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12월 21일 9회 수업공지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0-12-15 23:59
조회
3191
불교팀은 8주차가 수업 대신 에세이를 구상하는 기간(!)이었는데 올해 마지막 에세이를 어떻게 써볼지 잘 숙고해보셨나요? ㅎㅎ 꼭 시간이 많다고 준비가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반가운 첫 눈도 내렸고 연말이네요. 매 번 이렇게 변화하고 흘러가니 모든 것이 무상한 것이 정말 맞습니다! 그런데 한 해를 돌이켜보면 어떤 일들은 생생하게 떠오르고 어떤 일들은 아무 기억없이 지나가는 일들이 있습니다. 코로나로 경황없는 가운데 올해 겪은 어떤 사건은 생생하지만 그 나머지 시간들은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 수업 시간에 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의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데 만약 과거의 그 모든 것들이 정말 있.었.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건도 그 사건 속의 나도 정말 그렇게 있었던 것일까?!  이건 불교를 배우고 유식을 공부하는 저희가 정말 진지하게 자신에게 던져 볼 질문같습니다. 어떤 것도 객관적 실재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이미지일 뿐이란 걸 저희는 불교에서 계속 반복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와 이해 그리고 체험이 늘 따로 따로여서 말이죠...연말이면 늘 한해를 돌아보고 다시 새해를 맞이하는 데, 이 과거 현재 미래의 영속성이라는 것에 의심을 품어 봐야 겠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만이 있을 뿐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는데, 부처님은 무상하다고만 말씀하신게 아니라 일체가 무상하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고 말씀하셨던 듯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 말씀의 방점이 '정진'에 있었던 게 아닐까요? ^^  한 해가 가고 또 새로운 해가 오고, 4학기를 시작했는가 했는데, 어느덧 마무리할 시점이 다가오고.... 모든 것이 무상하니 우리는 오직 매 순간 정진해야 할 뿐인가 봅니다.

그나저나 저희 지난 불교 수업은 왕언니이신 현숙샘께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복기를 해주셨기 때문에 다들 짱짱한 복습을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쵸? ^^ 하여 저는 꼬옥 기억하고시픈, 아니 기억하여 아뢰야식의 무지한 종자들을 지혜로 바꾸어버릴 스(피노자)님의 말씀 몇 마디를 간단히 정리해 보는 것으로 하겠슴다.

* * *

스피노자가 정서에 대해 정의 내린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정의가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정서 그 자체의 맨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요. 마치 기하학을 정의하듯이 아주 객관적으로 표현합니다. 가령 이런 식이죠

3부-45. 식탐 (Luxuria)은 먹는 것에 대한 과도한 욕망 또는 사랑이다.
3부-48. 성욕 (Libido)은 육체들을 결합하려는 과도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이렇게 건조하게 정리된 문장으로 정서를 바라보면 정서에 덕지 덕지 붙은 온갖 의미화와 이미지가 떨어져 나가면서 거리를 두고 생각하게 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서 중에서도 암비치오 (Ambitio), 즉 잘 보이고자 하는 욕망을 스피노자는 자부심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라고 정의 하면서 암비치오는 모든 정서를 더 촉진하고 강화하기 때문에 이것이야 말로 쉽게 극복되기 어렵다고 말하죠. 불교의 아만과 아애가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암비치오를 가진 자들이 절제하지 않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탐욕을 부린다는 것은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고 집착의 성향은 쉽게 바뀌기 어렵습니다. 작다고 집착이 아닌 게 아니라 미세하든 거칠든 집착은 근본적으로 다 집착인 것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가 이렇게 깨알같이 정리한 일련의 정서들이 인간에게 중요한 이유는 어떤 정서/감정이 그냥 그 자체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신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건 너무나 명백합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어떤 정서를 경험하면 우리는 심장이 뛰기도 하고 스트레스로 소화 장애가 일어나기도 하고 몸에 긴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즉 미세한 차원이든 거친 차원이든 정서는 신체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나 신체가 출발점이 됩니다. 이성이 아무리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해도 내 신체를 관통하는 힘이 부정적이면 나의 본성은 여기에 합치될 수 없습니다. 이 본성이 코나투스라고 했죠. 코나투스가 합치되지 않는 곳에 우리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스피노자는 신체가 슬프고 무기력하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그걸 무시하고 ‘이건 당위니까 반드시 해야만 해!’ 라고 이렇게 이성을 따라서 살게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뭔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그 당위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 같은데 인간은 결코 그렇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성이 그런식으로 작동하기 위해선 기쁨의 정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어떤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그와 상반되는 행위를 하고야 맙니다. 좋다고 주장하는 이성이 나의 충동, 정서와 결합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니 충동이 따르지 않는 이성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게 됩니다. 머리로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내 몸의 세포를 관통하는 느낌들이 일제히 그것을 원해야만 몸이 움직여지는 거란 말이죠.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명하지 말고 쿨하게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난 그것을 안할 수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한 게 아니라, 내가 욕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나의 모든 행위는 나 스스로 충동하고 욕망한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럼 가령 공부를 해야 하는데 유투브를 보고싶다는 충동이 올라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위의 형태를 띈 충동과 또 다른 강력한 충동이 충돌할 땐 당연히 강한 충동이 이깁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이건 충돌이 아닙니다. 유투브를 보고 싶다는 더 센 충동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욕망은 당위의 형태를 띄고 나타난 것이죠. 이때의 해결책은 ‘해야하는 공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가 될 때까지 훈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흠... 어떻게 하면 하고 싶어지는 걸까요. 그것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익숙한 것에서 즐거움이 생겨나는 원리를 이용해야 하는 거겠죠. 인간은 좋아서 익숙하게 느끼는 게 아니라 익숙하기 때문에 좋다고 느낀다니 말입니다. 그러니 훈련하고 실험하고 정진하고... 그럼으로써 ‘아, 하고 싶다!’를 만들어야 하는 거랍니다. 유투브 시청이 아니라 공부를 말입니다. ㅎㅎ

마지막으로 포테스타스(Postestas)와 포텐샤(Potentia)에 대해서 배웠던 부분입니다.  포테스타스는 현실적으로 결과하는 힘, 지금 작동하는 능력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우리의 신체가 36.5도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을 때 그런 실존으로 나타난 힘이 포테스타스입니다. 그런데 36.5의 힘인 포테스타스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게 아니라 열이나서 몸의 온도가 오를 수 있게 하는 잠재적이 힘, 포텐샤와 함께 공존합니다. 내 몸이 38도로 열이 올랐다면 그것은 잠재되어 있던 어떤 힘이 작동한 것이고 이 잠재성을 포텐샤라고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현존하는 것 같지만 실은 매 순간 늙어가고 있고 변화하고 있듯이 현존하지 않는 어떤 힘이 현존 중인 것을 계속 변화시키며 같이 작동합니다. 이것을 현행성과 잠재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조건 속에서 지금 이렇게 된 상태가 현행하는 포테스타스라면 또한 동시에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는 힘 (포텐샤) 또한 내재해 있다는 겁니다.

이건 불교의 수행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드러난 포테스타스, 능력만을 문제삼는데 불교에서는 언제나 포텐샤, 드러나지 않은 힘을 어떻게 끄집에 낼 것인가를 문제 삼는다는 것이죠. 지혜 수련이든 선정 수련이든 수행을 하고 실험을 함으로써 다른 역량을 현행시킬 수 있게 되니까요. 그러나 이 역량을 발휘하는 데는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분석하고 진단하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그냥 열심히 역량을 발휘하자! 가 아니라 드러난 포테스타스와 드러나지 않은 포텐샤를 함께 사유하고 힘을 이끌어 내야합니다.

<불교와 글쓰기> 12214학기 마지막 수업공지입니다.
  1.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알까」: 끝까지 읽고 공통과제 써옵니다.

  2. 「윤리학」: 4부 150쪽 정리 1부터 읽어오셔요.

  3. 명상: 마지막 시간에 자비 명상을 존재 전체로 (푸른 지구가 아니라 ^^) 확장시키는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자비의 마음을 매일 잠깐씩이라도 일으키는 훈련을 가능하면 놓치지 마시길~


다음 주 간식은 현화샘, 반찬은 호정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파와 코로나에 건강 조심하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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