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11월 8일 4학기 3주차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11-10 14:54
조회
3085
 

 

난다의 경

오전 법담에서는 난다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리저리 생각이 뻗치는 알쏭달쏭하고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이복동생인 난다는 경국지색이라 불리는 여인과 결혼을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식이 진행 중인 와중에 부처님께서 탁발하러 들어오셔서 난다의 손에 발우를 쥐어주고 휙 돌아가십니다. 부처님을 존경하는 난다는 ‘이거 거둬가셔야 하는데’하며 졸졸 부처님을 따라갑니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왕자님, 제발 바로 돌아오세요’라고 하지요. 승원까지 따라간 난다에게 부처님은 ‘수행승이 되고 싶니?’라고 묻자 난다는 아니라고 하지 못하고 ‘예’라고 해서 삼 일 만에 수행승이 됩니다. 그렇게 수행하던 중 아내가 떠올라 배움을 포기하고 환속하려 시도하지만, 그 환속 부처님의 ‘구족천녀 오백 명’ 파격제안에 만류됩니다. 그리고 동료들의 놀림에 창피해하고 곤혹해하다가 열심히 정진해 깨닫습니다. 그는 ‘감관을 수호하는 님 가운데 제일’이 됩니다.

저희는 ‘구족천녀라는 방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무진장 아름다운 여인들, 인간 경국지색을 ‘코와 귀가 잘린 불구의 원숭이’로 보이게 만드는 엄청난 천녀들이 깨달음의 약속이라니? 뭔가 이상한 듯 하지만, 이런 ‘감각적 쾌락’도 하나의 방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부처님은 천안통으로 난다의 잠재력을 보시고, 깨달음의 코앞까지 온 그가 넘어가고 있지 못한 지점을 건드려주신 것 아닐까요. 이 이야기는 방편에는 제한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한편, 역으로 난다처럼 수승한 경지에 있어도 여자(혹은 감각적 쾌락)에 걸려 넘어질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난다의 솔직함, 그리고 부끄러움이나 동료들의 조롱을 수련의 불방일로 돌리는 근기에 놀랐습니다. 그렇게 널려대면, 우리라면 난다 같기는커녕, ‘간다!’라고 포기해 버렸을 거라는 개그가 기억에 남네요.

“태어남은 부서졌고”라고 난다의 경지를 묘사하는 부분의 주석에서, 그것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뜻하며, 그 말은 원래 ‘다시는 이와 같은 상태에 이르지 않는다’는 의미임 설명해주는 부분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윤회를 생명의 주기가 아니라 마음의 차원에서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난다도 자신의 마음에 윤회하는, 여인의 눈물 젖은 말이 낳는 가슴 아픔에 더 이상 이르지 않게 된 것이겠죠. 난다 님의 이야기를 잘 간직해둬야겠습니다.

 

가뿐하게 사는 것의 어려움

이번 주 <우다나>의 범위에서는 ‘법담이 아니라면 고귀한 침묵’을 권하는 경이 많이 나옵니다. 마치 지금의 우리들 모습을 잘 주는 것처럼, <기술의 경>에서는 수행승들은 어떤 기술이 최고인지 마구 떠들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역시 글 짓는 기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부처님은 “기술을 여의고 가뿐하게 살고 유익을 원하고 감관을 제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중 “가뿐하게 살고”가 저희 법담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주석에는 ‘해야 할 일이 적고,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나오는데요.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음이 늘 번다해서 명상 시간 오 분도 못 내는 걸 보면 어이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돌볼 사람 하나 없는데도요! 그런데 돌봐야할 사람들과 집과 일거리가 많으신 분들은 어떨까요? 거기에 공부까지! 상상해보면 정말 어려울 것 같습니다. 책임을 다하면서도 번다함에 밀리지 않고, 이 일들이 자신이 선택한 바임을 이해하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수행해 나가는 건 가능할까요? 지혜와 집중의 시간이 필요함이 여실히 느껴지지만 책임은 져야 하고,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아직 열자나 유마힐 같은 성인이 아니기에 공부에 더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진중한 호소와 고민이 나왔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이 여러 조언을 하셨는데요. ‘나 또 이렇게 고요하지 못했네’라는 덧붙임이 없으면 낫지 않을까, 이것이 다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문제 아닐까, 어떤 것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며 책임감이 아니라 이게 내가 원했던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워낙 쉽지 않은 문제에 쉽지 않은 제안들이 오가는 자리여서 뾰족한 결론(보통 그렇지만)이 나오진 않았습니다만, 저 역시 더 큰 문제상황을 생각해볼 기회였습니다.

<깟사빠의 경>에서 부처님은 보고 “자신을 부양하고 타인을 부양하지 않는다면, 신들조차 그러한 수행승을 부러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의에서 채운샘은 부양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타인을 부양함은 힘들고 희생적이긴 하지만, 분명히 묘한 기쁨을 주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자식을 키우는 것도, 부모를 모시는 것도, 가족들을 돌보는 것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거기에서 힘을 느끼는 것이죠. 그래서 책임감의 이름으로 혼자서는 안 해도 될 노력들을 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내 자식이나 우리 가족을 위해주기 위해 다른 이들을 등한시하거나 매몰차게 대해야 할 때도 옵니다. 여기의 안녕과 안정을 위해 무언가를 얻어오고 해쳐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지 않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채운샘은 유튜브의 클린한 환경의 이면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무언가를 쾌적하게 살리고 보호하고 길러내기 위해서는 어딘가를 외면하고 착취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눈 딱 감고 ‘부양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고 끊어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역시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 외

에세이는 전반적으로 잘 가고 계신 분들, 일단 주욱 자신의 이야기를 더 풀어보시면 좋을 분들, 그리고 주제를 다시 명료하게 잡아야 분(접니다...)들이 있었네요. 저는 돈이라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휘청이는 저 자신에 대해 더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 같아요. 아직도 잘 잡히지만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학술제와 관련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직 뾰족한 주제를 잡지는 못했지만요. 강의에서 들은 ‘연기’ 개념으로, 코로나라는 사태가 우리의 일상 패턴, 생각 패턴과 상호 함축적 관계임을 말해보기라는 이야기로 시작했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너무 커다랗고 원론적인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위드코로나라는 조치를 번뇌와 함께 살기, 알아차림 등으로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치만 조금 정책 옹호적인 느낌이 조금 나기도 합니다. 혹은 코로나 사태에서 우리가 확진자에게 보내는 비판과 혐오의 시선이 얼마나 단선적인 인과인가에 대한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단지 불안의 해소구를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구요. 다음 주에 더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가장 큰 성과는 학술제 발표를 지혜제일 경아샘께서 맡아주신 것입니다!

이만 후기를 마쳐요~

 

 

 
전체 1

  • 2021-11-11 20:08
    민호샘 평소 공덕을 생각하면 글도 다른 일도 잘 풀리실 거에요. 많이 웃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