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4월 19일 불교와글쓰기 후기

작성자
복희
작성일
2021-04-22 09:47
조회
2884
210419 1학기 9주차 수업후기

<숫타니파타>

감각적 쾌락

감각적 쾌락이란 욕망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이 대상과 만나면 감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감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쾌와 불쾌로 나누며 느낀다는 점입니다. 쾌, 좋음을 느낀 것들에 대해서는 애착하는 마음이 생기고 불쾌, 나쁨으로 인식된 것은 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깁니다. 이러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단순히 몸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판단체계를 생산해내는 근본이 됩니다.

현대사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라고들 합니다. 먹을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입을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추구할 자유가 있다고. 무엇이든 할 자유,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쾌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것을 자유롭다고 말하는데 선택의 자유는 정말 우리를 자유롭게 할까요? 쾌한 것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동시에 불쾌한 것을 피하는 마음을 발생시킵니다. 좋아하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추구하면 할수록 싫어하는 부분도 덩달아 커져갑니다. 쾌의 느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쾌의 느낌이 오히려 우리를 구속하게 되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상태, 그것이 중독입니다. 쾌의 추구는  중독으로 이끌 위험이 있고 그것이 나를 구속합니다. 편리하고 깨끗하고 예쁘고 좋음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의 출발점이 바로 감각적 쾌락입니다.

불교의 해탈이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신의 쾌에 대한 추구, 좋음에 대한 추구를 멈추는 것, 지금까지의 업을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자연스럽게 쾌와 불쾌를 느끼는데 그 느낌 자체를 버리려면 감관을 수호해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감각적 쾌락은 증식만 있을 뿐 멈춰지지 않습니다. 끊어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감각 기관이 표상에 물들어서 끌려다니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서는 선택지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삶이 심플하면 위험도 심플해지고 번뇌도 심플해집니다. 삶의 방식과 번뇌가 같이 가는 것이죠. 불교는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는데 애욕의 쾌락, 환희에 있는 자들은 연기법을 볼 수 없습니다. 무엇에 애착하는 상태에서는 결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데 애욕에 의한 조작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깨달을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감각적 쾌락처럼 추구할수록 구속되고 중독 상태로 몰고 가는 기쁨이 아니라 감관을 수호했을 때 발생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승가공동체 생활을 하거나 걸식, 삭발을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수행자적 삶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란 有, 있음, 영원주의, 이상주의를 말하고 비존재란 無, 없음, 허무주의를 말합니다. 있음에 매달리는 것은 쾌를 갈망하는 것이고, 없음에 매달리는 것은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1세기에 새롭게 생겨난 묻지마 범죄는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타자를 견디지 못해서,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을 무조건 제거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되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제한을 가하는 어떤 것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은 승가공동체의 생활과 대비됩니다. 삭발과 승복, 걸식을 하는 승가공동체의 계율에 묶인 생활이 자유를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관을 수호하고 공동체 안에서 계율을 지키는 행위 자체가 자기 자신의 제한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자유에 이르게 합니다.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제한이 없는 상태가 자유로울 거라는 것은 전도된 생각이죠. 어떤 제한도 없는 상태가 가장 구속적인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가 아닐까 합니다. 존재, 영원주의에 대한 욕망도 비존재, 허무주의에 대한 욕망도 지금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부처님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넘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개의 고원>

네 번째 고원의 제목은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1923년 11월 20일 입니다. 언어는 이러할 것이라고 전제되어있던 공리들을 깨고 있습니다.

-언어는 정보전달과 의사소통에 관련되어 있으리라.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그것에 대응하는 언어가 있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말할 때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의미가 들어있다고 보는 것이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는 지시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언어를 물체의 차원과 비물체의 차원으로 나눈 스토아학파의 언어관과 연관됩니다. 스토아학파는 물체적 세계는 선악이 없는 자연의 세계, 무의미의 세계로 보았고(칼에 찔렸을 때, 칼+피부=피), 물체적 차원의 표면에 언어적 명명이 더해지는 순간(칼+피부=살인) 비물체적 차원의 변형(살인자와 피해자가 생겨남)이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언어는 물체적 차원을 지시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적 차원을 언어로 규정함과 동시에 비물체적 차원에서 변형하는 효과를 갖습니다. 언어와 물체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만 물체적 차원에 들러붙어서 물체적인 것을 변형합니다. 판사가 사형을 구형하는 순간 피고는 사형수가 되는데 물체적 차원의 사람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선고와 동시에 그는 피고에서 사형수로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납니다.

언어는 중립적인 것도 아니고 지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언어는 작동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는가, 이를 들뢰즈는 표면효과라고 합니다. 말해지는 순간 새로운 의미를 출현시키는 것이죠. 후회의 언어로 자기 삶을 규정하는 순간 삶은 그냥 삶일 뿐인데도 삶 자체가 잘못 살아온 삶으로 의미지어 집니다. 명명하는 순간 물체적인 세계에 의미를 형성하게 됩니다. 말은 단순한 지시체나 거울이 아닌 것입니다.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정치적 우파와 좌파는 만들어내는 언어가 서로 다르고 의미화가 다른 것이지 맞고 틀리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자 언어화하는 방식에 따라 세계가 드러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가 구축한 이 세계가 언어로 가설된 것이라 하신 말씀과 통하는 부분입니다. 언어적 분별을 갖고 있기에 그 분별을 따라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세계 자체가 분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언어 자체가 세계가 아닌데도 우리는 번번이 언어로 규정하는 순간 규정에 해당하는 대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명하는 순간 물체적 표면에서 의미가 형성된다는 것, 물체적 상태의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은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 맥락이 전부이며 상황조건, 인연조건, 사회적 조건을 벗어나서 언어 그 자체란 없음을 의미합니다.

자유간접화법 : 우리는 자신이 하는 말은 모두 직접화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하는 말들은 전부 어디서 들은 누군가의 말들입니다.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들을 다시 할 뿐이라는 의미에서 간접화법이라고 합니다. 개인적 언표는 없습니다. 내가 내말을 하더라도 순수한 나의 말이란 있을 수 없고 모든 목소리는 이미 사회적인 것이며 순수한 자기의 생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 발화란 없고 모든 발화는 집단적입니다.

- 언어는 다수어나 표준어라는 조건하에서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다수어는 표준어를 말하는데 그것이 수적으로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배적인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다수적 사용이란 지배적으로 규정된 의미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어떤 집단을 대변하기 위해 사용하거나 클리셰로 구태의연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소수는 탈주, 달아남이 핵심입니다. 기존의 표준들을 오작동 시키거나 고장 내는 방식으로 달아나는 것입니다. 체코에서 사는 귀화한 독일인이었던 카프카는 기존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삶이었기에 기존의 언어에서 달아난 소수적 언어의 글쓰기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수적 사용은 내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탈주하는 삶일 때 나오는 비명 같은 것입니다. 영토에서 달아나면서 탈영토화되고 거기서 재영토화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탈주하는 과정을 멈추지 않는 것이 소수적인 것입니다.

모든 언어는 명령어입니다.(명령어 : 말은 행위를 수반한다는 것. 누군가의 말을 수긍하든 반발하든 행위를 부른다.) 그 명령어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달아날 것인가. 들뢰즈 가타리는 부단한 탈주를 말합니다. 탈주가 멈추면 재영토화 됩니다. 부단히 탈주함. 탈의 핵심은 부단함에 있습니다.

 
전체 3

  • 2021-04-22 18:01
    모든 발화가 집단적이라는 말이 엄청나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네요~ ㅎㅎㅎ
    하늘 아래 나의 것이란 없지요. 암요! 생각도 나의 것이 아니고 느낌도 나의 것이 아니고 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울 복희샘이 가벼운 마음으로 일케 깔끔하게 부담없는 후기를 쓰신 것인가?
    이제 더 이상 언어에 붙잡히지 말고 에세이도, 공통과제도 내 상황과 조건에 맞는 말로 부담 없이 샤샤샥!! 써야겠어요 ㅋㅋㅋ
    그런데....'명명하는 순간 물체적 표면에서 의미가 형성된다는' 이 말이 또 찌끔 걸리네~~^^

  • 2021-04-22 20:09
    크흑 감각적 쾌락은 끊어내는수밖에는......ㅜ^ㅜ 부단히 끊어내보겠습니다!!!!>.

  • 2021-04-22 23:19
    감쾌를 마음껏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는 상태가 오히려 구속을 만들고, 감쾌를 향한 욕망에 제한을 둠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로움을 준다는 역설!
    찬찬한 후기 덕분에 다시 한번 지난 시간 공부 내용을 되새겨 봅니다. 감사해요, 보키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