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12월 7일 수업 후기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20-12-10 13:19
조회
3401


唯識無境


유식에서 가장 중요하게 묻는 질문은 ‘마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유식(唯識)이라는 말에서 ‘識’은 명사로 풀지 말고 동사로 풀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왜냐하면 식을 ‘앎’이라는 명사로 말하면 마치 앎이라는 실체가 있다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말을 ‘아는 작용’이라는 동사로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대상 A가 있어서 그 대상 A를 원인으로 그것에 대한 想을 갖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식에서 는 기본적으로 사물의 존재 자체가 없다, 대상세계가 없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샘은 오늘 아는 작용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셨지요. ‘본다’는 것은 ‘안식(眼識)’입니다. 본다는 것은 신체가 감각데이터를 수용한 것이죠. 유식에서는 신체를 ‘유근신(有根身)’이라고 합니다. 뿌리(根)가 있는 신체죠. 이 뿌리, ‘根’은 산스크리트어로 ‘인드라’라고 하는데요, 유근신은 ‘인드라처럼 강한 힘을 가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유식에서 말하는 몸이란 ‘감각을 만들어내는 힘’, 아주 강력한 감각적 에너지를 방출하는 유근신이라는 말이죠. 이 유근신에 있는 眼,耳,鼻,舌,身이라는 감각기관이 에너지를 방출하여 또 다른 에너지와 결합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이미지(想)입니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에서는 그런 감각적 에너지가 끊임없이 방출되면서 감각을 생기하게 되죠. 그게 우리가 보고, 냄새 맡으며 어떤 이미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작용입니다. 우리는 보고 있다는 감각에너지와 또 다른 에너지의 조합을 통해서 어떤 영상을 형성합니다. 우리는 그 영상이 대상이라고 동일시하죠. 그런데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형태를 가진 대상세계가 출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출현하지 않을 뿐, 그 대상은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죠. 이것이 우리의 습관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 영상에 대해 ‘있다’고 여기는 전도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유식은 그런 대상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대상세계가 없다는 것이 더 뚜렷해질 수 있습니다. 동물들의 눈으로 본 대상세계는 인간의 그것과 같을까요? 현저히 다를 겁니다. 만약 컵이라는 대상이 실제 있다면 누가 보든 항상 동일한 그것으로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다른 생명체는 우리가 떠올린 영상처럼 이런 모양과 색깔을 가진 컵의 영상을 떠올리진 않을 겁니다. 모든 존재가 다 똑같은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면, 개체들마다 감각적 이미지를 그렇게 다 다른 영상으로 만들어낸다면, 그 중 어떤 영상이 그 감각적 대상을 지시하는 영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상세계란 없는 것이죠. 또 우리는 촉감이 있기 때문에 이 컵을 만져보고 연장적으로 어떤 모양을 가진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테면 아주 미세한 물질들, 컵에 붙어있는 세균들이 컵을 인식할 때고 그렇게 감각할까요? 이만큼의 무게와 크기와 색, 촉감을 가진 대상이라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감각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그렇게 감각할 수 있지만, 세균은 열등하고 생명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런 존재라서 그렇게 다르게 감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인간중심주의적 사고가 아니겠습니까? 山이라는 것도 인간이 감각하는 산과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가 감각하는 산은 너무 다를 겁니다. 이것이 유식에서 말하는 ‘유식무경’, 대상세계는 없다는 말입니다. 외부대상은 없고 오로지 마음이 만들어낸 영상만이 있다는 뜻이죠.


마음의 영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렇다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그런 영상이 마음에 만들어지게 되는 걸까요? 마음속의 내부영상은 眼,耳,鼻,舌,身이 감각한 것에 언어를 붙여 확정적으로 만들어주는 意의 작용으로 만들어집니다.


意識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처음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옛날 유가 경전에서는 ‘意’라는 말은 썼어도 ‘意識’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네요. 意識은 유식에서 六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서양에서 쓰는 말 중에 'consciousness'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것을 의식이라고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쓰는 'consciousness'와 불교에서 말하는 의식은 그 의미가 좀 다르다고 합니다. 'consciousness'는 언어적으로 형성된 관념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인데, 그래서 니체는 ‘우리의 다양한 충동들을 하나의 언어로 딱 붙박아 두는 역할을 하는’ 의미로서의 ‘의식’을 비판했다고 합니다. 샘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양에서 사용하는 'consciousness'라는 개념은 유식에서 말하는 ‘변계소집’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세계는 어떤 본질이나 실상을 가진 것이 아닌데, 우리는 언어적으로 ‘이것’이라고 규정지어 생각한다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6식으로서의 의식은 크게 두 가지 작용을 합니다. 첫째는 감각작용을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죠. 말하자면 우리가 스포트라이트를 어디에 비추느냐에 따라서 세계가 달라지는 그런 경우를 말하죠. 동일한 것을 경험해도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각도에 따라 떠오르는 세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의식이 감각을 그렇게 선명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 째 의식의 작용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고 작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의식은 사고 작용 전체인 것으로, 眼,耳,鼻,舌,身의 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기관이 감각의 데이터를 받아들이면 언어를 가지고 그 데이터에 대한 사고작용을 하는 그 전체가 의식인 것이죠. 말하자면 의식은 단순히 무엇이 있다, 없다를 알아차리는 작용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고 작용이 일어나는 마음 작용을 유식에서는 ‘심소(心所)’라고 하는데요, 마음작용은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겨난 말나식, ‘我’가 대상세계와 자기를 분리하는 그 전체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전체 마음작용은 아뢰야식을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아뢰야식이란 그 모든 단계의 마음작용 전체를 아우르는 識작용의 기반이 됩니다. 그 작용 속에서 마음에 영상이 떠오르는 것이죠.


어떤 걸 보자마자 어떤 색이 있는 얼마만한 크기의 무엇이로구나 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은 감각기관과 언어를 떠올려 사고하는 의식의 작용과, ‘내’가 컵을 본다는, 나 자신을 주체로 삼는 전체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영상입니다. 그 영상을 우리는 ‘컵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죠. 그 마음속의 영상인 ‘보이는 마음’을 유식에서는 ‘相分’이라고 하는데요, 이 보이는 마음을 보는 마음인 ‘見分’이 보는 것이죠. 그런데 ‘나’라는 것은 어디에 따로 실재로 있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만든 영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라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작용’만 있는 것이죠. 즉 우리가 본다는 것은 ‘보는 마음이 보이는 마음을 본다’는 것이고, 따라서 보이는 영상을 본다는 작용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의심하라


그런데 우리가 이미지를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 때문이지요. 언어가 그런 사고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는 언어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비상식의 세계죠. 세계가 언어와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역설로 말하죠. 불교가 상식적인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까닭은, 상식은 철두철미하게 언어로 기반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상식이라는 것들은 ‘언어대로 존재한다’고 하는 약속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들입니다. 양식, 상식, common sense는 언어를 붙여 만들어진 ‘공통적인 의미’라는 뜻입니다. 다른 시각場과 다른 조건 속에서 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생긴 것은 컵이다, 라고 언어적으로 약속한 것을 재생시킬 뿐이죠. 그러나 불교에는 근본적으로 언어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습니다. 중론에서도 언어는 가설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고, 유식도 변계소집을 말하며 비판합니다. 언어가 세계와 일치한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언어로 사고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고를 의심한다는 것은 언어를 의심하는 일이죠. 언어를 전혀 의심하지 않으면 사고를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사고 패터니즘을 의심한다는 것은 언어를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심으로부터 새로운 철학이 시작되는 것이죠. 그 철학에서 언어비판을 가장 공격적이고 비판적으로 시작한 이가 니체라고 푸코는 말합니다.


언어는 마치 뭐가 있는 것처럼 만듭니다. 연속된 것처럼 만들죠. 사고의 습관이 언어의 질서니까요. 선생님은 그 언어의 질서를 부정하지 않으면, 언어의 질서자체를 비판하지 않으면 기존의 사고습관을 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언어를 갖다 붙이면서 감각적 데이터를 종합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 의식입니다. 그런데 유식은 그 의식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의식의 근원이 바로 아뢰야식이라고 말하죠. 아뢰야식에 종자가 들어있는 것이죠. 우리가 어떤 것을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감각적 데이터를 받아들일 때 이름붙일 수 있는 종자, 힘이 있다는 겁니다. 아뢰야식에는 그런 힘들이 있는데, 그것이 기억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억종자가 ‘저장’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아뢰야식을 장식이라고도 합니다. 이 저장되어 있는 창고識으로부터 감각적 데이터에 이렇다, 저렇다, 이름을 붙이며 이미지가 생기는 겁니다. 따라서 어떤 감각적 데이터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런 識의 세계란 없습니다. 그래서 유식은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이미지’인 것이며, 그 ‘마음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자기의 세계에 투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세계가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한 개체가 그 자체로 우주라는 말은 유식의 의미에서 볼 때, 그 사람의 마음의 영상에 따라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한 우주라고 할 때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그 사람은 자기가 만든 마음의 영상, 즉 감옥에 갇혀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만든 마음의 영상이 곧 세계라면 이 말은 자기가 만든 마음속의 영상, 감옥이라는 세계만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죠.


세계를 다르게 구성하는 마음작용


최근 조**이라는 이가 세간에서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범죄를 저지른 이를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데, 불교식으로 말하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나쁨’ 속에는 감각적 데이터와 그것을 종합해내는 사고 작용과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어떤 기억, 즉 아뢰야식을 원인으로 하는 작용들이 만들어낸 ‘나쁨’이라는 이미지가 있을 뿐이죠. 그 이미지로 우리는 어떤 이를 ‘나쁜 사람’으로 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계는 나쁘지도, 좋지도 않다고 불교는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나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인간도 나쁜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작용이 만들어낸 이미지로 그 사람과 동일시하면서 나쁜 사람이라고 실체화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내 마음작용 안에 있는 나쁨과 좋음의 작용에 따라 세계가 갈리겠죠. 존재하는 것들의 양상이 갈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변계소집하는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조**의 어머니에게도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일까요? 모든 사람이 다 손가락질 하는 어떤 사람도 모두에게 다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 나쁜 사람의 얼굴을 모른 채 그냥 지나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마음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범죄를 저지른 ‘아무개’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마음이 생기고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완전히 세계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유식은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다르게 구성해낼 수 있느냐를 말해줍니다. 그냥 스쳐지나갈 때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사람이 ‘아무개’라는 말을 듣게 된 순간 우리 마음속에 영상이 덧씌워지면서 그 사람의 존재양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이 놀라운 메커니즘! 대체 무엇이, 어떻게, 이토록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걸까요? 불교는 우리에게 그걸 묻고 있는 겁니다. 그 자체 선도 악도 없는 세계로부터 어떻게 선과 악이 만들어질까요? 유식은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의 영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려는 일이 좌절되는 순간 그것이 방해물이라고 생각하죠. 그렇게 본다면 세상은 방해물 천지입니다. 세상에는 온통 내가 어떤 것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죠. 그런데 샘은 이걸 잘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는 우리를 뭘 못하게 방해하는 게 많은지, 뭘 못하게 방해하지 않는 게 많은지를요. 가만 생각해보니 정말 방해하지 않는 게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저 환한 태양이 내 공부를 방해하진 않죠. 저 은행나무도 이 깊은 법문을 듣는 일을 방해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들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방해하는 것들로만 세계를 구성할까요? 뭔가 잘 안되면 으레 이노무 세상은 왜 이렇게 나를 방해하느냐며 좌절하곤 합니다. 오직 그것을 못하게 한 요인들로만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걸 못하게 한 요인이 한 열 개쯤 된다면, 그 열 개를 빼고 나머지는 내가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들이죠. 그 마음을 떠올리게 되면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구구절절이 너무 옳으신 말씀이라 감동도 사치처럼 여겨지긴 하는데요^^) 어떤 이는 눈을 뜰 때마다 천장에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천장이 오늘도 내가 눈 뜨는 걸 방해하지 않아서 너무 감사하다고요. 어익후!! 이 정도면 보살입죠~^^ 그게 모든 만물에 감사하는 마음이겠죠. 내가 지금 어떤 것 때문에 뭔가 못하게 되었을지라도, 그 이유가 내가 그것을 영원히 할 수 없게 된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할 수 없게 만든 것들이 있는 그 안에는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만큼 많이 있다는 겁니다. 마음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쁜 일을 겪거나, 마음의 좌절감을 경험한다는 것은 내 마음의 영상의 세계가 그렇게 부정적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죠. 그런데 좋은 일을 겪을 때는 그렇지 않은 세계가 나타나지요. 매일 매일이 이렇게 다릅니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날은 짜증이 안 나는데, 어떤 날은 막 짜증이 나지요. 그게 바로 내 마음 속의 영상이기 때문입니다. 유식은 그 마음의 메커니즘을 파고듭니다.


마음속의 영상이 이 세계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영상을 해체해야 되겠지요. 그 영상을 해체해야 우리가 만든 세계가 다른 세계로 출현하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만드는 영상이 문제가 없다면 그냥 살면 되지만, 그게 번뇌를 만들면, (조**이 옆에 없는데도 그게 번뇌가 된다면) 그 세계를 그렇게 만들어낸, 그 합리적이지 않은, 무자비한 영상을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뢰야식에는 인간이기 때문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언어와 같은)과 내가 습관적으로 살아온 삶의 방식 때문에 저장되어 있는 것들이 다 함께 들어있죠. 그런데 그런 것들 외에도 습관적이지 않은 것들도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저는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몰랐던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몰랐겠지요!! ㅎㅎㅎ 이를테면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고 일컫는 성폭행범도 매초마다 폭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도 습에 끌려 그런 짓을 하긴 하지만 아주 잠깐 동안은 ‘그런 짓을 하면 안 돼!’라며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스쳐가듯 해보지 않았을까요? 한순간 정도는, 때로는 그에게 교화를 주는 어떤 이의 말을 들으면서 아주 짧은 시간동안이나마 바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전혀 없었을까요? 우리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좋은 생각만 하며 살지는 않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탐욕과 분노에 이끌려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게 누구든 오랫동안 습관화되어온, 그 지배적인 생각이 현행화되기 쉬울 뿐이죠. 말하자면 그나 우리나 바탕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조**라는 이가 정말 불쌍한 것은, 자기의 충동 외에는 어떤 존재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그 무능함인 것이죠. 그이가 그런 충동을 행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행복에 대해 아무 생각도 생기지 않기 때문일 텐데,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일상 가운데서 팔정도를 놓치게 되는 순간, 자신의 충동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이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자비심은 그런 충동을 저지를 때 다른 존재들이 겪을 고통과 행복에 대해 전혀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는 그 완벽한 무지함에 대한 것이죠. 그리고 완벽하게 그런 습관이 길들여졌다는 바로 그 점이 가슴 아픈 겁니다. 대체 얼마나 업식이 강하면 감옥에서 나와서도 다시 그 일을 반복하게 되었을까요?


자비심도 훈련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범죄라는 게 뭘까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범죄도 인연조건에 의한 것이라면 피해를 준 그 사람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도 모두 그 인연조건 속에서 겪어야 할 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겪는 일 중에 이 무량무수한 인연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 일이 어디 하나라도 있을까요? 안 겪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그 일들조차 다 인연조건 속에서 발생한 업인 것이죠. 불교는 어떤 일을 겪더라도 무량무수한 인연에서 겪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범죄를 저지른 일을 처벌하는 일은 제도의 문제입니다. 불교는 사법의 영역에까지 다 관여하지 않지만, 그런 인연조건 속에서 그런 험한 일을 자행한 이들에게 자비심을 말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자비심을 낸다는 건 무엇일까요? 샘은 그 무지와 업을 가슴 아파하는 일인 것 같다고 하셨죠. 불교는 아주 최극단까지 사유를 밀고 나갑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할 때조차 그 무지와 업을 가슴아파하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극락이라고 말하죠.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비심을 내는 일에 전혀 훈련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모든 것을 이해관계, 손익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 너무 일반화되어 있는데다가, 또 그렇게 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부르다 보니 손익을 초월하는 어떤 관계성에 대해 너무 상상력이 빈약하죠. 범죄자에 대해서 그 범죄를 어떻게 처벌하느냐는 제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제도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이 다 사라진 세상이 과연 있을까요? 오로지 자기의 충동 외에는 다른 사람을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이들은 어느 세상에나 늘 있습니다. 무지한 자, 자기의 습관으로부터 일 센티도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 업의 윤회의 쳇바퀴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자들은 늘 있습니다.


그래서 보살이 필요한 것이지요. 보살이라는 존재는 무명과 무지 속에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열반에 들기를 거부하겠다고 발원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무명과 무지 속에서 윤회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그 수만큼의 보살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샘은 말씀하셨죠. 그런 사람들보다 보살이 더 많게 되면 이 전체 공간의 마음작용이 달라질 수 있을테니까요. 우리가 함께 하는 이 공간에서도 감사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많을 때 공간의 마음작용이 좋은 쪽으로 작용한다는 걸 종종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마음이 보내는 에너지장이죠. 불교는 그렇게 제도를 초월하고 선악을 초월하는 쪽으로 접근합니다. 니체가 말한 선악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사유를 하는 것이죠. 선생님은 불교를 공부하는 우리는 선악을 넘어가서 그런 사람들마저 구제해주는 그런 보살이 되기를 꿈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끔찍한 방식이 아닐 뿐이지 모두 업의 노예인 것이니까요.


서원(誓願), 석 달 열흘 동안 드리는 백일치성


우리 스스로 우리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그런 이들을 구원해야겠다고 발원하는 것이 우리의 공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공부는 너무 깊은 공부인 것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원만하다’는 것은 세계를 나누어 놓고 격자화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말 그대로 두루두루 둥글고 충만한 공부, 우리의 공부는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해야 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세친은 유식이십론에서 유식성, 즉 마음작용이라는 전체는 파악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식성이라는 것은 개념적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경계는 붓다의 경계라고 합니다. 오로지 붓다와 세존들만이 어떤 장애도 없이, 모든 존재방식, 알아야 할 것을 다 알고 있죠. 그래서 유식성 전체로서 있는 것은 오로지 붓다의 경계로서만 알 수 있는 거라고 했습니다. 샘은 그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신의 관념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識은 지시 가능한 대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 우주의 마음의 작용, 우리가 우주신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붓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각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마음속에 영상을 만들고 대상을 출현시키죠. 그러나 우리의 공부는 붓다의 깨달음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인지메커니즘을 배우고 그 배움 속에서 변계소집을 벗어나는 인지의 습관적 메커니즘을 해체하는 수련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뢰야식의 여러 종자들 중 익숙한 방식의 사유를 생산하는 지성의 습관종자만 계속 발현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습관 종자가 아닌 다른 미세한 종자가 현행이 되어야 하는데, 이 미세한 종자가 현행되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 불교수행인 것이죠. 나쁜 생각을 계속한다는 것은 나쁜 생각만 하도록 습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지, 그 사람의 아뢰야식에 나쁜 것만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그 미세한 종자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언어는 우리 습관을 다지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샘은 같은 습관이 반복될 때는 말을 다르게 바꿔보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셨죠. 미운 이가 떠오를 때마다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말을 하는 연습 같은 것 말이죠. 언어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이런 말들은 자기 몸의 습관을 바꾸는 誓願인 것이지요. 그 서원이 적어도 백 일 동안은 필요하다고 하셨죠. 백일치성을 드린다는 말을 알고 계시죠? 어떤 願을 세우고 석 달 열흘, 백일 동안 오롯이 그것에 마음을 두는 일이죠. 그렇게 願을 세워 백일동안 노력할 때 비로소 마음의 場이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신체적 수행을 통해 習이 바뀌면 감각적 데이터가 바뀌고 마음작용이 바뀐다고 합니다. 엄홍길같은 이도 그랬다지요. 아주 높은 험준한 산을 오를 때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도 모를 바로 그 순간, 너무 힘들어서 욕이 막 나오려는 순간에 마음을 돌려 ‘고맙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몸이 움직여진다고 합니다. 샘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기 마음을 전환하면 그 마음의 전환이 신체를 움직이기도 하고, 거꾸로 신체가 변환될 때 마음의 장이 비로소 변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죠. 마음과 신체는 상호 연동이 됩니다. 마음의 장은 감각데이터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의 영상을 바꾸는 훈련을 계속하면 감각데이트를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죠. 스피노자도 신체와 정신은 일원론적인 거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신체 변용이기 때문에 신체 변용을 바꾸는 어떤 훈련을 통해서만 우리의 관념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이죠. 거꾸로 관념적 훈련을 계속하면 신체가 겪는 변용자체가 달라지겠죠. 따라서 미세하게 내 마음 속에 들어있을, 아뢰야식에는 없는 것이 없이 다 들어있다고 하니까, 아주 취약하고 미세한 것이 드러날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일이 우리 삶에 다른 습관을 만들어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니체는 습관적으로 산다는 건, 딴 게 아니라 습관적인 게 익숙해서 좋다고 느끼는 일 뿐이라고 말했다지요. 우리는 익숙한 걸 그냥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왜 좋은지 생각해보면 별 이유가 없죠. 늘상 해오던 것이니까 익숙해서 편하고 편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충동이 대치가 된다고 합니다. 실제 우리의 몸과 정신은 차이 나는 힘들에 의해 관통되면서 상호작용하고 있는데, 습관이 형성된다는 것은 그 중에 일정한 충동을 중심으로 충동의 배치가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습관대로 살면 하나의 충동에 계속 먹이를 주게 되죠. 그래서 마음만 먹는다고 습관이 바뀌진 않습니다. 이성도 충동이기 때문에,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그 충동이 너무나 강한 충동에 복종하는 상태로 있게 되죠. 그 위치가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럴 땐 습관이 된 강한 충동에 먹이를 주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충동이 먹이를 받을 수 있게 되겠죠. 우리는 언제나 이성과 충동이 싸운다고 생각하는데 이성도 충동이므로, 이성과 충동의 싸움이 아닌, 충동과 충동의 싸움인 것이죠. 하나의 서원이 습관이 되면 그 원이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아뢰야식의 종자가 바뀌게 됩니다.


어떤 것도 의지처로 삼지 말라


우리는 정상분포곡선의 평균에 들어가는 것은 정상이고, 그것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비정상이고 병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보면 정상성이야말로 병이라고 하셨죠. 정상성은 목적론적 사유이고 유비적 사유입니다. 유비적 사유란 내가 이래서 좋았으니까 쟤도 이래서 좋아하겠지, 이게 나한테 나쁜 거니까 저 사람들에게도 나쁜 거겠지라며 자기의 경험을 비슷하게 유추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라는 부정도 일종의 유비적 사유입니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것은 과거를 부정하는 유비적 사유고, ‘나중에 더 잘 할 수 있을거야’는 현재를 부정하는 유비적 사유라고 하셨죠. 한 마디로 부정은 자기와 힘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존이 우리의 역량’인데, 우리는 자꾸 그것보다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를 상상하며 자기와 분리하곤 합니다. 그것이 과거와 작동할 때는 후회인 것이고 미래에 대해서 작동할 때는 기대로 나타나죠. 지금 자기 말고 지금보다 더 나은 자기를 상상하는 것은 실존과 힘을 분리시키는 일입니다. 그런 부정은 가족이나 커플관계 같이 영토 속에 머물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 영토를 강하게 만듭니다. 『천 개의 고원』 나오는 다섯 번째 고원은 주체화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샘은 우리가 무엇을 통해 주체화를 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이라든가 자기 신체가 어떻게 그렇게 있는가를 탐구해서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기 존재감은 획득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존재감을 형성할 수 있는 어떤 점들을 만들죠. 일테면 ‘나는 돈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돈에 대해서 주체화하기도 하고, 나는 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야,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해라며 그 사람을 중심으로 자기 존재감을 만듭니다. 주체화란 이렇게 무엇에 대해서 자기를 만드는 일종의 의존적인 것이죠. 이것을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그것들이 없어질 때 자기존재가 와르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無我를 말씀하시며 이런 유언을 남기셨죠. ‘너 자신의 섬이 되어라’ 너 자신의 의지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믿을 건 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처로 삼을 수 있을까요? 이 말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어떤 것에 의지해서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버리라는 말일 것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의지처로 삼지 말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정상병은 커플이나 가족 관계처럼 자기를 만들기 위해 자기에게 필요한 어떤 정박처를 마련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어떻다고 규정하는 일입니다. 사람마다 정박점이 다르지요. 공부라는 정박점, 못되고 착하다고 생각하는 정박점 등. 니체는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허접한 사고라고 말했다지요. 범죄를 저지른 어떤 이를 보며 나는 저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선하다고 하는 것 등이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것을 행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선을 행할까라는 적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악을 행하지 않으면 된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자기를 규정하곤 하죠. 이런 방식을 취하는 이들을 우리는 정상이라고 부릅니다. 이게 병인 것이죠. 그런데 왜 우리는 그걸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보살은 그런 정상적 관점에서 본다면 비정상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영상을 가지고 자기 세계 속에서 살아가며, 다른 세계를 배척하고 부정하며 온갖 번뇌와 갈등을 만들어 늘 충돌하죠. 걸어 다니는 우주들끼리의 이 싸움이 바로 우주전쟁입니다. 마음속의 영상이 조작된 것이라는 걸 수행을 통해 깊이 인지하고 깨달은 자들은 더 이상 그런 조작으로 세계를 보지 않죠. 그건 비정상인 것이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그런 영토를 만들지 않는 자들은 누구편도 아닌 방식으로 말합니다. 샘은 우리에게 정상병에 대해 잘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불교는 우리가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은 다 병이라고 말합니다. 보살이 된다는 것은, 알아차린다는 건 그런 병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정상성의 영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선악을 넘어가는 것이며, 我와 他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지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두렵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는 아뢰야식을 원인으로 하여 살지만 아뢰야식 때문에 나쁘게 사는 게 아닙니다. 그 중에 어떤 종자가 습관적인 방식으로 현행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지 아뢰야식 때문은 아닙니다. 아뢰야식에는 업식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識도 있습니다. 그런 차원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아뢰야식의 작용도 떠나게 되겠지요. 우주심은 아뢰야식의 작용마저도 떠나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완전히 지혜로 전환된 상태인 것이죠. 우리는 먼저 깨달은 이들이 가보았던 그 길을 따라 가면 됩니다. 범부였던 이가 그런 체험을 했다면, 범부인 우리도 그렇게 따라 살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마음을 선뜻 내지도 못할 뿐더러, 마음을 내고도 저 끝까지 정말 갈 수 있을까 매순간 묻고 있지요. 그래서 샘은 서원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까말까 하지 말고 자신의 습관적 지성, 습관적 신체성과 결별하려는 서원을 매순간 하는 것이 공부라고 하셨습니다.


'습관적 신체성과 결별하는 것이 공부다!' 맞습니다. 맞고요, 그 서원의 힘으로 이 글을 겨우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전체 2

  • 2020-12-12 22:23
    멋진 왕언니표 후기로 복습완료!^^ 감사합니다~~~^~^

  • 2020-12-17 12:55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모든것을 있는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한다고 하지만, 너무나 강력하게 장착된 언어야 말로 부정하고 의심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존재하는 듯 대상을 바라보도록 규정짓는 언어를 부수지 않는다면, 대상을 실재로 바라보는 우리의 관념을 넘어서기 힘들거란 생각이 이제야 비로소 드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여전히 이 삶을 영위하고 가르침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편인것 같습니다. 왕언니 현숙샘의 유려한 언어로 배움을 더욱 명료하게 되새깁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