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2월 22일 1회 수업 후기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1-02-27 08:28
조회
2911
2021년 불교와 글쓰기가 드뎌 개강을 했습니다. 설날도 입춘도 구정도 지났건만 여전히 2021이라는 새로운 해를 낯설게만 대하다가 아, 저는 이제사 맘을 먹었습니다. 불교가 개강을 했으니 이제 새공부와 함께 새해를 받아들이리! ㅎㅎ 이런 게으른 학인이 또 있을랑가요. 암튼 새해 불교팀은 부처님의 초기 경전 중에서도 붓다 가르침의 원형을 담았다고 여겨지는 <숫타-니파타, sutta-nipata>부터 읽고 낭송하며 공부를 해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경전과 함께 <천개의 고원>을 가로지르며 불교와 서양 철학을 크로스하는 나름 야심찬 그러나 어찌 건너게 될지는 두고봐야 할 (^^;;)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플러스! 저희 각자가 자기주도학습 + 도반들과의 토론을 통해 긴 호흡으로 올해 두 편의 글을 완성해 보기로 했다는 것 아닙니까.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을 이 과제를 해내기 위해서는 함께 공부하는 샘들과의 호흡을 성실히 따라야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1.

첫 시간에는 채운샘께서 붓다의 탄생과 붓다가 태어났던 시대에 관한 개괄적인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붓다가 활동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5-6세기 정도인데 이 시기가 서양에선 소크라테스 그리고 동양에선 공자가 활약을 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걸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상가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죠. 그런데 소크라테스, 공자, 붓다가 처음부터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인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그들에겐 기존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철학적 사유들을 종합하고 그것을 자기화해서 넘어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기존 철학의 지식들을 자신이 살던 그리스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윤리적 질문으로 바꾸었고, 공자는 기존의 텍스트들을 집대성하여 철학적 개념의 지평과 사유를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전통적인 옛날의 사상을 (溫故) 지금 살아가는 현실에 맞도록 어떻게 새롭게 (知新) 할 것인가? 공자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합니다.

붓다도 그런 점에서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 등장하는 업과 윤회의 개념이 실은 붓다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개념이었다고 하죠. 그러나 붓다는 카스트 제도에 입각한 기존의 업과 윤회라는 개념을 완전히 해방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샘께선 <숫타-니파타>를 읽어가면서 붓다의 생애를 읽어보고 붓다의 사상이 어떤 배경과 맥락 속에서 등장했는가를 짚어보라고 하셨어요. 그럼으로써 ‘붓다는 어떤 어떤 생각들이 만연해 있던 시대에 그 시대의 개념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어떻게 당대 사람들이 당연시 여기던 믿음을 넘어갈 수 있었던 걸까?’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죠.

인도의 사상과 종교는 <베다>로부터 발전했습니다. 그 기원은 기원전 1300년경이라고 하고요. 고대 인도인들은 자연 현상의 위협이나 혜택을 받을 때 그런 자연현상을 마치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신으로 경외하면서 자신들 안에도 무슨 영묘한 존재가 숨어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을 존숭하는 태도에서 더 나아가 이 신비로운 힘을 우주의 최고 원리인 브라흐만(Brahman)이라 부르고 또 사람들 각자 속의 영묘한 힘에 대해서는 아트만(Atman)이라고 이름지었죠. 이로부터 브라흐만은 아트만의 근거이고 아트만은 브라흐만의 현현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등장합니다. (이기영, 「석가」 35쪽 참조) 이 범아일여 사상이 <우파니샤드>의 핵심이고요. 그리하여 고대로부터 인도의 종교적 수행은 우주와 나의 합일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 수행의 방식으로 요가 선정과 고행이 주를 이루었다고 하고요. (여기서 요가는 요즘의 다이어트 요가가 아닙니다. ^^;; 본래 요가의 의미는 정신적 수행과 훈련을 말합니다)

붓다가 태어났을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붓다가 출가해서 스승들로부터 선정을 배우고 여기에서 궁극적 답을 찾지 못하자 고행의 길로 들어섰던 것도 당시의 구도자들에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철학적 사상이 쏟아지던 붓다의 시대에 6가지 주류 사상을 이끌던 육사외도(六師外道) 가운데에서도 무려 4명이 고행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이런 수행이 매우 성행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도시 근교의 숲에서 진리를 찾기위해 고행을 하는 구도자들이 몇 백 명씩 되었다니 그런 시대의 어떤 영적인 사회 분위기란 21세기를 사는 저희로썬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붓다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요가와 고행을 철저하게 밀어붙이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스스로의 구도의 길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치열한 구도 끝에 하나의 근원을 말하는 아트만(atman)이 아닌 아트만의 부정, 즉 무아(無我)의 사유에 이르죠. 브라흐만의 현현인 아트만, 모든 것의 원인을 하나로 보는 기존의 철학적 사유는 배타성과 한계를 내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을 중심으로 한 사유, 초월적인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와 이슬람도 이와 같은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가 사유한 무아는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죠. 불교에는 외연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과도 연결 접속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올해 더 공부해가며 탐색해봐야 할 것 같죠. 일단 천개의 고원과의 접속을 통해서 말입니다. ^^

2.

그 유명한 빨간색 두툼한 책, 1000 페이지 짜리 텍스트 <천개의 고원>을 드디어 처음부터 끝까지 촘촘하게 읽어갈 귀한 찬스가 주어졌습니다! 그것도 불교 공부에서 말이죠. 어렵다고 소문이 자자한 책이지만 음, 그야 저희가 어떻게 <천개의 고원>이라는 책-기계와 접속하고 이걸 작동시키느냐에 달려있겠죠! ^^ 샘께선 이 책이 ‘다르게 사유하기’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겨우 고원 한 개를 산책했을 뿐인데 들뢰즈 가타리는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개념들을 여기저기 마구 등장시킵니다. 기존의 표현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등장시키며 벌써 다르게 사유하기를 촉구하는 것 같습니다. 리좀, 지층, 영토, 배치물, 다양체, 고른판 등등... 이렇다 할 친절한 설명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샘의 자상한 강의를 듣고 나니 서론의 리좀이 넘나 재미있게 다시 읽히네요. ㅎㅎ

자, 우선 리좀이 뭐냐면 이게 줄기와 뿌리가 하나인 식물이라고 합니다. 보통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하면 뿌리와 줄기 그리고 가지로 구분된 모습을 떠올리는데, 리좀은 줄기와 뿌리가 구분되지 않은 이미지죠. 수목인 나무가 통로인 줄기를 통해 뿌리의 모습을 거울 상처럼 반영한 가지로 구성된다면 리좀은 토대로써의 뿌리와 통로인 줄기 그리고 그 결과물인 잎과 가지가 구분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리좀이라는 개념으로 보여주려는 것은 어떤 출발점으로부터 시작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사유가 아닌 오직 과정과 접속만이 있는, 계속 다른 것들과 연결 접속해서 뻗어나가는 방식을 보여주려는 것이죠. 샘께선 리좀적 사유란 불교로 말하면 머물지 않는 무주(無住)의 사유라고 하셨습니다. 금강경엔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머물지 않는다는 건 분별하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판단을 멈추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마음을 어딘가에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점에 고정되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변화 자체를 자각하며 그 흐름과 함께 움직일 수 있다면 이것이 끊임없이 연결 접속하는 리좀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순간 ‘과(and, et)'라는 접속만이 있는 세계.

들뢰즈 가타리는 글을 쓸 때도 들뢰즈 et 가타리 두 사람이 썼다고 했지만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여러 사람이 있었다는 말로 서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멋진 말을 하죠.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말하지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 (서론, 리좀 11쪽) 라고요. 붓다는 모든 것은 변화로써만 존재할 뿐 고정 불변하는 ‘나‘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논리적으로 사유하도록 가르쳤죠. 그런데 들뢰즈 가타리가 주목했던 분열증이란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들은 아예 중심적인 나를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로 시작하는 문장을 말하지 못하고 끝내 어디에서도 ’나‘를 찾을 수 없는 자들인거죠! 이건 정말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원시 부족들을 연구해 보면 그들에겐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희박했다고 하고 ’나‘라는 주어의 개념이 강하지 않은 문화권도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들은 ‘나’라는 것이 실은 애초부터 희박한 것이 아닐까? 라는 질문을 제기하죠. 이 세상을 자기를 중심으로 놓고 생각을 구성하는 메커니즘이 인류의 역사에서 꼭 일반적인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하여 들뢰즈 가타리는 ‘나’로 길들이는 사회와 영토로부터 ‘달아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그런데 그냥 무작정 달아나기만 하면 되느냐면 그게 아니죠. 달아날 곳이 어디인지를 신중하게 살피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놓여있는 사회적 배치, 정치, 교육, 경제, 예술, 사랑, 언어... 등등 온갖 것들의 영역을 둘러싸고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중심화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사유하는 만큼 우리는 달아날 수 있다고 합니다. 단단하게 굳은 지층 위에 형성된, 지금 우리가 발딛고 있는 영토가 무엇인지, 어떤 배치 속에 들어있는지 날카롭게 간파해야 하는 거죠. ‘도주선으로 달아나라, 그러나 신중하라!’고 들뢰즈 가타리는 말합니다. 지금 저희에겐 불교가 도주선이겠죠. 그러나 분별로부터 달아나라고 해서 모든 판단을 중지한 채 정신줄을 놓고 있으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의 분별을 놓기 위해서도 아주 치밀하게 지혜를 공부하고 자비를 수행하라고 붓다는 강조했습니다.

이제 저희는 붓다의 지혜를 <천개의 고원>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흥미롭게 접속, 변이, 변주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2500년 전 붓다가 기존의 철학적 사유와 언어를 탈영토화 시켰듯이 저희는 다시 2500년이 지나 케케묵은 불교의 틀에 갇혀버린 부처님의 언어를 어떻게 새롭게 만들 수 있을까요. 올해는 <천개의 고원>이라는 다양체에 접속하는 실험을 통해, 이 안에 무한히 숨어있는 주름들을 우리 각자가 어떤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내 볼 수 있을지~~ 빰빠라밤! 기대됩니다. ^^
전체 2

  • 2021-02-27 21:24
    와우. 일목요연한 정리를 읽다보니 지난 수업 시간이 저절로 복기되네요. 윤지샘 고마워요.
    이번 불교반은 구성 자체가 온고 지신이네요. 계속 공부해온 학인들이 대부분인 가운데 새로운 바람이 불었으니.
    저도 샘들에게 기대서. ㅎㅎ

  • 2021-02-28 11:32
    불교팀은 온고지신?ㅎㅎㅎ
    윤지보살님 불티모아 개강으로 분주했을텐데도 첫 후기 써주셔서 감사하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