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11월 16일 4회 수업공지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0-11-13 00:24
조회
3369
 

유마경을 읽고 있습니다. 멋진 비유와 상징이 많아 내용도 흥미진진하고 현장의 번역이 이해하기 쉽고 매끄러워서인지, 모처럼 경전의 두께가 얇아 읽는데 부담이 없어서인지 불교샘들이 유마경을 매우 즐겁게 읽고 계신 듯 합니다. ^^

유마경에도 그렇지만 불경에는 비유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들이 그냥 상징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기존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할 때 비유를 등장시키죠. 수량화하거나 척도화 될 수 없는 고도의 추상적 사유를 가장 분별적 언어인 비유와 훅 맞물리게 하는 작전이라고 하는데요. 가령 이런 겁니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이 오랜 시간을 불경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주 아주 높은 바위 산이 있는데 하늘의 천녀가 100년에 한 번씩 내려와 시스루의 부드러운 치마 자락으로 이 바위산을 한 번 스윽 스칩니다. 100년에 딱 한 번있는 이 마찰에 의해서 바위산이 닳아 없어지는 시간... ㅎㅎ 이런 시간이 상상이 가십니까. 유마경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비유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수만 개의 보석 의자가 날아오고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수 많은 의자들이 조그만 유마의 방안에 여유있게 자리를 잡고 이 의자의 사이즈에 맞게 보살들이 자신의 몸을 조절하고 등등... 아, 천녀가 뿌린 꽃도 있었죠. 아무튼 뭔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도 굉장히 시각적인 상상력을 촉발시키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멋지게 보여줍니다.

유마가 걸린 병도 비유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번 주 강의에서는 바로 이 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봤습니다. 중생이 병이 들어 유마도 병에 걸렸다니 이걸 중생의 병에 대한 보살의 깊은 공감(?) 정도로 생각을  하기 쉽죠 그런데 샘께선 병과 아픔이라는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숙고해봐야 한다고 하셨죠.

아프다는 것, 병에 걸렸다는 걸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지시하는 정해진 무언가가 있는가 하면 꼭 그렇지 않습니다. 병들지 않은 상태와 병든 상태를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그 상태에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서죠. 아픔에 대한 자각 증상도 사람마다 다르고 병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도 다 다릅니다. 샘께선 이런 예를 드셨죠. 손이 칼에 베었다고 할 때 이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것은 손과 칼이라는 두 물질이 만난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의미화 하느냐에 따라 상해니 자해니 실수니... 등등의 언어가 사용되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기서 상해라는 말 자체에 대응하는 지시물이 없습니다. 손과 칼이 만나 칼이 손에 깊숙이 들어갔다는 사실에 상해, 자해, 실수라고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같은 사건에 다르게 의미를 덧씌우는 것이죠. 그렇지만 단지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일 뿐 그 언어가 실질적으로 지시하는 대상은 없습니다. 마치 환영과도 같이 사건에 덧씌워진 것, 이것을 들뢰즈는 ‘시물라크라’라고 불렀다고 하죠.

들뢰즈가 말한 이 시물라크라의 차원은 불교에서 분별로 망상을 만들어내는 차원과 같습니다.  망상도 그냥 상이고 환영일 뿐이죠. 그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으나 분별로 만들어진 헛된 상. 일찍이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이렇게 언어가 구축하는 망상, 희론을 하나 하나 논리로 반박하며 우리가 있다고 믿고 있는 세계가 실은 언어로 분별된 망상, 희론일 뿐임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예전에 중론을 읽었던 때를 다시 돌이켜보면, 나가르주나의 논리가 이해 될 듯 하면서도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라고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던 마음이 떠오르네요. 그러니까 부지불식간에 언어를 통해 실체화 시키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정말 그것이 있는가라고 묻는 나가르주나의 질문과 논리를 당시 저는 뼛속 깊이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왜냐하면 그냥 실체화 시키는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한들 별 문제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내가 생각하고 이름 붙이는 모든 것들을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 그렇게 붙들고 있는 것이 삶에서 근원적으로 고통을 일으킨다는 걸 이해하는데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중생이 병들었다고 할 때 병이란 본질적으로 중생이 살고 있는 조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망상, 허상을 실재한다고 동일시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 바로 그것이 무명이라는 조건입니다. 이런 무명 속에 살아가는 중생의 삶 자체가 병든 삶입니다. 12 연기가 무명으로부터 시작하죠.  망상이 망상임을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부터 반응적인 행동이 일어나며 12개의 고리를 돌고 도는게 윤회의 상태, 병든 중생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유마가 놀라운 것은 병 그 자체인 중생의 삶에 고스란히 자신의 삶을 포갠다는 것이죠. 무명의 윤회를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 않고 중생과 함께 이 윤회의 아픈 세계에 있겠다는 겁니다. 보살의 대비심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분별 망상의 세계 속에서 분별 망상을 집어 치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분별 망상임을 알아차리라고 할 뿐이죠.

모든 것이 공한 세계이기 때문에 거꾸로 분별 망상이 일어납니다. 만약 정말 자성을 지닌 실체들이 존재한다면 망상을 지을 필요도 없겠죠. 공이기 때문에 망상이 일어납니다. 공이 곧 망상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분명히 자각해야 합니다. 일어나는 이 모든 망상을 실재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지랑이처럼, 포말처럼, 메아리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임을 말입니다.

이것은 일어나는 모든 망상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파의 논리도 좌파의 논리도 실은 공한 세계에서 다 일어날 수 있는 서로 다른 물거품과도 같은 것이죠. 이 세계에선 절대적인 선도 악도, 옳음도 그름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다만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알아햐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환임을 알 때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중생의 세계 속에 있을 때라야 가능합니다. 중생의 세계, 분별 망상의 세계가 조건이 되어서 깨달음이 가능해 진다는 겁니다. 중생은 병이 들었고, 병은 고통스럽지만 바로 그 고통이 있어야 깨달음도 있습니다. 결국 고통을 자각하는 문제 그래서 그 고통, 무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결국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

<불교와 글쓰기> 11월 16일, 4회 수업공지입니다.
  1. <유마경> 끝까지 읽고 공통과제 해옵니다.

  2. <윤리학> 다음 시간 진도를 많이 나갈 수 있으니 다시 한 번 여유있게 읽어오셔요. 111쪽 정리 33부터 진도 나갑니다.

  3. 명상:  올라오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을 밀쳐내거나 거부하지 않고 허용함으로써 감정으로부터 마음의 공간을 확보하는 감정 명상, 조금씩 연습하고 계시죠? 감정 명상은 현장 실습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감정말고 일단은 일상에서 소소하게 일어나는 짜증, 두려움 등을 대상으로 연습해보셔요~


이번 주 후기는 현화샘께서 이미 자세하게 올려주셨네요. 다음 주 간식은 복희샘, 반찬은 경아샘께 부탁드립니다. 담주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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