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수업 정리 및 에세이 공지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0-12-26 01:04
조회
3250
코로나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없는 가운데 불교팀은 지난 시간 수업을 줌으로 했고 마지막 에세이 발표 일도 미루기로 했습니다. 지금쯤 다들 집에서 조용히 연말을 보내고 계시겠네요. 저와 미숙 부반장님은 연구실에서 줌 수업을 했는데, 규문의 전문 테크니션(!)들 그리고 간식도 준비하고 국 끓이는 것도 도와주고 공통과제 프린트도 준비해준 울 미숙 부반장님 덕분에 무사히 수업을 마쳤습니다. 샘께선 저희 두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온라인 수업을 하시는 게 좀 부담스러우셨을 텐데 뭐, 그래도 줌 화면 너머에 아무도 없는 허공이 있는 것 보단 괜찮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ㅎㅎ



에세이를 남겨둔 마지막 수업이라 샘께선 올해 저희가 읽어온 여러 경전들이 표방한 ‘대승’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짚어주셨습니다. 초기 불교의 핵심이 ‘아라한 되기’ 였다면 대승 불교의 핵심은 ‘중생 구제’입니다. 깨달아 아라한이 되고 열반에 이른다는 것은 이 거친 윤회의 세계를 떠난다는 것이죠. 그러나 대승의 보디사트바들은 열반으로 떠나버리지 않고 다시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윤회를 선택함으로써 이 세계로 돌아옵니다. 왜?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있으니 이 중생들을 깨달음의 수레에 함께 태우기 위함이죠.

초기 불교의 아라한들과 제자들은 부처님 곁에 있었던 자들이고 부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듣고 직접 가르침을 배웠죠. 그러나 부처님의 열반 후 그 가르침은 제자들에게서 제자들을 거쳐 전승이 되어갔고 가르침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앎을 특권화하는 기득권 층이 생겼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이후 이런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대중적으로 확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하죠. 불법에 대한 배움을 특권화 하는 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내 삶으로 가져와 어떻게 하면 삶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자들이 생겨났던 겁니다.

저는 대승불교의 중요한 집단 중 하나가 나환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새로 알게되었는데요, 나환자들이 대승운동의 한 축을 형성할 만큼 불법에 감화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정말 그랬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환자들은 세상의 멸시를 견디며 자신의 삶을 저주받았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런데 붓다의 가르침은 과거의 업으로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게 너의 업이므로 받아들이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비록 당장은 나환자라고 하더라도 지금 어떤 행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해탈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그런 가르침이었죠. 이것은 나환자들에게 엄청난 해방감을 안겨준 복음이었을 겁니다.

깨달은 자 곁에 있다고 그것이 우리를 해방시켜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은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고통을 벗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인 것이죠. 사실 겉은 멀쩡하더라도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한 우리 역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환자의 상태로 살아가지 않을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이 번뇌 속에서 지성을 통해 해방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겠다는 열망이 있다면 대승불교의 복음을 전파한 나환자들이나 대중지성의 공부를 통과하는 자들이나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거겠죠. 내 삶에서, 내 삶의 조건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접속하고 그것을 지성으로 뚫고 나가보기.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의심이 고개를 듭니다. ‘과연 이렇게 한다고 될까? ’ ‘과연 열반이 있을까?’ 이런 의심말이죠. 그러나 샘께선 이런 질문이야말로 무용한 질문이라고 하셨어요. 열반이 있으면 수행을 하고 없으면 안한다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 가르침이 내게 어떤 자유로움을 주는가이죠. 의심은 게으르고 나태해질 때 올라오죠. 스스로 한계를 지으며 합리화 시키려는 마음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각자의 문제를 길어내 각자의 지성을 힘껏 발휘해보라....! 이것이 이번 에세이에 대한 스승님의 당부셨습니다.

그리고 샘께선 이에 덧붙여 쫑카파 대사의 <수행의 핵심이 되는 세가지 법>과 스피노자의 <지성 교정론>의 일부를 읽어 주셨습니다. 출리심과 보리심 그리고 지혜, 이 세가지 핵심을 저희 마음에 어떻게 지녀야 하는지 말이죠. 이 내용이 20대 스피노자의 사유에서도 싱크로 되는 것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부, 명예, 정욕의 욕망이 지배하는 통상의 짜여진 삶이란 우리를 최고선으로 이끌지 못하므로 그 삶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은 불교의 출리심과 연결되고 그러한 최고선을 획득하여 그것을 많은 이들이 나와 더불어 획득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건 대승의 보리심이죠. 그리고 그러한 최고선을 획득하는 것은 다름아닌 지혜고요.

스피노자가 이런 놀라운 통찰에 이른 것은 그가 차근 차근 질문을 파고 들었기 때문이겠죠! 무엇이 자신에게 유용하고 무엇이 그렇지 못한지, 스피노자는 하나 하나 따져가며 숙고하고 자신에게 묻습니다. 그럼으로써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아, 정말 멋집니다. 저희도 이번 에세이를 준비하며 각자 품고있는 하나의 질문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뚫고 가보면 좋겠습니다. 어디에 가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승경전에서 만난 수 많은 보살님들과 스(피노자)님의 손을 양쪽에 잡고서 한 번 가봐야 겠죠?

<불교와 글쓰기> 에세이 공지입니다.

1월 4일 월요일 오전 10시에 발표 시작합니다. 간식은 각자 조금씩.

대승경전 공부를 마무리하는 대단원의 에세이와 함께 2021년 새해에 뵙겠습니다. 올해 잘 마무리 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뵈어요! ^_^/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