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4학기 2회수업 공지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0-10-29 21:08
조회
3476
<유마경>과 함께 4학기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샘께선 이제 4학기 텍스트인 <유마경>과 <섭대승론>을 마치면 저희가 대승불교의 주요한 경전들을 거의 다 읽은 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희는 ‘그럴리가요...?!!’ 라는 표정으로 응수를 했죠. 책꽃이에 두꺼운 경전들이 줄줄이 꽃혀있는 걸로 봐서는 그러니까 저들을 언젠가 읽었던 것 같긴 한데... 오, 부처님 저 같은 무지렁이 제자들을 어찌하면 좋으리까! 그러나 아무튼 지나간 것들은 이미 무상하게 지나간 것이고요 (무상을 이런 말도 안되는 데 써먹는다고 뭐라 하시는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ㅋㅋ)

1.

이제 저희는 마지막 학기를 함께 할 <유마경>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참 전에 읽어서 내용이 가물가물한 다른 경전들과 달리 <유마경>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이 생생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왜냐하면 다른 경전에서는 본 적이 없는 유마힐이라는 독특한 주인공이 등장하고 전체 스토리도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 다이내믹하기 때문이죠.

주인공 유마힐은 부처님의 제자도, 교단의 승려도 아닌 세속에 사는 재가자입니다. 자기 사업을 하고 부인과 자녀들도 있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온갖 데를 다니는 일반인이죠. 그러나 이분의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논리적이고 막힘없는 설법으로 대승의 공(空)사상을 현란하게 풀어내면서 부처님의 10대 제자들을 모두 KO패 시켜버려요. 지혜 제일의 사리불, 신통 제일의 목건련, 두타 제일 마하가섭, 해공(解空) 제일 수보리 등등... 평범한 거사가 부처님의 top 10을 제패하다니 스토리의 설정 자체가 벌써 무척이나 대승적입니다. 당시 불교 교단의 권위를 부처님의 법으로 정면 비판한 것이라고 하죠. 뿐만아니라 유마힐처럼 중생의 삶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완벽한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유마 거사가 매우 부자(!)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도 어렵다며 부자를 폄하하지만, 불교에서는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상관없이 모든 인간 존재를 평등하게 바라봅니다. 번뇌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르 바란다는 점에서는 부자든 가난하든 우리는 모두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유마가 병에 걸립니다. 이유인 즉, 중생이 아프기 때문이죠.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는 유명한 드라마 대사가 있었는데, 이게 바로 유마 거사가 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중생이 겪는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물론 같은 표현이긴 하지만 의미는 다르죠. 드라마 주인공이 상대에 대한 개인적 사랑의 차원에서 아픔을 느낀 거였다면, 유마의 아픔은 연기적 조건 속에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느낀 아픔이라고 할 수 있겠죠. 나와 사랑하는 상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나의 병으로부터 모든 중생의 병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중생이 겪는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공감할 수 있다는 건, 나의 삶이 결코 한 개체의 삶으로 환원되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연민은 세속에서 말하는 동정, 연민과는 구분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니체는 어려움을 겪는 타인을 바라보면서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라는 두려움과 그래도 지금 나는 저 사람 보다는 낫다는 우월감의 결합이 연민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런 동정과 연민은 오롯이 ‘나’라는 상을 바탕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설령 도움을 준다고 해도 보시의 공덕은 단 1도 없습니다. 반면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연민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고통을 겪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은 나와 타인이 다르지 않다는 이해에 기반하죠.

유마가 아픔 몸을 방편으로 삼아 등장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죠. 인간이 가장 집착하기 쉬운 대상이 다름아닌 자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유마는 유명한 10가지 비유를 들어가며 육신의 공성을 설명합니다. 이 몸은 거품이며, 포말이며, 아지랑이 같고, 허깨비이며, 그림자이자, 메아리, 뜬구름 등등과 같다고요....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몸을 단지 사대(四大)로 구성된 무상한 육신으로 생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번 공통과제로도 여러 샘들이 몸에 대한 글을 써오셨는데, 과연 우리가 몸에 집착한다는 게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

스피노자 시간에는 암비치오 (Ambitio)라는 새로운 표현을 만났습니다. 암비치오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위해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노력 (정리 29 주석)이라고 합니다. 스피노자는 감정은 다른 신체와의 변용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것으로 환원되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했죠. 어떤 사람들과 어떤 마음의 장 속에 있느냐에 따라 특정한 마음 그리고 행위가 촉발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행위를 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다시 그 행위를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깁니다. 내가 속해 있는 편의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상대편을 제압하고자 하는 영웅심, 공명심 등이 모두 암비치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정 욕망도 마찬가지고요.

뿐만아니라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좋아하길 바라고 반대로 자기가 미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같이 미워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도록 노력한다면 그런 노력 또한 암비치오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인간 각자의 기질이 서로 다 다르면서 각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은 각자가 서로에게 장애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칭찬받거나 사랑받으려고 하지만 기질이 다르니 결국 서로 미워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정리 31 주석) 아이러니 하지만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이라는 것이죠.

정리 30의 주석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도 신선했습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랑이란 외부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기쁨이긴 기쁨인데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라는 외부 원인으로서만 기쁠 수 있는, 매우 수동적인 감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의존적일 수밖에 없고 그 대상의 존속여부에 따라 없어질 수 있는 시한부 감정인 것이죠. 불교에서는 이렇게 영속적이지 않은 대상에 대한 사랑, 즉 집착은 고통을 줄 수 밖에 없다고 못박았죠... 스피노자가 감정, 정서를 세심하게 검토하고 설명하는 것이 흥미롭네요. 다음 시간엔 또 정서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됩니다.

 

<불교와 글쓰기> 11월 2일, 4학기 2회 수업 공지입니다.
  1. <유마경> 138쪽까지 읽고 공통과제 해옵니다.

  2. <윤리학> 111쪽 정리 33부터 예습합니다.

  3. 명상: 만트라 명상을 함께 해보았는데요, 가장 좋은 건 직접 반복해 보시는 거죠!  옴마니뻳메훔의 6자 진언으로 만트라와 함께 하는 명징하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경험해  보시길....


이번 주 후기는 수늬샘, 다음 주 간식은 현숙샘, 반찬은 미숙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남은 한 주 잘 보내시고 11월에 뵐께요~
전체 1

  • 2020-10-30 21:29
    와병 중에도 계속 되는 유마힐의 공감능력은 연민과 자비심으로, 타자를 의식하는 노력인 암비치오는 서로에게 장애로.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