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4학기 3번째 수업 후기

작성자
현화
작성일
2020-11-12 20:57
조회
3230
유마경 세 번 째 수업 후기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들은 바를 정리하여 올립니다.

병이 난 유마 거사를 문수사리와 모든 대중들이 문병을 가는데요,

본격적인 『유마경』 강의에 앞서 채운 샘은 많은 질문들로 운을 떼셨어요.

분별망상이 중생의 병

유마는 왜 병이 났는가? 왜 아픈가? 그런데 아프다는 것은 무엇인가? 병이란 대체 무엇인가? ‘아프다’는 것은 말로 그 상태를 나타내기가 불가사의하다. 병든 상태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언어란 없다. 얼마나 아파야 아프다고 하는 것인지, 병이라 하는지는 사람이나 상황 마다 다 다를 것이다. 도무지 분별적 언어로 그 상태를 표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지점이다. 불교에서의 비유는 단지 문학적 메타포가 아니다. 불가사의한 영역을 비유로 전환해서 분별을 넘어서는 차원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유마의 병도 생각의 척도로 환원이 불가한 고도의 추상성을 가지므로 일상적인 언어의 비유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유마는 중생이 병들었기에 자신도 따라서 병이 든 것이라고 한다. 그럼 중생의 병이란 무엇인가? 병든 것은 병들지 않은 상태와의 대립에 의해 감지된다. 예를 들어 1cm 정도 칼에 베이면 누구는 많이 아프다고 하지만 누구는 그 정도로 아파하지 않는다. 물체의 차원에서 보자면 칼이 몸(body)에 접촉해 들어간 것일 뿐이다. 그저 칼과 몸이라는 두 사물의 마주침만 있는데, 동일한 상태를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세계가 달라진다. ‘아프다’는 것은 상해, 자해, 실수에 해당하는 지시물이 아니라 이름에 따라 각 세계의 층위가 달라진다. 아프다고 하는 일반적인 상태가 지시물로 있지 않고 병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의학적으로 규정하는 병과 내가 규정 하는 병이 같지도 않지만, 이름을 붙이는 방식으로 의미화하는 순간 병이 실재적으로 있는 것처럼 실체화되는 것이다.

사건을 구성하는 방식을 사건의 층위라 하면 거기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의미화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물체에 다른 층위를 덧붙인다. 언어는 의미화하는 도구이다.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이름 붙임과 동시에 그 세계가 나타난다. 사물의 세계에서는 결합과 해체만 있는데 언어적 층위를 덧붙여 어떤 세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것이 환(幻)의 세계이다. 환이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아지랑이, 물거품, 메아리, 번개, 이슬과 같이 나타남과 동시에 잡을 수 없는 것들로 무상함을 함축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규정하는 모든 상은 언어를 통해 분별로 구축된 환영이다. 언어화하지 않으면 없는 세계, 분별로 망상을 만들어내는 세계다. 실상에는 없는 세계를 의미화하는 것이 분별망상이고, 이것이 바로 중생의 병이다.

분별이 망상인지도 모르고 실재와 동일시하는 전도몽상이 무명이다. 유마의 병은 무명 속에 살아가는 중생의 삶 자체가 병임을 비유하고 있다. 이 병은 특별히 아픈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세계를 의미화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그래서 병이라는 말에 걸리면 안 된다. 노화도 일종의 병이고 중생의 삶 자체가 병이다. 중생이 무명에서 시작해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12연기를 돌고 도는 것이 병든 상태이다. 각 국면 국면마다 망상을 짓고 그 망상이 실재한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중생의 세계다.

기반의 부재

모든 것은 조건을 기반으로 생긴다. 기반의 부재인 무주가 망상의 토대이다. 아무 기반이 없는 공이기 때문에 어떤 분별망상이라도 가능하다.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은 공을 토대로 다 의미화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성을 가진 실체가 있다면 그 자성대로 살아가면 되지 왜 망상을 지으며 살아가겠는가? 서양 철학의 역사는 토대를 만드는 작업이었으나 불교는 원래 토대가 없어서 그 무엇도 들어설 수 있다는 관점이다. 서양은 이 헛된 세계를 버리고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였지만, 불교는 헛된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을 의미화한다. 의미화는 무의미를 전제로 한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의미를 만들어서 만들어진 세계가 환임을 함께 보는 것이다.

분별망상으로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 중생의 최초의 마음 작용이다. 모든 부처님의 해탈은 “모든 중생들 최초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합니다.”『(유마경』, 시공사, 108쪽)고 한다. 빅뱅 당시의 우주는 공이다. 의식의 속도와 몸의 속도는 다르다. 몸이 해체되어도 사후에 더 오래 존재하는 의식은 더 늦게 해체된다. 물질은 500년 정도 되면 원자 차원으로 해체되고, 그 이후 의식이 ‘나’와 ‘너’가 없는 공 상태로 해체되면 최초의 마음인 청명한 빛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공에서 와서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공에서 결합되어 있다가 해체해 가는 것이 삶이다. 삶은 덕지덕지 결합해 가는 차원이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죽음 자체가 또 다른 해체의 차원을 사는 과정이다. 우주 자체는 불생불멸이고 적멸하다. 하여 해탈은 이 세계에 원래 내재해 있는 것이다. 세계가 공하기 때문에 분별망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중생이 없다면 보살도 없다

무명과 깨달음은 다르지 않다. 깨달음의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방식이 무명이기 때문이다. 이미 깨달아 있는 세계 위에 깨닫지 못한 중생의 세계가 겹쳐져 있다. 분별망상의 이 세계를 떠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 분별망상의 세계를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대승의 관점이다. 대승 보살은 병든 중생의 윤회하는 세계 속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자이다. 중생의 병을 뿌리치고 다른 세계로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분별망상하는 중생 속에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병이라고 의미화된 것일 뿐 병이라는 어떤 실체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지 않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킨다.

왜 보살은 중생의 세계를 떠나려 하지 않는가? 중생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살은 그 속에서 중생을 조건으로만 성립한다. 중생은 삶 자체가 무명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생사유전하는 괴로운 삶을 산다.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보살은 중생의 세계 안에서 깨닫는 것이고 중생의 세계 자체가 깨달음을 조건으로 한다. 무명 속에 있어야 무명을 자각하고 분별 속에 있어야 분별을 자각할 수 있다. 한 중생이라도 무명 속에 있다면 다른 중생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보살은 해탈할 수 없다.

보살들은 중생이 겪는 모든 분별망상에 다 귀 기울인다. 그것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분별망상임을 알고 듣는 것이다. 사건화하는 방식은 중생마다 다르지만, 그 중생이 구축한 환임을 알기 때문에 다양한 분별망상을 흥미롭게 들어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자기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불편하고 짜증이 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듣지 못한다. 극우의 세계도 극좌의 세계도 망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분별망상임을 알아차릴 뿐이다. 분별망상이 오직 망상임을 직시하는 힘이 지혜이다. 헛된 것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보살은 이 세상이 전부이고 환이 본질임을 안다.

『유마경』의 키워드는 ‘불이(不二)’ 법문이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라는 것도 아니다. 현상 세계에 나타나는 방식은 다르지만 나타나는 것의 조건은 공 하나다. 병과 고통이 분별망상임을 알기 때문에 끊으라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의미화 한 것을 실재라고 착각한데서 속박 당한다. 자기가 자신을 속박할 뿐이지 누가 속박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방편은 분별망상이지만 거기에 매이지 않는다면 어떤 방편도 가능하기에 유마의 병은 깨달음을 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밖의 이야기들 큰 주제로 묶이지 않는 내용은 단편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어떤 것을 추구하면 이미 그 속에는 대립되는 결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하는 것이 없는 마음이 해탈이다. 지금 여기를 부정할수록 그 없는 세계를 추구하게 되고 그 갭만큼 괴로움이 생긴다. 나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가 큰 위력을 가진 보살이라는 것이 불교의 해법이다.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깨달음의 여지를 주는 보살로 악한 자를 전환시키는 방식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보살이다. 힘들게 하는 강도가 클수록, 삶에 어려운 사건이 올 때일수록 질문의 장이 펼쳐진다. 내가 겪는 사건들이 깨달음의 장이다. 장애를 치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자식의 어려움을 미리 다 제거하는 것은 깨달음의 기회를 뺏는 것이다. 고난에 처했을 때 서로가 서로를 돌보게 된다. 주역의 ‘손(巽)’괘는 어려울 때일수록 오히려 자신의 것을 덜어서 남에게 주라고 말한다. 전체 사회가 유지되어야 나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극복한 경험이 내가 죽어서도 가져갈 수 있는 자산이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보살로 전환시키는 것이 내가 보살이 되는 것이다. 그저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나를 깨닫게 하는 장으로 생각하고 정진하라. 스스로 분발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세계이다.

자기가 자신의 번뇌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를 자각하지 않는 자를 부처의 세계로 끌어들이기는 어렵다. 그 망상의 세계를 살아가는 중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인연조건으로 나타난 것이지 실재인 것은 없다. 나도 공하고 너도 공하고 부처조차 공하다. 궁극의 세계는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 없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실체성을 부여할까봐 유마는 침묵하는 것이다. 말에 매이지 않기 위해 문수보살의 질문에 침묵으로 응수한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기에 계속 대화를 통해 결국 유마의 침묵을 유도한다. 말로 논증해서 넘어갈 수 없는 지점이 침묵임을 보여준다. 법은 언어 문자로 전해지는 것이지 언어 문자로 지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해탈의 모습을 공 자체를 기반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여성, 남성도 우리가 붙인 이름이다. 단지 환영이다. 성 정체성은 사회적 규정에 따라 드러날 뿐 신체가 다르다는 것이 정체성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 신체에 이름 붙인 것이지 다르게 부를 수도 있다. 나타난 개체는 우주 자체가 드러난 조합일 뿐인데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대하기에 천녀는 사리불의 분별을 무화시킨다. 모든 것은 그렇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 이름으로 규정하는 것에 끌리면 안 된다. 어디에 들더라도 보살행을 하라. 깨닫지 못한 무명 중생이 있는 이 세계에서 구도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모든 분별이 일어나는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장이다.

유마의 방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모든 불보살과 대승문들이 들어갈 수 있고 그 많은 사자좌들도 놓을 수 있다. 우리의 척도를 넘어선다. 어떤 것도 규정되어있지 않는 그 자체가 불국토다. 겨자씨 안에 시방삼세가 담겨 있듯이 유마의 방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수적인 차원이 아니라 생성변화의 관점에서 볼 때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다. 있는 그대로가 긍정되는 세계, 더하거나 덜 지 않아도 그 자체로 무한한 세계이다. 내가 그 자체로 우주라는 것은 우리 신체 안에는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인연 조건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함을 포함한 개체이다. 단 자기의 규정성을 벗어나야 한다.

가족은 애착심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변환되기 어렵다. 부처님도 가족 관계 안에서는 다르게 볼 수가 어려워서 출가한 것이다. 50세가 넘으면 삶의 중심이 가족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가야 한다. 여러 중심들 가운데 하나가 가족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부모, 자식도 연하여 있지만 실체가 아니다. 가족이 섬처럼 될 필요가 있다. 애착과 두려움은 함께 간다. 두려움은 애착이 있을 때 생기고 우리를 예속되게 한다. 극단적 소유에 대한 애착은 상실의 두려움으로 죽음을 동반하고 번뇌와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전체 2

  • 2020-11-13 22:54
    여성, 남성도 다 이름 붙여진 것이라는 것, 신체적 차이로 나타난 것을 우리가 사회적 성정체성으로 그렇게 분별하고 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는 하는데, 여전히 천녀는 여성성으로 떠올려진단 말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런 분별적 개념에 길들여져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의 분별을 넘어선다는 건 대단한 얘기 같아요.

    정리의 여왕 현화샘의 정돈된 후기 잘 읽고 복습합니다. 고맙습니다~ ^^

  • 2020-11-14 09:54
    마주침만 있을 뿐인데 내가 그 사건에 이렇다 저렇다 의미를 붙이고 만들어낸 이 허상을 실재라고 믿어버리는 것. 이것이 유마힐의 병이자 중생의 병이자 전도몽상이며 이를 방편으로 망상의 기반이 무주임을 알아가봅니다, 현화샘 꼼꼼한 정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