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12월 21일 수업 후기

작성자
경아
작성일
2020-12-25 23:46
조회
3081
<2020년12월21일 4학기 8주차 불교 수업후기>

2020년 규문 불표팀은 대승경전과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해 동서로 횡단하며 깨달음과 지복의 여정에 나섰습니다. 코로나 속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4학기 마지막 수업까지 왔다는 것이 감개무량입니다~ 공부에 대한 마음과 서로에 대한 신뢰 덕분이기에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 가득합니다. 마지막 수업도 한 공간에서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같은 텍스트를 길잡이 삼아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온 공통과제들을 읽으면서 서로에게 질문하고 답변하는 동안 원격을 뚫는 감흥이 전달되었습니다. 마지막 수업 하이라이트로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읽어온 대승경전에서 대승이 말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총정리 해주셨습니다. 기말고사 전 핵심정리 방출이요~

1. 대승이란 무엇인가?

대승은 부처님 열반 후 정통을 고수한 상좌부불교(소승)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운동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층 수행자들은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아라한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부처, 보살, 재가신도들은 위계화 되었고 깨달음은 소수의 특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을 영위하면서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재가자들이 상좌부 권위에 반기를 든 운동으로 자리 잡은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래서 대승의 핵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대중지성의 공부처로 자리 잡은 연구공동체의 분위기 변화도 이와 비슷해 보입니다. 처음에는 대학에 적을 둔 학생들로 시작되었으나, 2000년대 이후 인터넷과 SNS로 정보의 양적, 질적 접근성이 확장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삶의 조건이 삶의 방식을 바꾸기에 IMF 등을 겪으며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의 질문을 가진 회사원, 주부, 백수청년들로 구성이 다양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대중지성의 변화는 대승불교 운동과 비슷한 면이 있어 보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층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 대승의 중심 사상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두가 부처라는 것, 둘째 깨달은 보살은 자유롭게 윤회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깨달음에서 중생 구제로 구도가 전환됩니다. 그러니 깨닫지 못한 중생이 하나라도 있는 한 중생을 구제해야하는 보살에게  윤회는 자유롭고 적극적인 선택이 됩니다.그럼 보살은 중생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까요? 불경佛經을 불경不敬스럽게 해체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고착하지 않는 해체적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은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다르게 담론화한 것입니다. 어떤 텍스트를 쓰여진 그 시절의 그 맥락으로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 텍스트를 통해 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이며, 그것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해방하는가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부처님의 말씀이 단지 듣기 좋은 것으로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 중생의 삶을 해방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운동 초기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들, 특히 나환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 삶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업 때문이라고 인과를 고착시키는 게 아니라 지금 행이 자유를 가져올 수 있다는 데서 해방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자가 해방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함에 따라 해방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지성으로 해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대승운동의 혁명적 지점입니다.

부처님은 끝까지 의심해보고 믿으라 하셨지만, 한편 의심을 갖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깨달을 수 있을까? 열반이 있을까? 게으르고 싶을 때, 병든 걸 까먹었을 때 올라오는 무용한 질문들입니다. 열반의 가능 여부는 나의 자유와 해방에 일도 도움 되지 않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푸코는 지식인이 누군가를 대변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범죄자, 낙인 찍힌자들처럼 말할 기회가 완전히 차단된 자들을 위해서 스피커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는 일가족을 죽인 살인자의 법적 진실에 기반하여 쓴 책인데, 살인자라고 그 삶 자체가 부정당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살인자에게도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어야하며 사회가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범죄 자체의 행을 비난 할 수는 있지만 삶 자체를 부정 할 수는 없습니다. 내 문제를 스스로 제기하고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 공부라면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대승입니다. 내 문제는 나의 문제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 시대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다른 이들의 문제를 감싸 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대중지성과 대승불교가 맞닿아 있습니다.

2. 수행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 법

달라이라마 존자님이 속하신 겔룩파의 창시자 쫑카파 대사님이 지으셨다는 <수행의 핵심이 되는 세 가지 법>입니다. "해탈을 구하는 이들이 불법의 핵심이자 보살들께서 찬탄하신 수행의 길로  제대로 접어들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나의 목소리가 출발되는 지점입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것이 자신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나누고자 하는 마음, 자비에서 시작합니다. 그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첫 번째는 세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실한 출리심出離心입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삶에 대한 욕망, 불행 없이 기대하는 방식으로만 살고자하는 마음 자체가 번뇌입니다. 그런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고 윤회의 원인입니다. 이생을 연연하는 마음, 내생을 연연하는 마음은 모두 기대하는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나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 출리심을 내지만, 결국 나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 모든 중생들의 해탈이 전제되어야 합니다.(각자 에세이에서 녹여 내야하는 지점이라고 방점을 찍으시네요.) 보살 정신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남을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깨달음의 완성이 보살 정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의 해탈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를 벗어나기 위한 출리심은 수행의 두 번째 요소인 보리심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어머니들의 딱한 처지를 생각하여 최고의 마음”을 내는 것이 보리심입니다. 티벳불교에서 어머니는 나를 있게 하는 모든 존재입니다. 그러나 출리심과 보리심을 내더라도 연기법과 공성을 지혜로서 깨닫지 못하면 윤회의 뿌리를 끊을 수 없다고 못 박습니다. 자신의 고를 해결하려는 절실한 출리심과, 깨달음은 다른 이들과 같이 해야만 가능하다는 보리심, 그리고 이런 발심과 실천으로 존재의 실상을 이해하는 공성의 지혜를 통해 궁극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

28세 청년 스피노자도 일시적인 기쁨이 아닌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한 철학의 길, 수행의 길에 들어서기로 어떻게 결심하였는지를 이야기합니다. “통상의 삶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모든 것이 헛되고 부질없음을 경험이 나에게 가르쳐준 이후”라고 시작하며 자신의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없다는 아주 중요한 말을 너무나 가볍게 첫 문장에 담아냅니다.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라며 자신의 출리심이 어떻게 분석적인 사유로부터 생겨났는지 밝힙니다. 이 결심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와 명예, 정욕과 같은 통상적인 삶의 짜임이 어쩌면 확실한 행복일 수도 있는데... 주저하기도 했답니다. “일단 발견하고 획득하고 나면 연속적이면서도 최고인 기쁨”이라는 (도달이)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통상적인 짜임과 새로운 짜임이 양립할 수 있는지 시도해보았으나 헛수고라는 알게 되었기에 “마침내” 결심합니다. 돈이나 명예와 철학의 길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부득불 무엇이 나에게 더 유용할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고. 본성상 확실하지만 도달이 불확실한 선과 본성상 불확실한 선(부, 명예, 정욕) 중 어떤 것이 나에게 더 유용한지? 부, 명예, 정욕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을 스피노자스럽게 조목조목 따져봅니다. 그냥 나빠 보이니까 억누르고 금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따져보니 그것이 자신에게 자유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본성상 확실한 진리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이해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상태, 지성과 욕망이 합치에 이릅니다. 본성상 불확실한 선을 따르면 치명적인 병으로 고통 받는 병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설령 (도달이) 불확실할지라도 부득불 온 힘을 다해 치유책을 찾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지성의 병을 치유하는 지성교정론을 쓰게 됩니다. 자신만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좋은 것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행복에 포함되기 때문이라는 보살스러운 말을 합니다. 이 행복은 분리불가능한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나눔일 것입니다.

깨달을 수 있을까? 같은 의심이 드는 것은 병을 망각하고 쬐금 살만할 때 올라옵니다. 당장 아파죽겠으면 뭐라도 일단 해보지 이게 될까라고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병들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불교의 출리심, 사성제의 고제입니다. 거기서 수행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일희일비하는 삶이 병입니다. 행, 불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애착이 마음의 동요를 만들어냅니다. 스피노자는 이 병은 “소멸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데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원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사랑은 마음을 오직 기쁨으로 살찌우며, 일체의 슬픔에서 면제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유들 쪽으로 향하는 동안 정신은 저것들에서 멀어지고 삶의 새로운 짜임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게 되었다고 경험에서 우러난 말을 합니다. 그나마 공부하는 동안에는 유투브나 홈쇼핑같은 뻘짓을 덜하게 되는 건 맞긴 합니다. 이 막간들은 처음에는 드물었으며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지속되었지만, 참된 선들이 스스로에게 점점 더 많이 알려지고 난 이후 저 막간들은 점점 늘어납니다. 이것은 짬짬이 쌓인 현행으로 아뢰야식의 종자가 달라지는 것, 습이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출리심, 보리심, 지혜의 수행의 세 가지 핵심과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현재의 짜임이 왜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닌지 알아야 우리가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리듬과 인식의 변화는 뭐가 먼저랄 것이 없이 같이 갑니다. 보통 공부해서 이해하면 실천하겠다고 자신의 게으름을 이해 다음의 실천 순서로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잡다한 일상이 정리되지 않는데 어떻게 마침내 결심할 수 있겠습니까. 스피노자가 유대인공동체의 저주를 받아들인 것은 그런 의미에서 출가와 다른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삶에서 리듬을 간소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결심들이 다른 것을 향하는 이해의 막간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통상적인 삶과 지복, 최고의 선은 양립 불가입니다.(아쉽지만 저는 아직은 아쉽습니다. 이것을 저에게 물어야겠죠.) 지속 가능한 공부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가 내 욕망이어야 합니다. 당위라고 생각하면 공부가 힘을 못 받습니다. 과연 내 욕망이 공부에 있는가, 아님 통상의 삶에서 추구하는 것들이 나를 어떤 행복으로 이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통상적으로 추구하는 행복과 그 수단은 무엇인가, 그것이 정말 나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주는 것인가를 분석적 파헤쳐봐야 합니다. 스피노자는 억누르는 게 아니라 뭐가 더 좋은지 물어서  지성과 욕망이 합일했기에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결론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자기 해방을 향한 염원이 있다는 것이 바로 일불승, 중생이 부처라는 말일 수 있습니다. 자기 해방을 원하는 공부에 대한 욕망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통상의 삶을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무고개 넘듯 스스로 물어물어 에세이에 달고나 녹이듯이 녹여오랍니다~ 에세이 때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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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2-26 01:18
    마지막 수업까지 왔다는 게 감개무량하다는 경아샘의 말씀에 감개무량해 지네요. ㅎ 그리고 줌으로 한 공통과제 토론이었는데도 매주 함께 토론해온 공력이 쌓여서인지 원격을 뚫는 감흥이 있었던 다는데 공감 한표~! ^^ 마지막 수업이 원격 강의였으나 경아샘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후기 덕분에 스승님의 말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