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11월 23일 수업 후기

작성자
호정
작성일
2020-11-26 14:05
조회
3486
수늬샘. 4주간의 유마경 공부를 마치고 이번 시간부터 「섭대승론(攝大乘論)」 공부를 시작했어요. 「섭대승론」은 인도의 무착 논사가 「대승아비달마경」의 ‘섭대승품’을 해석한 논서입니다. 경전에서 말한 대승의 열 가지 뛰어난 의미를 체계적으로 논증함으로써 당시 불교계의 큰 논쟁거리였던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즉 대승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을 논파하고 대승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의를 잘 드러낸 것임을 널리 알렸다고 합니다. 「대승아비달마경」은 유식학이 기반하고 있는 여섯 경전중 하나로 중국에는 전래되지 않았지만 인도 유식학파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네요.

불교의 철학적 비전을 설파하는 논서

「섭대승론」도 유마경처럼 공 사상을 주창하여 대승불교 시대를 연 반야부 계통의 저술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유마경은 경전이고 「섭대승론」은 논서라는 점이 다르죠. 논은 경전 못지 않게 중요한데, 부처님의 대기설법의 방대한 말씀으로부터 말씀을 관통하는 비전을 제시하기 때문이죠.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여러 논들이 갈라져 나왔는데, 중론, 유식론처럼 논서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변형, 확장하면서 불교는 철학적인 길을 갑니다. 논이 있기 때문에 불교가 철학이 될 수 있는 거겠죠. 철학이 신학과 다른 점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허용하느냐는 것인데, 부처님은 자신의 말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맞는지 우리 스스로 확인해보라고 하십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우리의 깨달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각자의 몫인 거지요. 채운샘은 우리나라에도 논을 연구한 글들이 많은데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쓴 게 많지 않아 널리 전파되지 않은 아쉬움을 토로했지요. 수늬샘. 채운샘의 깊은 한숨과 간절한 바람이 느껴지나요? 오겡끼데스까? ㅎㅎ

마음활동의 근거와 양상

「섭대승론」은 ‘대승을 포괄하는 논서’라는 의미로, 대승불교 개론서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유식학의 입장에서 반야부 경전의 사상을 계승하여 반야바라밀을 근본으로 삼고, 유식 경론과 대승불교 전체를 체계화하였다고 합니다. 중생의 본질이며 생명의 근원인 아뢰야식의 고찰로부터 시작해서 불신관(佛身觀)으로 끝나며, 이론과 실천의 기본원리, 수행 방법과 과정, 그것의 증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뢰야식의 이해가 관건인데, 유식을 공부했는데도 아리송합니다. 지혜와 선정 수행이 함께 했을 때에야 사물의 실상인 진제를 이해할 수 있기에 불교 공부가 어렵기도 하지만 깊이있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모든 생명의 마음작용은 상속된 생명정보와 학습된 기억정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생명정보와 기억정보의 총체가 아뢰야식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정보와 개체로서의 기억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아뢰야식은 인식 자체가 아니라, 우리 인식의 토대입니다. 생명정보는 내가 부모님의 몸을 빌어 태어나기 전부터의 정보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인간 이전인 물질 정보까지 닿게 됩니다. 기억 역시도 개체적인 것이지만 국가, 민족, 인류로 확장됩니다. 우리의 개별적 인식의 토대인 아뢰야식이란 것도 나 이전의 세계와 기억정보라는 개체의 세계가 얽혀있는 것이죠. 아뢰야식은 우리 활동의 종자가 심어져 기억으로 머물러 있는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행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유동하는 식입니다. 유동하는 에너지만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체가 만들어지는지는 시몽동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고 하니 관심 있으면 공부해 보시길. ㅎㅎ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세 가지 마음작용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자신이 감각한 대상세계에 대해 기억정보를 토대로 심상을 만들고(의타기성 依他起性), 만들어진 심상을 실재로 착각합니다(변계소집성 遍計所執性). 그러나 수행을 통해 이것이 실제로는 기억정보가 만든 환상임을 알게 됩니다(원성실성 圓成實性). 이러한 마음작용이 사람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즉 우리가 각각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현재의 인연을 재구성해서 그렇게 의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절대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현재의 인연 속에서 만들어지는 종자의 정보들과 함께 갑니다. 아뢰야식은 순수 무의식의 어떤 상태가 아니며, 과거와 현재는 상호인과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식의 토대인 아뢰야식 역시 연기조건에 의해 구성된 것이므로 깨닫게 되면 아뢰야식마저 없어진다고 합니다. 더 이상 식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달라이라마는 이를 청명한 빛이라고 한다네요. 일상에서 가끔씩 작은 깨달음을 얻고 소식했다며 기뻐하는 저는 아뢰야식이 없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상상하기 어렵네요. 수늬샘은 알겠는지요? 모를 거라고 전제하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어보는, 소위 멕이는 거 아닙니다요.

의식의 조작

이번 시간 공통과제 중에, 하나의 기억이 계속 떠오르며 특별한 정서를 일으킨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어떤 기억이 계속 회귀하는 것은 아뢰야식 속에 있는 기억의 자모음이 그런 식으로 종합될만한 현재를 산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인연조건이 과거를 그런 식으로 불러낸다는 거지요. 인연 따라 적의적절한 지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인연조건이 과거와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공을 깨달은 상태에서 분별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의 적의적절한 지혜를 쓴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현재의 인연을 따라 살지 못하는 건 조건을 고정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조건은 형성되고 해체되는 건데, 우리는 사고의 연속성을 가지고 과거를 떠올리고, 그 사고의 프레임을 다시 현재에 적용합니다. 이것은 의식의 조작입니다. 의식이 실상을 왜곡하는 거지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그 세계를 해체해야 합니다.

공부하다가 머리가 아프면 우리는 가까운 것들끼리 인과를 짓습니다. 공부하니까 머리가 아프다고. 그러니 공부를 그만 해야겠다고. 맞는 진단일 수도 있지만,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두통이 있지만 읽고 쓰는 것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두통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두통을 병이라고 규정하고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두통이 니체의 글쓰기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머리가 아프니 계속 앉아있을 수 없어 산책을 가고, 앉아서 글을 쓸 수 없으니 걸으면서 수시로 메모하는 생활을 통해 호흡이 짧은 글, 아포리즘적 글쓰기가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죠. 이것이 인연 따라 적의적절하게 사는 것이겠죠.

두통은 몸이 보내오는 신호입니다. 그러나 두통의 양상은 매번 다르고 아픈 정도와 지속 기간도 다릅니다. 두통이 말해주는 것은 내 신체가 매번 다른 상태들을 경유한다는 것인데, 우리의 의식은 이것을 ‘두통’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두통을 의식이 거짓이라는 것에 대한 신체의 반론, 저항이라고 봤습니다. 우리는 의식과 나를 동일시하지만, 의식은 규정성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규정이란 대립항을 통한 비교에 근거합니다. 병 역시도 이전의 몸 상태와의 차이에 대한 호명일 뿐입니다. 차이나는 현재를 병이라 이름 짓고 그 이전 상태를 건강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불쾌는 차이가 만들어내는 느낌일 뿐인데, 불쾌한 상태라 규정짓고, 불쾌하지 않은 상태를 내가 되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병이 나지 않은 상태에 대한 갈망과 집착이 일어납니다. 의식의 조작입니다.

니체는 두통을 앓았기 때문에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여기는 것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됩니다. 고통이든 두려움이든 제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방해되는 것을 없애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지입니다. 세계에는 고통도 장애도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의 견해, 해석만 있을 뿐입니다. 고통과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제거하려는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인지시스템 자체를 해체하려는 것이 불교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결과에서부터 원인을 유추하는 사고를 합니다. 슬픔이나 기쁨이 일어나면 그것을 실체화하고 그 원인을 찾아 갑니다. 그러나 슬픔이나 기쁨은 그 자체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이라는 방식으로 현행하는 겁니다. 슬픈 일이라 슬픈 게 아니라, 현재의 삶의 조건에 그걸 슬픔으로 기억할만한 게 있는 거죠. 슬픔이란 방식으로 현행하는 이유를 이해해야 슬픔의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감정과 판단을 생산하는 그 과정을 사유하지 않으면 매번 동일한 의미화를 반복하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 합니다. 인식 시스템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닙니다. 슬픔과 기쁨을 주는 대상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실체가 아닌 감정이 마치 실체인 것처럼 드러나게 하는 이 식작용은 개체의 경험으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무시 이래의 인류의 식작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개체적인 의식 속에 사로잡혀 있는 개인에게 그 개체의식이 인류의 진화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니 어려운 문제죠. 게다가 유식은 요가에서 나온 것으로 지(知)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 자체가 분별적 식작용을 기반으로 하므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 감각이 다르게 작용되는 것까지 가야 되는 것이죠. 모든 앎은 우리의 기존의 앎을 매번 갱신하고 재구성합니다. 두근대네요. 두근두근. 몸이 보내는 이 신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우리들 각자의 몫이겠죠. 두렵기도 설레기도 하네요. 수늬샘은? 한 자리에서 얼굴을 보지는 못 하지만, 파동을 느껴보아요.
전체 2

  • 2020-11-26 20:47
    수늬샘에게 띄우는 러브레터 같습니다~ 도반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서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 2020-11-27 23:29
    와따시와 오겡끼데쓰ㅋㅋ
    저의 밥벌이도 니체가 두통을 사용한 방식을 닮고 싶은데 말이지요.
    유식의 식작용 부분은 오래전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들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되풀이한다.'를 떠올리게 하는 군요.
    도반들이 전하는 파동이 한 자리에서 강의 듣는 듯한 느낌으로 전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