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12월 7일 7회 수업공지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0-12-05 21:24
조회
3468
 

어느새 12월입니다. 올 초 1학기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해서 그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공부를 해왔는데 어찌어찌하여 이렇게 12월까지 왔습니다. 4학기 중턱도 넘어섰으니 이제 2번의 수업만 더하고 나면 올해 마지막 에세이 발표입니다! (믿기시나요?!) 매년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인지 뭔지 모르게 한 해가 더 훌쩍 지난 것만 같습니다. 저만 그런 건지. ㅎㅎ 아무튼 마음의 중심을 잡고 올 한해를 잘 마무리해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승을 전체적으로 아우른다는 <섭대승론>을 정화스님께서 해설하신 책으로 읽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예전에 공부했던 유식과 대승의 가르침들인데 다시 보니 또 갸우뚱하며 어렵게 읽히고 그동안 이해하고 있었던 게 맞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근본 바탕의 가르침은 공(空)이죠. 이 공의 진리를 바탕삼아 우리는 공을 일상에서 어떻게 체화하고 어떻게 질문을 던져야 할지... 에세이를 앞두고 더 고민이 됩니다.

1.

경전을 보고 수업을 들으면서 제법이 무상하고 일체가 공하다는 것을 읽고 생각하고 또 듣습니다. 그리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런데 일상으로 돌아오면 도로아미타불을 염하듯 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 같은 이 간극은 무엇인지...! 경전을 읽고 잠시 명상을 하고나면 마음이 부드러워진 듯하지만, 문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은 너도 나도 부동산 종부세를 얘기하고 코스피 지수를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부동산과 주식시장이 요동칠 때 어떻게 하라는 말씀은 안 해주셨죠. 부처님께서 살아계셨던 시대와 저희가 사는 21세기는 상황이 전혀 다르지만 부처님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마음의 원리를 말씀해 주시기는 했습니다. 연기가 작동하는 이 세계 안에서 매 번 롤러코스터를 타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하셨죠. 어떻게 들여다봐야 할까요? 이번 시간에 샘께서 말씀해주신 그 구체적인 방법에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파트 값이 수억 원이 올라서 갑자기 많은 종부세를 내야하는 부담에 정부에 뿔 딱지가 난다면... 사실 화가 나는 그 마음의 근저엔 소유에 대한 나의 어떤 생각이 있습니다. 내 집을 소유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당연한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세금이 주는 번뇌도 어찌 되었든 결국 소유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집을 소유하는 것은 좋은 것인가? 소유하면 무엇이 좋은가? 이사를 가지 않아서 좋은가? 이사를 가지 않으면 무엇이 좋은 건가? 편해서 좋은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갑니다. 이런 질문은 궁극적으로 나의 욕망이 향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게 하죠. 나의 욕망이란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내가 바라는 이 욕망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나를 해방에 이르게 하는지 의심해볼 일입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따져보면 무엇인가를 소유함으로써 그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소유함으로써 해방에 이르게 해주는 것을 발견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짱을 뜰 수 있을 겁니다. ㅎㅎ

문제는 우리가 경전을 읽고 철학서를 읽으면서 마음의 자유와 깨달음을 구한다면서 일상에서의 욕망은 매번 습관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샘께선 이게 배움과 일상의 모순이 아니라 자기 마음 안의 갈등이자 모순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나는 이것을 원하는가. 다들 우르르 몰려가 영끌로 아파트에 투자한다고 할 때 나는 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가.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던질 때 중요한 것은 공을 결론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공을 전제로 질문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떠한 시대적 사회적 인연 조건 속에서 내가 이런 욕망을 일으키고 번뇌에 끄달리는지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냥 ‘결국 모든 게 공한 것인데!’가 아니란 말이죠.

푸코는 우리에게 진리 판단의 체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고 특정 시대에 형성된 판단의 체계말입니다. 이건 마치 물고기가 어항 속에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항이라는 삶의 조건 안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어항 밖을 나가거나 다른 어항으로 가지 않는 한 자신이 속한 어항 안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 신자본주의, 한국 등등이 말하자면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어항이겠죠. 때문에 자기 자신의 번뇌를 보려면 우선 일차적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앎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소유는 좋은 것이라는 앎, 내 아파트 값이 오르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믿음....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적 조건을 질문하고 분석하지 않으면서 내 번뇌를 바라만 봐서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비록 전체 연기를 다 알 수는 없다고 해도, 모든 것이 인연 조건 속에서 일어남을 보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그런 맥락일 겁니다. 우리가 속한 시대적 조건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공업을 간과해서는 안 되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내가 겪는 이 번뇌는 나만의 번뇌가 아닙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조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와 비슷한 번뇌를 겪지 않겠습니까? 아,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괴롭겠구나, 이런 점이 힘들겠구나... 라고 지금 내게 부대끼는 마음을 타인에게로 확장해 보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구나. 내가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도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면 좋겠어! 라는 마음을 내는 것 말이죠. 그런 식으로 내가 가진 문제의식을 구체화시키고 더 적극적으로 확장시킨다면 바로 그 마음의 바탕이 자비심인 거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 조건에서 일어난다고 할 때 사실 이 인연 조건이란 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스케일을 넘어섭니다.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곳에서 내 삶과 내 마음이 영향 받고 있는 크고 작은 시대적 조건을 곰곰이 궁구해 보기도 해야겠지만, 사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이 모든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들의 이유를 온전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파악할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이 중중무진의 인과를 통찰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완전히 깨달은 자뿐이라고 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역으로 우리가 의지를 발휘해 주변의 상황을 계획하고 콘트롤함으로써 무언가를 이루고 말겠다는 게 자만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찌 우리가 중중무진의 조건을 모두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겸허해야 하죠. 따라서 상황이 내 예상대로 굴러가지 않고 계획이 어그러졌다고 좌절한다면 이것 또한 자만의 다른 이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좌절이란 내가 바라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고, 기대를 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에 따라 무엇인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니까요. 그렇게 뭐든 내 뜻대로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만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다만 우리의 지력으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중중무진의 인과가 얽힌 이 세계에 경외심을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며 (恐懼) 자신을 경계하고 삼갈 때 (戒愼) 우리의 공부는 영성의 차원과도 연결될 수 있는 거겠죠.

2.

윤리학 3부에서 스피노자는 온갖 종류의 정서를 분석하는데 이 분석의 공통점은 모든 정서가 어떤 조건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정서는 많은 경우 타자를 매개로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모방적인 속성을 가집니다. 개그 프로그램을 볼 때 사람들과 함께 보면 더 웃음이 난다거나 바탕에 깔린 웃음 소리 때문에 더 웃게 된다거나 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되죠. 그렇다면 누구와 있느냐에 중요해지겠죠. 우리는 서로 함께 있는 사람의 정서를 모방하게 될테니까요. 정서의 특징엔 시간성도 포함되는데 예를 들어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이미지를 떠올리며 정서가 일어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 정서는 또한 우연적이라고 하죠. 어떤 상황에서 특정 정서가 일어나는 건 필연이 아니라 뭔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느낌이 일어날만큼 우연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서보다 이성이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스피노자는 정서를 가장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이성이란 것도 정서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죠. 집단을 구성하고 사람들을 함께하도록 추동하는 모든 것의 바탕엔 정서가 있다고 말합니다. 타자를 끊임없이 원하도록 만드는 충동 또한 정서라고 하죠.

정서가 중요한 이유는 정서가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기호란 징후죠.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신호입니다. 가령 내 몸에 열이 나면 몸의 어딘가에 염증이 생겨 아프다는 징후입니다. 열을 통해 내 몸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내게 일어나는 정서를 통해 나 자신의 삶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스피노자는 정서를 크게 기쁨과 슬픔으로 나눕니다. ‘놀람’처럼 기쁨이나 슬픔에 속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 말고요. 기쁨은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이고, 슬픔은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이행’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기쁨이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외부 대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완전함에 더 가까운 방향으로 가거나 거기서 더 멀어지는 이행입니다. 완전성으로의 이행이라는 건 인간이 어떻게 이런 행위를 하고, 이런 감정을 갖고, 이렇게 살아가는가 라는 존재에 대한 지평을 갖게 되는 것이니 그런 지평을 갖게 되면서 당연히 더 슬프고 위축되지는 않겠죠.

정서에서 중요한 점은 기쁨 혹은 슬픔의 정서가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작동하느냐 아니면 어떤 것을 할 수 없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느냐 입니다. 슬픔의 정서는 뭘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감정이죠. 샘께선 이게 맹자가 말한 자포자기(自暴自棄)와도 같다고 하셨습니다. 자포자기란 단순히 지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거칠게 대하면서 비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기쁨의 정서란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되면서 내가 더 확장되는 느낌을 줍니다. 이때 기쁨으로 인한 행위 역량의 증대, 더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에는 외부에 예속됨이 없습니다. 타인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가령 ‘쟤를 이기고야 말겠어!’ 라며 질투와 경쟁심을 발휘하는 마음은 비록 그것이 겉으로는 어떤 행위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기쁨의 정서라고 볼 수 없겠죠.

스피노자는 우리 실존의 출발점을 우리가 무엇을 느끼느냐로 보았습니다. 이성으로는 저것이 합당하다고 여기는데도 우리가 결국 다른 것을 선택하는 이유는 정서가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하죠. 욕망의 구도가 그렇게 습관화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욕망, 정서의 문제를 들여다 보지 않고 우리는 인간의 행위를 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의 이면에는 욕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죠. 나의 행위를 나의 욕망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이것만 인정해도 우리의 삶은 훨씬 담백해지지 않을까요!

 

<불교와 글쓰기> 12월 7일 4학기 7회 수업공지입니다.
  1.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까> 182-272까지 읽고 공통과제 해옵니다. 그리고 나누어드린 프린트물 일독해 오세요.  그리고... 에세이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나요? ^^ 말씀드렸듯이 이번 돌아오는 수업시간에는 경전의 어떤 품을 중심으로 어떤 주제의 에세이를 쓸 계획인지 각자 간단히 발표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 <윤리학>: 진도가 빠릅니다. 4부 넉넉히 읽어오세요. ^^


 
  1. 명상: 자비 명상을 매주 순차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는데 조금 익숙해지셨는지요? 돌아오는 월요일엔 4번째 단계로 내가 힘들어 하는 사람을 자비의 대상으로 삼아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 했던 중립적인 대상을 향한 자비까지 다시 한번 복습해보시기 바랍니다.


 

후기는 미영샘께서 올려주셨고, 다음 주 간식은 호정옵빠 (^^), 반찬은 성희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월욜에 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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