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0월 26일 4학기 1회 수업 후기

작성자
수늬
작성일
2020-10-31 13:57
조회
3247
죄송한 마음으로 주말이 되어서야 늦은 후기를 올리게 됨을 혜량하소서!

어느새 따뜻한 옷을 찾게 되는 계절이 오고 우리도 올해의 마지막 학기를 맞게 되네요. 경전을 읽고 함께 공부하고 명상하며 그래도 조금은 마음의 번뇌를 볼 수 있는 힘이 자라지 않았을까 기대합니다만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ㅎㅎㅎ.

유마경 첫 3품을 읽고 써온 공통과제문과 토론에서도 그랬는데 여전히 우리에게는 깨달음의 위해 가야할 길이 있고 갈 길이 멀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목표지점이 있고 그 곳으로 간다는 식의 생각이지요. 자연히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조급증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생각이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니체는 ‘망망대해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듯이’ 우리의 삶을 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바다에서 수평선은 언제나 저 먼 곳에 있는 것이지요.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곳에 가 보면 수평선은 다시 저 먼 곳으로 물러나 있으니까요. 먼 곳으로 물러나 버린 수평선을 보고 실망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삶 자체임을 알아야 욕망의 잔물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하면서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약간 마음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익숙한 표상이, 양적인 것에 대한 습관화된 사고가 우리 스스로를 시작과 끝이라는 어떤 지점을 만들게 하고 그 곳에의 도달이라는 식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부처님은 싯다르타로 태어난 생애에 6년의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4아승기 십만겁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표현하지만 그냥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있었고 그 시간은 수나 양의 개념이 아니라 그 무수한 삶을 통과해왔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닙니다. 얼마나 더 해야 도달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한 걸음 디디겠다는 이 마음이 전부입니다. 이 번뇌를 번뇌로 보고, 이 업을 업으로 아는 그 마음이 한걸음입니다.

대승기신론을 읽으면서 더 자세히 공부했지만 업은 지나간 기억에 대한 환기이며 흘러갈 뿐인 그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 환기가 반복되면 붙들린 기억에서 출발한 그것에 대한 착각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판단 중 많은 부분은 그 착각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것 또한 자연법칙의 일부이긴 하지만 이렇게 독특한 방식의 인과가 작동하는 것이 업입니다. 여러 선택지 중 내가 고른 하나의 행위는 그 방향의 업이 더 강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동일한 힘이 작동할 경우 우리는 더 익숙한 업으로 행위하고 더 먼저 생겨난 업으로 행위합니다. 결국 나의 행위가 내 업입니다. 업의 힘으로 행위하는 우리를 볼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공부입니다. ‘수평선을 바라보듯이’ 먼 조망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을 조금 내려 놓으라는 말씀이 저에게는 힘이 됩니다. 조금만 안 되면 의심과 책망으로 자신을 조급하게 밀어붙이는 마음의 패턴을 다시 보게 하고 긴 호흡으로 공부할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다시금 되찾게 합니다.

유마경은 출가하지 않은 세속의 거사인 유마힐이 설한 불교 초기 경전으로 ‘유마힐소설경’ 또는 ‘불가사의한 해탈경’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은 십대제자에게 병에 걸린 유마힐에게 병문안하라는 말씀을 내리지만 제각기 그 말씀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지혜제일 사리불에서 다문제일 아난다까지 이전에 유마힐을 만나서 자신의 분별상을 들켜버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각각 자신의 자리에서 예를 들어 사리불은 좌선에 대해, 목건련은 법에 대해, 대가섭은 걸식에서 드러난 평등심에 대해 깨달음의 눈으로 본 유마힐의 그물에 걸려듭니다. 모두 법을 설하지만 분별을 완전히 떠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마경에 대해 세속의 인간이 불교교단의 권위에 대해 비판하려 했다는 역사적 관점으로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만 공부하는 우리로서는 분별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역으로 확인하게 되는 경전이기도 합니다.

결국 분별로 드러나는 우리의 무명이 가장 중심에 있습니다. 첫 번째 품에 나오는 불국토는 그래서 어디 먼 곳에 있는 다른 장소가 아니라 중생들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보적 보살이 랏차비 족 젊은이 오백 명과 함께 칠보 양산을 제각기 들고 부처님께 바쳤을 때 부처님은 그것들을 한 데 합쳐 하나의 양산으로 만든 후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습니다. 화엄세계와 법화일불승이 오버랩되는 장면입니다. 보살들에게 부처님은 설합니다. “중생들의 국토가 바로 보살의 청정한 불국토이다. 무상보리심을 일으키는 그 터전이 바로 보살의 청정한 불국토이니, 보살이 대보리를 중득할 때 처음으로 대승에 대한 마음을 일으킨 모든 중생이 그 나라에 와서 태어날 것이다.” 중생이 보살의 마음을 일으키면, 일으키는 그 자리 그 순간이 바로 불국토라는 말이겠지요. 대승기신론에서 공부했듯 끝없이 생멸이 일어나는 이 자리가 바로 진여의 자리입니다. 이 마음의 분별이 일어난 그 자리의 무명을 보고 무명임을 아는 것입니다. 무상보리심은 그 무명을 본 자리에서 부처님의 일산으로 상호연결된 우리를 보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청정함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경전의 말씀은 결국 한 말씀으로 통하지만 조금씩 다른 차이 속에서 우리는 되풀이하여 우리의 무명을 봅니다. 유마힐의 가르침을 따라 또 어떤 무명의 자리를 확인하게 될런지요. ‘망망대해에서 수평선을 보듯’ 긴 호흡으로 한 걸음씩 디뎌봐야겠습니다. 걷기 명상할 때 한 걸음 한 호흡을 알아차림하듯 자기자신의 무명과 분별을 보려는 과정이 우리의 수행입니다. 저는 이번 학기 형편이 닿는 대로 온라인으로 공부하며 도반님들과의 수행을 이어가겠습니다. 모두 평안하시길!!!
전체 3

  • 2020-11-01 08:53
    ‘무명과 분별을 보려는 과정이 우리의 수행입니다.’ 그러네요...지금의 무명과 분별이 기회인 것을 말입니다. 그것을 박멸하고 신박한 무언가를 계속 좇으려는 마음이 벌써 욕심이겠네요. 수늬샘의 원격공부 응원합니다~ 시간되시면 종종 오시고 에세이 때 계란 두판 약속 딱 기억합니다!!!

  • 2020-11-01 09:29
    마음의 분별이 일어난 그 자리의 무명을 보고 무명임을 아는 것. 무상보리심은 그 무명을 본 자리에서 부처님의 큰 우산으로 상호연결된 우리를 보는 마음. 음~~
    수늬샘. 매주 얼굴 보지는 못 해도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힘이 됩니다. 담에 봐요

  • 2020-11-01 20:55
    일하는 현장에서 타자와 부딪히며 나의 분별을 바라 보고 공부하실 수늬 샘의 4학기 현장 학습을 멀리서 매일 매일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저희들 모두 바다 위 잔물결들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이 멀미나는 잔물결이 망망대해 위에 일어났나 지는 작은 파도임을 알겠습니다.
    현장에서 어떤 파도를 넘고 계신지... 두 발을 디딘 자리가 어느 순간 불국토로 변하기도 하는지... 수늬 샘의 소식을 불교팀 도반들과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추워지는 날씨에 따뜻하게 다니시고 건강도 조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