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6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21-06-18 17:20
조회
2679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나옵니다.




홀로 유행하는 것이 낫다. 어리석은 자는 벗이 되지 못한다. 숲속의 코끼리가 힘들이지 않고 가듯, 홀로 유행하며 악을 짓지 말지니. (677)



샘은 우리의 번다해진 만남과 더불어 이 구절을 곰곰히 생각해 보자고 하셨죠. 왜 우리는 그렇게 번다한 모임들을 하고자 하는 건지, 왜 어딘가에 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어떤 때는 혼자 있고 싶어 하면서도, 왜 그렇게 소속감(?)을 원하는지, 그 욕망을 한 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관계가 우리를 규정한다고 배웠죠. 우리의 감정과 욕망도 관계로부터 파생된다고 했구요. 그런 모임의 장을 경계하는 이유는 그로부터 우리의 욕망과 감정이 곧잘 모방되기 때문이죠. 스피노자도 감정은 모방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아도, 어떤 감정이 형성되어 있는 場에서 우리는 그 감정을 모방하게 되고, 어떤 유사한 경험을 가져와 그 감정을 스스로 겪게 되기도 한다죠. 그러니까 정서라는 것이 내 안에서 자율적으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번다함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이고, 부처님께서도 그런 모방된 감정이 마음의 고요함을 깰 수 있기 때문에 그걸 경계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 곧 바다 건너 멀리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우리 도반은 오늘도 또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한다던데, 모쪼록 그 마음만큼은 ‘번다해지지 않도록’ 잘 깨어 알아차리시길 빕니다.


샘과 함께 읽은 몇 개의 게송을 다시 정리해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고/ 왕족 출신의 두 왕을 살해하고/ 왕국과 그 신하를 쳐부수고/ 바라문은 동요 없이 지낸다.  (635)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갈애’와 ‘자만’입니다. 나는 갈애와 자만으로 태어난 존재라는 말씀이죠. 여기서 자만은 ‘내가 있다는 자만’입니다. 참으로 태어남 자체가 이미 고통의 시작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왕국과 그 신하는 ‘12처의 감역’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미 감각적 욕망의 쾌락을 추구하는 갈애를 숙명적으로 부여받은 존재라는 바탕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죠. 사성제는 이러한 존재의 기반을 말해주는 진리입니다. 그 고통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들을 ‘살해하고’, ‘쳐부수는’ 일이 수행이겠죠.




코끼리가 전쟁터에 나아가면/ 활에서 화살이 쏟아져도 참아내듯,/ 나는 근거없는 비난을 참아내리라./ 사람들은 대부분 계행을 지키지 않으니. (665)



이 게송을 읽으며 부처님도 비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참 안심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누구에게도 비난 받지 않는 사람은 없겠죠. 그런데 우리는 비난받는 일을 참 두려워합니다. 욕을 먹고 싶지 않다는 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싶다’는 탐욕이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계행을 지키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욕하고 비난하죠. 부처님은 그래서 그 비난이 ‘근거 없는’ 비난이라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근거 없는 비난이니 참아낼 수 있는 것이구요. 더러는 근거가 있는 비난을 받기도 하겠죠. 그러나 확실한 근거가 있다면 그건 비난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부처님이 디게 훌륭하셔서 비난을 참아낸 것이 아니라, ‘비난’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근거없는’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괘념치 않으셨던 것이겠네요. 욕 들어 먹을 짓을 했다면, 그건 욕이 아니라 팩트고, 욕 먹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욕을 했다면 그건 근거가 없는 것이니 내 몫이 아닌 것이어서 상관할 바 아니죠. 참말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늘 이치에 타당하다는 걸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이번 수업에서 샘은 에세이 쓰기와 관련하여 조언과 심심한 당부를 해주셨습니다.


우리 글쓰기의 주제가 ‘불교와의 만남’이죠. 샘은 ‘불교’라는 것을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만났는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하셨죠. 저마다 불교를 만난 지점이 다를 것이고, 그것을 만나게 된 계기도 다를 겁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뭔가를 새롭게 만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샘은 이것을 베르그손의 '원뿔 도식'을 칠판에 그려놓으시고 설명해주셨습니다만, 솔직히 저는 이 '원뿔 도식'이 말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진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의 기억에는 개체의 기억 뿐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기억, 전우주의 기억이 함께 있기 때문에, 습관적 메커니즘에 따라 상투적인 인식작용을 하다가도 문득 ‘불확실하고 낯선 것’이라고 인식되는 그런 사태, 그런 순간들을 경험할 때, ‘우주적 기억’과 조우하게 된다는데요, 선생님은 바로 그 순간이 ‘생각’이라고 말씀하셨죠. 즉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이 질문을 만드는 순간이라고 하셨죠. ‘낯설고 불확실한’ 사태, ‘다른 수준의 기억’, ‘우주적 기억’, 질문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이라는 이런 말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에세이의 주제가 ‘불교와의 만남’이라고 할 때, 그 만남의 순간들은 바로 저런 사태를 경험하는 삶의 한 장면들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장면들은 우리의 습관적 기억장치로서는 해석이 불가능한 그런 장면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뭔가 변곡점이 될 수 있는 그런 계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점점 에세이를 쓰는 일이 막막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과연 어떤 사건을 질문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역량이 내게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구요. ㅠㅠㅠ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적 상황을 문제로 직시하고 그것을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의식이 확장될수록 무의식도 확장된다는데, 과연 그 문제를 대면하고 돌파하는 ‘성숙’함이 있는지,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어쨌거나 불교를 ‘만난다’는 것은 불교가 하나의 질문으로 차고 들어오는 어떤 순간을, 그것이 하나의 변곡점이 되었던 하나의 순간을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 순간이란 내 삶의 어떤 장면이 다른 길로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던 그런 순간이겠지요. 그걸 감지해내기 위해서는 그걸 바라볼 수 있는 나만의 키워드(Key word)가 있어야 할 겁니다. 샘은 각자 자신의 키워드로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을 만나게 된 어떤 장면을 포착하여 글을 써나가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만, 하아~~~~~~~~~~~~!!



『천개의 고원』 - 여섯 번째 고원 ‘기관 없는 신체’


‘기관없는 신체’라는 개념은 아르또가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하여’라는 글에서 언급한 말입니다.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하여’라는 말은 아르또가 유럽인들에 대해 갖는 역겨움과 혐오감을 나타낸 말인데요, 이른바 유럽인들이 갖는 자부심이라는 것은 ‘나는 문화인’이라는 것이고, 이것은 ‘교양인’, 즉 ‘체계적’ 교육을 받은 이들을 말하죠. 이런 체계적 교육을 받은 이들은 오로지 체계 속에서밖에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코스를 밟아온 사람들은 그 코스 안에서 정상 비정상, 옳고 그름이 체계적으로 규정되어 있죠. 이들은 스스로 질서정연한 사고를 가지고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아르또가 보기에는 그들이야말로 괴물과 같은 자들이죠. 왜냐하면 그들은 그네들이 구축해놓은 정상성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것들을 다 박멸하고 소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네들은 일종의 위생주의자들인 셈입니다. 이런 태도는 참으로 끔찍한 폭력성이죠. ‘저런 애들은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위생주의적 사고이고, 이것이 바로 파시즘이죠. 들뢰즈/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 바로 파시즘입니다. 그런데 이 파시즘은 정치적으로 등장했던 역사의 파시즘 뿐 아니라 '우리 안의 파시즘'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천개의 고원』은 우리 안의 파시즘과 싸우는 책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 마음에 작동하는 파시즘은 동일성, 청결주의, 순결주의 같은 것들입니다. 나와 다른 이들, 혹은 세상에 해가 되는 이들은 다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들이 바로 파시즘적 사고인 것이죠. 우리는 같은 인간에게는 그런 짓을 함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균들에게 그런 짓을 합니다. ‘99.9% 박멸’을 외치죠.


파시즘의 욕망은 동일화에 대한 욕망입니다. ‘나처럼’ 되어야 한다는 욕망이죠. 나같은 사람들로 세상이 채워져야 한다! 거기에는 내가 善이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 善을 기준으로 여기에 어긋난 모든 것들은 사라져도 된다는 것이 유럽인들이 말하는 교양의 결과인 것이죠. 양차대전과 나치의 학살은 유럽의 이성의 이름으로 행해진 학살입니다. 인간은 이성과 교양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미친 짓을 하지요. ‘신의 심판을 끝장낸다’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자기를 신의 위치에 놓고 타자를 심판하려는 것이죠. 아르또는 그런 점에서 맑시즘도 초현실주의도 비판했죠. 모든 심판은 자기를 신의 위치에 놓습니다. 자기를 신의 위치에 놓으면 자연을 보지 못하게 되죠. 그래서 아르또는 언어중심적 사유도 비판합니다. 이성은 합리성이므로 그 도구가 언어입니다. 그래서 아르또는 세계가 언어로 표상될 수 있다는 믿음을 깨고자 합니다. 언어는 일부일 뿐이죠. 이 세계는 언어적 표상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들로 가득합니다. 아르또는 이러한 사유를 북아메리카 인디언, 멕시코 주술사,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의 삶과 우파니샤드, 도덕경으로부터 배웁니다. 서구의 합리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그런 사유로부터 배웁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그것을 가져옵니다.




당신은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하나(또는 여러 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리 존재하거나 완전히 만들어진 채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미리 존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신은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그것을 욕망할 수도 없다. 그것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수련이며, 하나의 불가피한 실험이다. (『천개의 고원』 / p.287)



여기서 말하는 ‘그것’이 바로 ‘기관없는 신체(CsO)’입니다. 이건 氣라고 할 수도 있고 道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개별적 신체성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그 전에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죠. 개별성이란 만물이 만들어놓은 잉여의 결과일 뿐이죠. 개별적 몸체 이전에 그 몸체 자체를 만들어내는 끝없는 에너지, 그것이 ‘기관없는 몸체(CsO)’입니다. 그러니까 ‘기관없는 신체(CsO)’가 격파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개체, 동일적 개체성이죠. ‘기관없는 신체(CsO)’라는 것은 우리가 도달하는 것도, 획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극한이죠. 불교에서도 궁극에서는 ‘나’가 없다고 말하죠. 과학적으로도 존재는 파동이고, 원자도 결국 비어있다고 하죠. 과학적으로 볼 때 원자도 텅 빈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들로 구성된 개체도 꽉 차 있을 리 없죠. 결국 우리가 지각하고 감각하는 한에서는 대단히 단단하고 차있는 실체처럼 몸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극한으로 밀고 가보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無와 ‘어떤 것’의 사이에 있는 거죠. 이것이 空하다는 겁니다. 空하기 때문에 色이죠. 色은 空의 결과이고, 우리는 그 현상함을 통해 空함을 알 수 있습니다.


CsO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불어의 약자입니다. 아르또는 ‘기관들의 전쟁을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보기 위한 눈’, ‘듣기 위한 귀’라고 말하는 어떤 정해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관이라는 말을 비판하는 것이죠. 눈은 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코는 냄새 맡기 위해 신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그렇게 의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죠. 목적론이 함축하는 것은 그 목적을 결여하고 있는 것들을 비정상적인 것들로 추방하기 위한 것이죠. 목적론의 세계가 비판받는 이유는 그 의도에 어긋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죠. CsO도 기관(Organ)에 반대합니다. 기관은 일정한 기능을 부여받은 것이죠. 관료주의 체계, 구성이 Organ이죠. 그네들을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부여받은 것이죠. 전체의 부품인 것이죠. 우리의 몸은 걷기위한 발, 잡기 위한 손..이라고 생각하죠. 따라서 기관없는 신체를 상상한다는 것은 규정성에 반한다는 뜻이죠. 선험적으로 존재에게 주어진 규정성, 그것에 따라 작동하도록 되어 있는 기관에 ‘반함’이라는 것이 ‘기관없는 신체(CsO)’라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모든 자리에서 직관만 하는 것을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넘쳐 흐르면 무질서하다고 생각하죠. 우리 몸에서든, 사유체계에 있어서든, 사회체에 있어서든 기관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심판의 사유입니다. ‘기관없는 몸체(CsO)’는 기관들에 진저리를 냅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 ‘기관없는 몸체(CsO)’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죠. ‘기관없는 몸체(CsO)’가 오작동을 일으키면 우울증의 몸체가 되고, 마조히스트의 몸체, 편집증의 몸체, 분열자의 몸체가 되죠. 자기의 몸체가 기관들의 활동을 거부할 때 이런 몸체가 됩니다. 요기스트들의 몸체도 기관없는 몸체죠. 우리는 있어서 보고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부시맨이 느끼는 감지, 일종의 텔레파시 같은 감지는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존재가 파동이라면 얼마든지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기관없는 몸체(CsO)’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무생명 등으로 위계화 짓는 것을 넘어가서 개체가 발생하는 평면 그 자체가 얼마나 무한한 에너지의 흐름의 장인지를 말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들/가는 “너희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찾아라,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아라.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 슬픔과 기쁨의 문제다, ”라고 말합니다. 왜냐 젊은이의 신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늙은이의 신체, 병든 신체 등이란 하나의 언어적 심판일 뿐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입니다. 젊음도 늙어가고 있음 속에 있는 늙음의 과정인 것이죠. 늙음은 미지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늙는다는 것은 젊음을 살아가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젊음과 늙음에 대한 표상이 있죠. 그래서 늙음을 두려워하며 늙으면 자기 인생이 끝날 것처럼 생각해서 젊은 시절을 통해 남아 있으려고 하죠. 이것이 다 분별의 문제일 뿐이죠.


그래서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든다는 문제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규정성속에 가두지 않는 실험을 말하는 겁니다. 다만 그 실험 속에는 죽음으로 가는 실험도 있는 것이죠. 우울증 거식증 처럼요. 그러나 기관 없는 신체를 통해서 우리가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환상, 즉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집합’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오히려 ‘정상적 성’을 추구했죠. 정상이 아닌 것은 다 변태라고 했습니다. 정상성이 중심이 된 사유가 바로 주체화죠. ‘여자가 이러하면 못 쓴다’, ‘남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정상성, 주체화를 통해 모든 것을 모든 것을 환상으로 만들어놓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그런 정상성의 극단에 서 환상을 고수하죠. 그래서 정상적 성이라는 것 안에서 쾌락의 극대화를 추구하며 실재를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실재란, 현실입니다. 현실=실재란 푸코가 말한 각자마다 다양한 방식의 쾌락을 다양한 용법으로 발명는 일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오로지 쾌락의 강도와 양, 그것의 지속에만 집착하느라 자기만의 독특한 쾌락을 발명하는 일을 놓치고 있죠. 자기만의 독특한 쾌락을 발명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신체를 발명해야 합니다. 들/가가 기관 없는 신체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도 결국 ‘그런 기관으로서 환원될 수 없는 신체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조직화되지 않고 끈질기게 잔류하는 힘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들/가는 CsO의 각 유형에 대해 우리가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이것은 어떤 유형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판단하는 어떤 절차와 수단에 의해서?   2) 어떤 양태인가? 예상과 달리 어떠한 변이, 어떠한 경이로움, 어떠한 불의의 사태에 의해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292)



무슨 운기가 작동했는지, 어디에 정신이 팔렸는지 모르지만, 어제 밤 다 쓴 후기 파일을 순식간에 날려버렸습니다. 하도 허탈해서 후기를 건너뛰고 싶었지만... 이 모든 일도 다 무슨 이유가 있었을 터. 간신히 마음 추스리고 다시 써서 올리느라 늦었습니다. 무얼 쓰고 있는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하느라 산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반들께 죄송합니다.

평안한 한 주 건강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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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8 21:00
    요런 글을 두 번이나 쓰셨다고요!!! 아니아니 쌤에게 왜 그런 마구니들이!!! 이놈들 혼쭐을 내줘야겠어요!!! 얼마나 허탈하셨을까! 그럼에도 이런 후기를 남겨주시다니..왕언니를 애정&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니까요....ㅜㅜ 쌤! 평안한 한 주 건강히 보내시고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