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경 하나님의 그물의 경 후기

작성자
정은하
작성일
2016-09-18 15:03
조회
3656
빨리 후기를 작성했어야 하는데, 일주일이 지나 작성하려니 벌써 많은 것이 제 기억에서 사라졌네요.

기억나는 데까지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일단 디가니까야 경에 대한 첫 인상은 대체적으로 어렵다라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경과는 서술 방식도 많이 다르고 내용도 방대해서 읽고 어느 부문에 강조점을 두어 읽고,

어떤 주제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기 어려웠다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써온 공통과제들을 위주로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가장 많은 질문과 이야기들이 나왔던 것이, 새로 오신 경덕샘의 글이었습니다.

특히 "여래는 몸에서 존재로 이끄는 밧줄을 끊었다. 몸이 지속하는 한, 신들과 인간들은 그것을 본다.

몸이 부수어지고 목숨이 다하면, 신들과 인간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라는 경구에서

몸과 '몸을 본다'라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여러 의견이 나왔습니다.

경덕샘은 처음에 '신체적 몸의 죽음'의 상태를 수반하는 열반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이후 ‘매순간의 죽음(?)을 통하여 갈애상태를 초월’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이후 토론에서는 몸을 단순히 ‘신체적 몸’의 소멸상태, 즉 무여열반과 같은 상태를 강조하기 위한 경구는 아닌 것같다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책 앞의 해제에서 유여열반과 무여열반 사이 어떤 위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와있을 뿐더러, ‘몸, 존재’ 라는 것 자체를 선험적이고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접촉, 갈애, 분별, 집착을 통해서 생성되고 만들어지는 대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또는 ‘몸을 본다’라는 행위를 ‘타인의 시선(칭찬과 비난)’에 얽매여서 그것에 집착하는 존재를 의미하고, 그러한 시선에서 자유로와 지는 상태를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불교에서는 자타의 구분과 경계를 두지 않기 때문에, ‘타자를 전제’로 하는 ‘개인의 자유로움’을 논하는 것은 불교적인 방식과는 맞지 않는다는 라는 이야기도 나왔었습니다.

이것 외에,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던 거 같습니다. 은남쌤의 공통과제에서 계행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도 있고, 보리샘 역시 평상시의 마음가짐과 평정을 유지하도록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신자도 아니고 출가자도 아닌 우리들이 일상에서 어떤 노력을 해야 불교의 가르침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까라는 질문들이 나왔었습니다. (항상 도돌이표 질문이기는 합니다. ^^; )

지난 학기 에세이때, 공과 연기에 대해서 일상의 경험의 이야기로 풀어보려 했지만, 막상 글을 쓰려니 한 경험도 제대로 풀어내기 어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적 사상과 개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정리하고 서술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풀어내지 않고서는, 불교의 철학과 개념이 항상 뜬구름과 같은 ‘추상적 관념’으로만 남아있을 것 같아, 좀 더 상세하고 구체적인 경험을 토대로 하는 글쓰기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글쓰기 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라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결국 글을 쓰면서 어떠한 사건과 경험에 대한 이해가 생기기는 하겠지만, 그 관점과 이해방식 역시 자기 경험에 제한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옳은 방법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견해가 접촉해서 발생하듯이, 우리가 하는 공부, 글쓰기 역시 하나의 ‘정신적 접촉’에 지나지 않고, 결국 집착된 견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번 ‘불교와 글쓰기’의 수업의 방식이, 경전의 개념을 구체적 일상의 사건들을 통하여 문제화하고 이해해 보는 것이 목표이지만, 이것이 (지난학기 공통과제에서 많이 해봤듯이) 일상의 소소한 경험과 감상,느낌,단상 들을 불교적 개념과 평이하게 연결해서 풀어버리는 식의 글쓰기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수경샘의 주의사항도 있었습니다.

경험을 이용하되, 그 경험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는 글쓰기가 되어야 하는 것 같은데 참 어렵네요. ^^

그외 이번경을 읽으며 견해를 갖되, 그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점점 들었습니다. 집착하지 않은 상태와 회의주의자와 비슷한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이번 경을 읽으니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기존에는 회의주의자가 단순히 자기 믿음 또는 확신을 항상 의심하는 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견해를 가질 수 없는 무지상태와 비슷하고, 그것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 의견을 유보하는 자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네요.

수경샘이 글에 쓰셨듯이, 보살은 ‘잘 알고, 그것을 잘 설명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실은 사실이라고 이야기가 하고,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닌것이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한데요, 그 앎에 대한 확실성과 집착이 다르게 갈 수가 있는 것인지 점점 모호해지는 느낌입니다.

이상으로 1경의 가장 큰 주제는 ‘모든 견해는 집착하는 한, 그물코에 걸린 물고기가 된다’ 라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립니다.
전체 2

  • 2016-09-18 16:50
    엄머, 글이 늦어져 무슨 일일까 했는데, 쎄끈한(공부하는 자가 이런 말을 써도 될까요? 음, 분별심을 버립시다 ㅋㅋㅋㅋㅋ) 후기를 쓰시느라 그랬나봐요 ^_^ 개인적으로, 지난 시간에 가장 아리송했던 것이 저 마지막의 물음이었어요. 경전을 읽든 다른 공부를 하든 앎에 있어 엄밀함을 추구하는 것이 공부하는 자의 기본인데, 그렇게 엄밀하되 다른 한편으로 집착 없이 그럴 수 있다는 것, 이게 말로야 하려면 또 어떻게 할 수 있겠는데, 뭔가 내가 확 알고 느꼈다는 기분이 아직까진 들지 않네요. 암튼, 내일이네요. 아침에 화사한(..응?) 얼굴로 만나요~

  • 2016-09-19 15:25
    잘 읽고 갑니다! 바깥 독자들(?)을 기억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