 보면, 현재의 내 삶은 과거(전생) 나의 업력 때문이고, 지금 내가 하는 생각과 행동은 나의 미래를 변화시킨다는 것이죠. 즉 나의 현생이 힘들고 괴로울 때 부모 탓, 세상 탓을 하지 말고, 그것이 전생의 나의 업력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법구경 인연담에 나오는 ‘마하깔라’의 이야기도 그런 업과 윤회에 대한 것인데, 죽음 직전에 마음으로 짓는 업, ‘의도’가 다음 생의 윤회를 결정하게 된다는 말씀이죠. ‘전생’의 업이 다음 생의 괴로운 삶으로 윤회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五蘊'을‘ 이 몸’이라는 실제 사물로 착각하고 사는 중생은 윤회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구요. 眞諦, 즉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 보면 업도 없고 몸도 없고 삼세도 없으니 윤회도 없다고 하겠지만, 깨닫지 못한 우리는, 이 육신을, ‘나’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어떤 기억이나 습관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고, 그것들은 다시 또 다른 어떤 존재에 영향을 미쳐 다시 태어나며 윤회할 수밖에 없을 같다구요. 업과 윤회에 대해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밖에 우리 모두의 관심을 끌었던 문제가 ‘유정란을 먹으면 첫번 째 계율인 불살생계를 법하는 것이 된다’는 부분이었죠. 저는 그냥 불살생계를 저지른 과보를 받기로 했습니다.^^ 다른 도반들을 어찌 하실지.


다음날 우리 단톡 방에 사진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ㅋㅋㅋ 발 빠른 도반가트니!!^&^  여러분께서 각자 알아서 하시는 거스로!!


                                                                                          


      이 계란은 동물복지 인증이면서 유정란이 아닌 것으로, '식용란'이라고 써 있답니다. ㅎㅎㅎㅎㅎ  풀무원에 신실한 불교도가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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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0 07:28
    현숙샘의 낭랑하던 입발제가 다시 복기되는 듯한 후기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아아, 저를 멘붕에 빠뜨렸던 유정란 이슈.... 그날 이후 아직 저희 집 냉장고에 계란은 계속 비어있습니다만... 식구들의 원성이 들리기 시작하면 일단 저 식용란이라도 사다 놓아야 할까요. 동물복지의 관점이 저 닭에게도 해당이 되는 걸지 아직 고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시대 저희가 먹는 음식의 연기적 조건은 한숨과 눈물없이는 만날 수 없는 것일까요. 일단 이것이 조건임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긍해야 하는 것일지. 일단 저 자신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라면 계란에게 안녕을 고하는 것으로.... _()_

  • 2021-06-10 09:29
    이건 강의록인가요? ㅎㅎㅎ. 반칙. 불교공부하면서 업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어떤 숙명 같은 것에서 내 삶을 달라지게 하는 가능성 같은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