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4월 5일 수업 후기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21-04-10 15:51
조회
2660
이번 주 읽은 <숫타니파타>에 대한 공통과제 내용은 크게 ‘견해에 대한 집착에서 떠나는 것’과 ‘감각적 쾌락에 매이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저희는 주로 견해와 관련해 이야기했습니다.

우선 저는 민호가 공통과제에서 견해와 배움을 엮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 배움이란 무엇인지, 배운다는 건 우선은 어떤 가르침이 참이라 믿고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경탄했습니다. 다음으로 샘들의 코멘트에 두 번 경탄했지요. 채운샘의 강의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동안 제 머릿속에서 따로 놀던 단어와 개념들이 샘들의 질문과 코멘트로 꿰어지며 이야기가 들리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마치 모범답안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경탄에서 시작한 후기 쓰기의 과정이 순탄할 리 없죠. 옳다고 믿는 말과 나는 옳다는 자의식에 빠져 반장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토욜에 올리는 참사를 빚었습니다..

각설하고 먼저 위의 질문에 대한 샘들의 코멘트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 참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내 삶의 문제를 풀 수 있는가가 핵심’이라는 경아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또 ‘부처님이 말한 올바른 견해와 우리가 올바르다고 믿는 견해에 대해 각각 발생의 차원을 보는 정견과 편협한 앎을 진리로 여기며 집착하는 견해의 차이’를 짚어 주신 윤지샘의 말씀도 있었지요. 이어지는 채운샘의 강의에서 모두 언급하셨습니다.

 

#<숫타니파타> 강의

수행의 시작, 출리심出離尋

다만 채운샘은 우리가 질문을 던지는 지점이 ‘어떻게 하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하셨죠. 이 질문은 번뇌의 원인을 외부에 두고 나는 쏙 빠져 있는, 나와 얽힌 많은 인연 물건이든 사람이든 감각적 쾌락이든 놓지 않는 상태가 고苦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번뇌 없는 다른 세상을 찾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해탈로 이끌지 못한다고요. 이 지점에서 물어야 할 건 나는 '고苦에 대해 내가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가', '내가 쾌라고 느끼는 것이 정말 쾌인가'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단지 대상을 바꾸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차이는 괴로움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인지하는 데 있습니다. 외부의 조건들이 나에게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어떤 견해나 감각적 쾌락에 붙들려 똑같은 번뇌를 반복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죠.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출리심이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길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양극단은 서로 통한다

채운샘은 <여덟 게송의 품>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핵심이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도는 고정불면의 개체인 아트만이 있다고 여기는 상주론常住論과 죽으면 끝이라고 믿는 단멸론斷滅論의 양극단을 거부하고 연기緣起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그렇지 나도 어떤 것도 영원하나도 할 수 없지.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양쪽 다 틀렸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연기가 답인가 보다’라고 그냥 턱 믿었습니다. 반대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모든 게 공空하다면, 그 말도 공한 게 아닌가.’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 부정되면 없다로 가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 양극단은 각각 ‘있음有’과 ‘없음無’을 자성自性을 가진 실체로 여긴다는 점에서 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이 사이를 오가고 있는 거죠.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

모든 것은 연기한다, 일체개공一切皆空 등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모든 것이 공하다면 부처님의 말도 공한 게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모든 건 연기한다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의 말도 연기이므로 공한 것이 아니냐고요. 묘하게 맞는 것 같은데, 연기와 공을 자성을 가진 것으로 여기는 한에서 부처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부처님의 말씀은 견해가 아닐까요? 부처님이 연기와 공을 이야기할 때, 부처님은 자신의 견해가 절대적인 진리임까지도 부정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견해도 조건과 무관하지 않은 연기의 산물임을 아시고 고집하지 않으셨기에 최초의 다섯 제자에게 흩어져서 너희의 언어와 네가 가는 곳의 언어로 설법하라고 하신 거죠. 부처님이 자신의 깨달음을 진리라고 여겼다면 그 외의 모든 것을 열등하다 여기거나 나를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겠지만, 부처님은 눈이 있는 자는 다만 와서 보라고만 하셨습니다. 어떤 것을 옳다고 하거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의 뿌리를 보라고요.

 

견해의 밑바닥에 있는 나

어떤 것을 배울 때, 대부분 우리는 당연하게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배웁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맞아서 배우는 걸까요? 우리가 참이라고 믿고 배운 진리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게 아니라는 예들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채운샘이 맑스를 예로 들어주셨는데요. 80년대 조건에서는 맑스주의를 둘러싼 담론이 해방성이 있었지만, 동양의 시각에서 보면 너무나 근대적인 것처럼요. 위계적 계급이 뚜렷한 시대에 핍박받는 자가 떨쳐 일어나야 세계가 변한다는 주장은 멋있긴 하지만, 그것이 진리가 되면 또 다른 도그마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옳다고 여기는 마음은 어떻게 나타나는 걸까요? 샘은 무엇이 옳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은 사람이다라거나 나는 옳은 견해를 배우고 있다는 나 자신의 옳음을 믿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배우는 것은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옳아야 한다거나 내가 말하는 사람은 위대하다고 여기는 나 자신의 옳음을 믿는 것이지요. 왜? 그 대상을 곧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참이라거나 멋있다고 경탄하고 믿고 따르는 마음이 일어날 때, 자기 자신을 확신 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지금 제 모습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견고히 하는 방식이 아닌 배움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스스로 갇힌 견해로 인해 괴롭다고 인지하는지, 그것을 부수기 원한다면 무엇이든 옳다 그르다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희론을 적멸하라

<숫타니타파>는 물론이고 경전들에 희론을 적멸하라는 구절이 자주 등장합니다. 희론을 적멸한다는 것은 언어적 분별을 떠남을 말하는데요, 감각과 지각을 토대로 관념이 형성되고 관념이 다시 감각과 지각에 영향을 미치며 윤회가 반복되는데, 이렇게 형성된 사유의 집합이 희론입니다. 여기서 불교는 언어의 분절 기능을 문제시 삼습니다. 자연에서 보면 꽃이 지고 열매가 맺는 것에 어떤 잉여도 붙이지 않지만, 인간은 여기에 아쉽다거나 예쁘다는 관념을 덧붙여 스스로 그 희론에 갇힙니다. 언어의 분절기능을 통해 세계를 자타로 분절하고, 차례대로 타자를 배제하므로써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뭔가 있다는 전도가 일어나고 나와 대상을 이렇다 저렇다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하며 업을 짓지만 길이 없는 건 아닙니다. 연기의 관점에서 이러한 행위도 연기하며 공하기 때문에 그 업을 변형시킬 가능성까지도 공존한다고 말합니다. 관념을 그치는 실천과 더불어 희론이 독립적 자성을 가졌다고 보는 뿌리에 나라는 아상이 있음을,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관념임을 보는 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천개의 고원> 강의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의 3고원에서 말한 이중 분절 개념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관념의 증식, 자기가 분별했을 뿐인 관념을 대상과 일치시키는 상태라고 하시면서, 왜 이중 분절인지 이걸 통해 무엇을 깨려는 건지만 이해하면 된다고 하셔서 짧게 정리하려 했으나 끝없는 이중 분절의 고리에 빠져버렸습니다.

채운샘이 글과 사물, 물질과 유기체 등의 온갖 예를 들어 거듭 설명해 주셨지만 입도 뻥끗하기 어렵네요. 이중 분절이 무엇인지만 간단하게 정리했습니다. 들뢰즈는 모든 규정된 것은 두 가지 차원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내용의 차원과 표현의 차원인데요. 우리는 좋은 것이 있으니까 좋은 것을 떠올렸다고 여기지만 사실 좋다는 표상에 의해 어떤 것을 좋다고 떠올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가 지시체이며 언어로 의미화한 대로 세계가 존재한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 저러한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명명한 것일 뿐이며, 그 뿌리에 자의식이 있다고 믿는 부분은 불교적 사고와 매우 닮은 것 같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중 분절은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규정한 대상들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관계하는지 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가령 물질과 비물질에 대해서도 서로를 배제하며 명명될 뿐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는 보지 못한다는 거죠.

들뢰즈가 이중 분절 자체가 두 가지 규정성에 의해 분절이 일어나고 그 관계는 역동적 영향 관계 속에서 작동하며, 그 역동성 속에서 사회를 분석해 보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다르다고 여기는 어려운 대상이나 질서도 나와 무관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 그렇게 존재한다는 말을 하는 건가 싶습니다. 내가 A라고 규정하고 아무런 시도조차 안 하는 게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서 변하고 있는 이상 내가 A가 아닐 수 있다는 바탕에서 이야기할 때 맹신이나 반대가 아닌 해방과 해탈을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끊임없이 상호관계하는 변화 속에서 규정되기도 하지만 꿈틀거리는 한 바뀔 수 있으니 이런저런 질문과 시도를 해보겠습니다.

이만 후기를 마칩니다.
전체 4

  • 2021-04-10 19:58
    지영샘은 토욜에야 후기를 올리는 참사를 빚었다고 했지만, 저는 후기 쓰느라 고심했을 지영샘의 마음이 느껴졌어요. 견해에서 시작해서 희론의 적멸까지, 소제목만 봐도 강의가 한 줄기로 꿰지는 것 같아요. 애썼어요. 덕분에 저도 지난 시간 수업을 복기해보았어요. 쌩유.

  • 2021-04-10 22:33
    참사 ㅋㅋㅋ 제가 내뺀 자리를 채워주신 이 대보살심 참사가트니라고!! 애썼어요..감사해용..

  • 2021-04-10 23:31
    어떤 견해를 배우면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탕에는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은 위대하고 옳아야 해." 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공부하는 대상을 도그마화는 뿌리에는 "내"가 있다는 샘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옳아야 한다..... 그 대상이 "나"니까! 아, 언제 이 "나, 나, 나....!!!" 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지영샘의 고군분투하신 흔적이 보이는 후기 잘 읽었슴다. 수고하셨어여~

  • 2021-04-12 07:14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에는 그것이 옳아야 한다는, 그래서 옳은 것을 옳다고 보고 있는 자신이 옳다는 믿음이 견고하게 깔려 있다는 말씀이 넘넘 와닿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