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사성제 팔정도 세미나> 1회 세미나 후기 및 공지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1-04-24 07:49
조회
2773
사성제 팔정도 세미나가 지난 월요일 저녁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시작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네가지 진리와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차근차근 제대로 이해해보자는 마음으로 다들 자리에 모여 앉았습니다. 불교팀에선 할 수 없이 친구따라 온 거라는 분들도 계셨고 (음, 그렇담 아주 좋은 친구를 두신겁니다! ㅎㅎ) 새롭게 규문의 공부에 마음을 내어 일주일에 한 번 세미나로 발걸음을 하며 산만한 일상을 다스리고 싶다는 분도 계셨어요. 여하튼 저희는 열 두 번의 귀한 월요일 저녁을 잡담이 아닌 법담을 나누는 것으로 발심을 했다는 겁니다. ^^

저희의 법담(!)을 이끌어 줄 텍스트는 <달라이라마의 사성제>와 <붓다의 옛길>인데 첫 시간에는 텍스트의 앞부분에 나온 붓다의 일생과 불교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시간이 금세 지나가 버렸습니다. 세미나에서 나누었던 토론 내용을 조금 정리해 보겠습니다.

붓다의 출가

고따마 싯다르타는 샤카족의 왕자로 태어나 왕궁의 풍요로움 속에서 온갖 쾌락을 누리며 살지만 29세라는 젊디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합니다. 세미나 토론에선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을 구족해서 누리던 젊은이가 생노병사를 보고 근원적인 질문을 일으켰을까? 그 마음이 어떻게 출가로 이어졌을까? 하는 질문들이 나왔습니다. 저희가 읽은 텍스트에선 그걸 싯다르타의 연민심과 책임감으로 설명을 했지만 토론에선 당시 고대 인도의 지적 사상적 철학적 배경 또한 영향을 주었을 거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당시 종교와 철학, 사회 시스템의 중심에 있던 베다의 권위가 흔들리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사상들이 쏟아져 나오던 때, 내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젊은 싯다르타도 인간 삶의 조건과 해방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거란 것이죠. 그러고보면 싯다르타가 보았던 사문유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수행자의 모습은 싯다르타에게 그런 삶이야 말로 생로병사의 고통에대한 해답을 구해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구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주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기서 나왔던 또 다른 질문은 싯다르타가 지닌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고통에서의 해방’이라는 문제 의식이었습니다. 토론에서 저희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대충 건너뛰어 버리고 고통을 고통이라고도 자각하지 못하는데, 싯다르타는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세상에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까?” 라는 자신의 근원적 질문을 인간 보편의 문제로 확장시켰다는 얘기를 나누었죠. 싯다르타는 인간인 자신이 실존적으로 마주한 상황을 고통이라고 뼈속 깊이 느꼈기에 출가도 가능했을 겁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 실은 이것이 이후 싯다르타가 붓다가 되어 가르친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입니다. 우리는 왜 고통을 마주하지 않고 회피하는가. 아니, 고통을 고통이라 여기지 못하고 행복이라고 착각하는가...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더 얘기를 나누어 볼 예정입니다.

불교는 종교일까

붓다는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와 상관이 없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구분됩니다. 붓다에겐 어떤 신적 계시가 주어진 것도 아니었고, 초월적 힘에 의지해 구원에 이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붓다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신과 같은 외부의 초월적 매개 없이 궁극의 해탈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죠. 뿐만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이 해탈을 누구나 스스로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해탈은 각자 스스로의 책임에 달렸으며 그렇게 번뇌로부터 의 해방에 이른다면 누구나 붓다와 같은 승리자가 된다고 말이죠.

토론 중에 외부적 의존이 아닌 개인의 실천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불교를 종교라고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붓다의 옛길>에서 삐야다시 테라는 “만약 종교를 신의 힘을 믿고 신의 힘을 숭배하며 의례나 의식을 거행하며,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복종과 숭배를 받을만한 보이지 않는 고도의 힘을 가진 존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불교는 그런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완전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도덕적, 정신적, 지적 수행 방식의 불교는 오히려 ‘삶의 방식’이라는 정의에 더 합당하다는 것이죠. 진리를 구하고 지혜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불교를 ‘철학’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냐 철학이냐의 정의를 떠나 불교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이런 진리와 지혜의 탐구가 단순한 사색적 추론이나 지식의 획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되고 철저히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름아닌 우리가 마주한 고통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붓다가 가르친 8만 4천 법문의 핵심도 결국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에 이를 것인가 였으니까요.

<달라이라마 사성제>에서 달라이라마는 불교를 종교의 맥락에서 말씀하시며 인간에게 착한 마음을 계발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 모든 종교의 힘이라고 말씀하셨죠. 이때 착한 마음이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입니다. 때문에 어떤 종교든 부정적인 사람도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할 수 있게 만들고 이것이 불교뿐 아니라 많은 다양한 종교를 존경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 공감이 갔습니다. 각기 다른 문화적 바탕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불교가 가장 좋은 종교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점도 말입니다. 종교로서의 불교든 철학으로서의 불교든 삶의 방식으로서의 불교든, 어떤 방식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든 중요한 점은 지혜와 자비로 고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겠죠.

불교의 근본 원리

달라이라마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인 사성제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불교의 중요한 근본원리인 연기법과 자비심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연기를 이해하는 것이 지혜이고 그렇게 지혜를 통찰한 자들이 취하는 행동을 자비라고 하죠.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를 단번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저희는 달라이라마의 연기에 대한 가르침을 읽으며 일단 그 정의를 외워서라도 이해하려 노력해보겠다고 얘기했는데요. ^^ 일단 달라이라마가 말씀하신 정의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연기란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여러 원인과 조건이 서로 작용한 결과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달라이라마의 말씀에 따르면 여기에는 중요한 두 가지 가능성이 부정되는데요, 첫째는 모든 존재가 원인과 조건 없이 무(無)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부정되는 것이고, 둘째는 초월적 창조자가 있어 만물을 만들었다는 가능성을 부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물과 사건을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로 보는 뿌리 깊은 습관을 지니고 있지만 연기의 진리로 통찰한다면 실은 그 어떤 것도 상호 의존적 작용에 의해 발생한 일시적 반응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가 아니죠. 사물들은 경험적으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독립되고 고유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을 찬찬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해 갖는 감정적 반응도 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외부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죠. 우리가 독립적 실체라고 여기는 모든 것, 그러니까 외부의 사물들 뿐아니라 우리의 몸과 감정, 생각등 이 모든 것이 아주 생생하게 여겨진다 하더라도 실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 가르침을 계속 사유하고 또 사유해봐야 할 것 같죠.

연기라는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사성제의 가르침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여  연기에 대한 부분을 여러 번 다시 읽고 생각해본 후 다음 시간엔 “괴로움의 진리 (苦聖蹄)”에 대해 본격적으로 토론해 보기로 했습니다.

<4월 26일, 2회 세미나 공지>

<붓다의 옛길> 64- 90쪽, <달라이라마 사성제> 51-85쪽을 읽어오세요.
훈샘과 호정샘께서 입발제를 맡아주셨고, 미숙샘께서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주기로 했습니다.

월욜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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