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4월 12일 불교와 글쓰기 후기

작성자
경아
작성일
2021-04-13 17:13
조회
2654
불교와 글쓰기 2021.04.12 후기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수면 명상을 같이 해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깜빡 잠드셨다 깨시기도 하고, 푹 주무셔서 너무 해피하셨다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는 분명 잠들지 않았는데 명상을 마치는 신호에는 확 깨어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명상 후 『숫타니파타』를 소리 내어 같이 낭송하는데 벌써 끝까지 완독하고 다시 첫 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같이 읽기도 하고 과제하느라 혼자 읽기도 하고 지영샘의 암송으로도 듣기도 하면서 여러 번 반복해서인지 다시 읽는 구절들이 친구를 또 만난 듯 반갑더라구요.

<자기주도학습>

이번 학기에는 부처와 나의 만남, 불교와 나의 만남에 대해 글을 쓰기위한 준비로서 각자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하며 준비 과정 중입니다. 아직 정확한 주제와 방향들이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새로 합류하신 선생님들은 고성제苦聖蹄에 대해서 공부할 계획이십니다. 부처님의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의 출발점이자 전제가 고성제이기 때문에 이 전제를 확실히 알고가야 다음으로 넘어가겠죠. 물론 이미 공부해오던 저희들도 무상, 무아, 공 세트를 매번 말하면서도 “세계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런데 ‘세계는 원래 무상한 것 아니야 왜 괴롭지’라는 습관적인 패턴의 사고가 바로 작동합니다. 무상하기에 괴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상한 것이 자연의 이치이거늘 그것이 괴롭다는 것은 허무주의적 아닌가 등등. 지금의 생활을 ‘그럭저럭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고성제가 잘 다가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족이란 말에는 불만족이 전제되니 이미 어떤 이상향을 설정한 것이고 그게 깨지는 것이 두렵고 불안한 것, 그게 고가 아닐까라는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모두들 부처님이 苦라고 말하신 두카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가 불교 공부의 핵심이자 기본이 될 것 같다고 입을 모으셨네요. 그래서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사성제&팔정도 집중세미나에서 심도 있는 논의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부처님이 지녔던 문제의식과 가르침이 어떤 사상적 맥락과 배경에서 나왔는지 그 발생적 차원을 정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우파니샤드와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예정입니다. 우파니샤드 경전을 읽기 전에 개론서를 정리 중인데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합일을 스피노자의 신과 양태의 개념과 비교하면서 정리해보는 것도 재미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유한한 개체성을 벗어나면 그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라고 하는데, 불교의 무아도 모든 것과 연결된 나, 우주적 나로의 확장으로 해석하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우파니샤드 경전을 읽으면서 정리할 계획입니다. 『바가바드 기타』를 상세히 정리 해오신 분도 계십니다. 『바가바드 기타』는 『일리아드』 『오디세이아』에 비교되는 『마하바리타』 중 일부분을 따로 모아놓은 인도의 가장 대중적인 경전입니다. 왕권을 놓고 사촌들 간에 벌어진 전쟁을 배경으로 고대 인도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 했던 영적, 사상적 전통을 종합한 서사시입니다. 실제 경전 내용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합니다. 감각적 쾌락, 이원성으로부터 해방, 윤회, 고통, 죽음, 신분의 평등, 수행방법들이 제시되는데 이 주제들이 불교에서 어떻게 전승되거나 변화되는지 살펴볼 계획이라고 합니다. 다른 두 분은 우연히도 같은 책 『불교의 체계적 이해』를 정리해 오셨습니다. 불교팀이 주로 대승경전을 읽어왔기 때문에 중간에 합류하신 분들은 불교개론서들을 따로 찬찬히 보실 기회가 없으셔서 이번 기회에 불교의 개념들을 정리하실 계획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분은 불교 공부를 하면서 본인이 자각한 변화들을 가족에게 설명하는 마음으로 써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동요되었던 마음에서 많이 벗어났고 우월이나 열등이라는 분별적 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게된 것, 자유와 의지를 실체적으로 보는 습관들에 대한 생각들을 꼼꼼히^^ 정리하실 계획을 밝히셨습니다. 이제 모두들 슬슬 메인 텍스트들을 정하고 문어발을 거두어 들여 주제를 좁혀나가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천개의 고원> 4. 19231120: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전제1. 언어는 정보전달과 의사소통에 관련되어 있으리라.  전제2 .어떤 “외부적” 요소에도 호소하지 않는 랑그라는 추상적인 기계가 있으리라.  전제3. 랑그를 등질적 체계로 정의하도록 하는 상수나 보편자가 존재하리라. 전제4. 언어는 다수어나 표준어라는 조건하에서만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언표행위, 명령어, 잉여, 집단적 배치물

4장에서 깨려는 언어의 기본 전제들은  4가지입니다. 우선 언어는 정보전달과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어의 기초 단위인 언표는 명령어이다.”(147쪽)이란 말을 통해 언표로 표현된 것은 정보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복종하거나 복종시키기 위해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엄마에게 “사랑해”라고 말할 때는 ‘미안하니까 봐주세요!’라는 완곡한 명령이고, 마트에서 “고객님 사랑합니다~”는 지갑을 열어달라는 명령이라는 것이죠. 언어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어떤 영향을 주고자하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그때 정보는 명령을 위한 최소 조건일 뿐입니다. 질문, 약속도 명령어입니다. 명령어는 잉여라고 합니다. 이 잉여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정리가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명령이 언어의 정보소통을 넘어서 기능하기 때문에 잉여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개인적 언표행위는 없습니다. 언표행위는 집단적 배치물로 설명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한다.’처럼 주체-행위 쌍으로 연결되는 문법은 직접화법이 일차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우리의 언표행위는 나라는 집단적 배치물을 통해 드러나므로 기본이 간접화법입니다. 들뢰즈의 저작들을 보면 이것이 칸트의 주장인지 칸트를 비판하는 들뢰즈의 시점인지 헷갈리는데 그래서 자유간접화법이라 하는 듯합니다. 어느 누구의 말 한마디도 그 사람으로부터 오롯이 나왔다고 할 수 없지요.

명령어, 집단적 배치물, 또는 기호 체제는 언어와 혼동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언어의 조건이다.(표현의 초선형성) 그것들은 매번 조건을 채운다. 그것들이 없다면 언어는 순수한 잠재성으로 남을 것이다.(166)

그럼 친구랑 하는 말도 모두 명령어일까라는 질문이 생각나는데, 모든 언어=명령어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명이나 지시체들은 명령어라고 할 수 없지만 어떤 지시체는 조건에 따라 그 자체로 명령어입니다. 젊은 의사가 중년의 여성들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는 의도는 나이의 위계를 부수고 자신의 전문성을 강조하며 상대를 무지한 환자로, 복종해야하는 주체로 규정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그냥 랑그 자체로 작동하는 언어는 없습니다. 언표는 항상 “명령어, 집단적 배치물, 기호체제”와 함께 작동합니다.

#비물체적 변형

언표와 더불어 잉여를 만들거나 명령어를 만드는 행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야만 집단적 배치물이 실재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명령어를 만드는 언표행위는 특정 사회의 몸체들에 귀속되는 비물체적 변형들의 집합"이라고 정의합니다.

4장에 명시된 날짜는 1923년 11월 20일입니다. 전쟁 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던 독일에서 그 전날까지 버젓이 사용되던 통화가 더 이상 돈이 아니라고 선포된 날입니다. 1923년 11월 20일을 기점으로 화폐가 갑자기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 화폐는 똑같은 종이인데 하루 만에 다른 존재로 규정되어버린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하루 만에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릴만한 조건들은 무르익어왔지만 더 이상 돈이 아니라는 ‘선포’에 의해 비물체적 변형을 겪습니다. “너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라는 말은 그 아이의 신체적 성장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제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복종에의 종속이라는 비물체적 변형입니다. 비물체적 변형이 일어날 조건이 무르익기 위해 시간이 걸리지만 비물체적 변형의 발생 자체의 특징은 순간성, 명령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중분절에서 배운 스토아 학파의 세계관도 나옵니다. 그들은 수동과 능동 작용으로 이루어진 물질의 세계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의 세계로 나눕니다. 칼이 살을 베는 것은 두 물질, 몸체끼리의 만남의 작용입니다. 그것에 자살, 살인과 같은 언표를 덧씌우는 것은 언어의 세계입니다. 수동과 능동의 작용인 몸체들의 혼합을 비물체적 변형(사건)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언어를 통한 의미부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물체적 변형이 몸체 자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비물체적 변형이 몸체의 귀속되면서 몸체에 다른 작용을 만들어냅니다. 조용하던 비행기 안에서 한명의 테러범이 권총을 꺼내며 “모두 손들어!”라는 한마디에 비행기에 있던 사람들은 승객에서 인질로 비물체적 변형을 겪게 됩니다. 이 변형은 역으로 그 비행기 안에서 일어나는 수동적-능동적 행위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언어가 무언가를 규정하지만 그 규정을 통해 표현되는 무언가도 변형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명령어를 피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명령어를 감싸고 있는 사형 선고를 피할 것인가”, “어떻게 명령어의 도주 역량을 펼쳐나갈 것인가?”, “도주가 상상적인 것 안으로 빠져들거나 검은 구멍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언어가 명령전달이라는 것을 통해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면 안 돼...’라는 소극적 도피로서 언어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불교에서도 언어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언어 자체가 분별작용이기에 깨달음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언어를 통하지 않고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명령어로 작동하는 언어를 통해 그것 자체를 도주선으로 만드는 암호풀기, 소수자-되기, 생성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샘의 강의에만 의지하다보면 마치 다 아는 듯 착각에 빠지는 곤 합니다. 그래서 요래 울끼리 장님 돌다리 두들기는 심정으로 미리 이야기 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전체 3

  • 2021-04-13 17:52
    네, 장님 돌다리 두들기는 심정 맞습니다요... 근디 우리가 더듬더듬 토론했던 내용보다 울 경아샘이 요래 총명하게 정리를 해주시니 뭔가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ㅋㅋ

    언어는 소통이나 전달이 아니라 복종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있다는 들/가의 통찰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심판과 사형선고를 내리는 명령어들 속에서 무기력하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도주의 역량을 펼쳐갈 것인가. 2500년 전 부처님도 윤회, 까르마, 신분제 등등.... 이렇게 복종을 요구하는 명령어들 속에서 새로운 도주로를 만드셨었던 게 아닌지! 매번 이렇게 또 다시 부처님을 리스펙~ ^^

  • 2021-04-13 19:30
    책은 읽었으나 뭘 읽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로 갔다가 여러 샘들 덕분에 이것저것 많이 얻어들었네요. 요렇게 후기로 또 한 번 공부합니다. 고맙습니다

  • 2021-04-14 20:54
    저도 경아쌤의 말씀에만 의지하며 착각에 빠지는 건 아닌지..ㅜㅜ 더욱 용맹정진해야겠다는 마음이 불끈!!! 쌤 감사하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