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4학기 3회 수업 공지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0-11-03 23:25
조회
3257
불교팀의 이번 수업은 스승님께서 저희끼리의 자습을 윤허하시어 명상, 공통과제 토론과 낭송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감기로 못나오신 현화샘과 요즘 바쁜 일터에서 그동안 배운 불법의 지혜를 적용하고 계실 수늬샘 두 분이 빠진 가운데 열 분이 모여 공부를 했습니다.

보통 각자 써온 공통과제를 읽는데 1시간 그리고 그 과제에 대해 1시간 좀 넘는 빠듯한 토론 시간을 갖는데 이번엔 점심 산책 이후에 돌아와서까지 이야기를 하다보니 거의 4시가 다 되서야 토론을 마쳤습니다. 한 주동안 공부하고 생활하며 겪은 문제들을 소박하게 써온 한 분 한 분의 글에 담겨있는 고민의 맥락을 묻고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그렇게 훌쩍 가버리네요. 자, 저희가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던가요?

유마가 병이 나자 부처님의 지시로 문수사리가 병 문안을 갔습니다. 보살 8천명, 성문 5백명 그리고 수십 만의 제석천과 천자들이 따라가지요. (수적으로도 벌써 성문이 밀리네요 ㅎㅎ) 실은 문수사리가 문병을 가기 이전에 부처님은 제자들 한 명 한 명에게 문병갈 것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문병을 거부하죠. 이들이 왜 문병을 거부한 것일까요? 성희샘과 지영샘이 공통과제에서 이 질문을 하셨죠. 이들은 이미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므로 지영샘이 얘기한 것처럼 자아에 대한 집착이나 ‘나’라는 상에 매여있던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다만 소승의 울타리에 머물러있다는 비판을 받은 것이죠. 유마경이 쓰일 당시 대승불교는 기존의 불교 교단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었고 그 첨예한 논점들이 10대 제자에 대한 유마의 설법에서 보여집니다. 성문 아라한인 제자들은 대승의 재가 신도인 유마의 설법에 입도 뻥긋 못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지요. 인도에서 발전한 불교에는 불법을 해석하는 이견들 간의 논쟁이 매우 중요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와 외도 사이에서도요) 그런데 이들 참패를 당한 제자들은 다시 유마를 만난다 한들 그와의 논쟁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그래서 문병을 거부했을 거라고 저희는 토론을 했습니다.

문병을 간 문수가 유마에게 묻습니다. 병의 고통은 견딜만한지,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하면 나을 수 있을지 등등을 말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참 질문도 많네요! 이에 유마가 대답합니다. 중생이 병들어 나도 따라서 병이 든 것이니 중생이 치유된다면 나도 따라서 치유될 것이라고요. 그러면서 자신이 걸린 병은 중생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없애고자 하는 대비심(大悲心)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죠. 저희는 어떻게 이런 마음으로 병이 들고 나을 수 있는지 이해하고 싶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유마는 이게 하나뿐인 자식이 병들면 부모도 병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를 해줍니다.

이 부분에서 미영샘은 대비심이란 모든 중생이 이미 부처임을 알고,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고 써오셨어요. 그리고 그 대비심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질문을 하신 것 같은데 글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듯한 부분에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도반들이 이런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텍스트를 이해하고 정리하는 글로부터 시작하지 말고 에피소드와 질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해 보시라고 말입니다.

문수는 병든 보살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도 물어봅니다. 유마는 이렇게 대답하죠.

"몸의 덧없음은 보여주어도 몸을 싫어하라고 권하지 말것이며, 몸이 고통이라는 것은 보여주어도 열반 속에서 즐기라고 권하지 말 것이며, 몸이 무아라고 보여주어도 중생을 성숙시키라고 권할 것이며 (번역본에는 ‘중생을 성숙시키라고 권하지는 말 것이며’라고 되어 있어서 저희가 모두 의미를 헷갈려 했는데 원문과 비교해보신 은주샘이 오역을 지적하셨네요! ^^ 說身無我 而說敎導衆生) ....중략.... 자신의 병을 통해 중생을 가엾이 여겨 그들의 병을 없앨 것을 권하며, 대의왕이 되어 중생을 치료하고 몸과 마음의 모든 병을 영원히 없애겠다는 서원을 일으킬 것을 권해야 합니다. 보살은 이렇게 위로해서 병든 보살이 기뻐하는 마음을 내게 해야 합니다.” (109-110쪽)

호정샘은 ‘병든 보살이 자신의 병 속으로만 침잠하지 않고 대승적 차원에서 타인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어 기뻐하는 것을 위로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 즉 병든 보살을 돌봐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병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는 관점이 신선했다고 써오셨죠.

공통과제에서 가장 많이 언급이 된 부분은 ‘병든 보살이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유마는 병든 보살에게 병을 받을 수 있는 주재자인 ‘나’가 없으므로 나를 집착하지 말고 이 집착이 병의 근본임을 파악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또한 몸이라는 것도 온갖 법이 화합해서 생겼다 사라지는 무상한 것으로 보라고 하죠. 무아이고 무상인 것이 맞지만, 그렇다면 아픈 나와 아픈 몸이라는 경험적 현실의 차원에서 어떻게 집착하지 않고 혹은 체념하지 않고 이 아픈 몸과 관계 맺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듭니다. 토론 과정에서 복희샘은 병도 건강도 모두 나타남 그 자체로 긍정되어야 하므로, 은연 중에 병은 나쁜 것이고 건강은 좋은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고 하셨는데요, 살기를 희망하는 모든 생명 존재가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착이 아닌 방식으로 병과 관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생명 존재에 대한 보리심이 바탕이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토론에서 이 주제를 더 깊이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몸과 병에 관한 얘기말고 다른 주제의 글들도 있었습니다. 미숙샘은 아침 출근 길에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낯선 사람을 대하며 유마경에서 읽은 평등한 마음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유마힐이 보석 목걸이를 가장 보기 싫고 빈천한 거지와 난승 여래에게 절반씩 나누어 바치는 이야기죠. 그런 순간에 유마경의 내용을 떠올리신 우리 미숙 부반장님의 에피소드에 다들 훈훈하게 감동을 먹었습죠.

경아샘은 요즘 학교 공동체에서 틀어진 감정과 관계 속에서 소통의 어려움과 고민을 담은 글을 써오셨고, 법열 vs 쾌락이라는 주제를 시도하신 현숙샘의 글도 있었습니다. ‘욕망의 쾌락 한 복판에서도 깨어있을 수 있는 것’은 욕망과 쾌락이 무상한 것임을 꿰뚫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지요. 악마 파순과 1만 2천의 천녀들 앞에서도 의연한 유마힐은 세상의 모든 것이 깨달음의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공통과제 토론 후 유마경과 윤리학을 돌아가며 낭송 했습니다. 혼자 조용히 눈으로 읽는 것과 함께 소리내어 텍스트를 읽는 건 매우 다른 경험인 것 같습니다. 텍스트가 다르게 다가오기도 하고 집중도도 높은 것 같고요. 특히 윤리학에서 이번에 읽은 부분이 질투, 시기심 같은 정서에 대한 부분이라 낭송을 하면서도 재미있어서 피식 피식 웃었네요.

스승님께서 유마처럼 아프지 않으시더라도 가끔씩 쉬시면서 이렇게 저희에게 자습의 기회를 주시면 저희가 맘껏 토론도 하고 낭송도 해보고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시간이었습니다. ^_^


<불교와 글쓰기> 11월 9일,  4학기 3회 수업 공지입니다.


  1. 유마경 193 쪽까지 읽고 공통과제 해옵니다.

  2. 윤리학 111쪽 정리 33부터 일독해 오세요.

  3. 명상: 저희 마음 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방편으로 삼는 생각 명상을 복습해 봅니다.


이번 주는 강의 후기가 따로 없고요, 다음 주 간식은 경아샘, 반찬은 지영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날씨 많이 추워지는데 건강 조심하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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