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11월 27일 4학기 6주차 후기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21-12-03 07:51
조회
3615
불교와 글쓰기 4학기 6주차 후기입니다.

 
  1. 명상 & 요가

이번 주는 몸이 아프신 윤지샘을 대신해 미숙 반장님의 진행으로 자유 명상과 요가를 했습니다. 명상에 진전이 있는 분들도 있고 잡념과 의혹, 혼침에 해맸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나누기 중 모두 공감했던 이야기는 혼자 할 때와 함께 할 때 집중도의 차이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헤매기 파인데 함께 할 때는 간혹 미약하나마 진전이 있습니다.

저는 잡념에서 명상 주제로 돌아갈 때, 자책하다 긴장한 채로 다시 명상하곤 했습니다. 요즘은 당연하게 ‘잡념이 올라왔구나, 00 명상하던 중이었지.’하며 돌아가곤 합니다. 그래도 긴장이나 자책이 전혀 없진 않아요.

문득 얼마 전 밍규르 린포체님의 설법이 떠올랐습니다. 명상 전 두 가지 바른 태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는 바른 자세와 바른 마음가짐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한다는 건 너무 느슨하지도 너무 긴장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척추를 느슨하지만 곧게 핀다’고 하지요. 이는 혼침이나 들뜸에 빠지지 않기 위한 자세입니다. 다음으로 바른 마음가짐은 나에게 훌륭한 본성이 이미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린포체님이 찰떡같이 쉽고 재미있는 비유를 해주셨는데요, 컵이 본래 깨끗하다고 알아야 컵을 닦을 마음을 낸다는 이야기입니다. 듣자마자 무릎을 탁 쳤어요. 근데 고새 까먹고...

평소 혼자 하던 대로 하면 휘뚜루마뚜루 지나갔을 텐데, 이번 주는 고요한 분위기에 새삼 위의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저는 그저 ‘시간 되었으니 어서 명상해야지,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잘 해야지!’ 하는 마음만으로 하고 있더라구요. 앞으로 긴장감과 조급함이 일어날 때, 바른 자세와 바른 마음가짐을 기억하며 명상해봐야겠습니다. 새긴다는 건 이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2.우다나 낭송 및 토론 & 채운샘 강의

부처님이 말년에 아난다와 함께 여기저기 떠돌던 어느 날, 그동안 설법을 하러 다녔던 장소들을 하나하나 찬탄하다가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가지 신통을 성취한 자는 원한다면 한 우주기를 머물 수 있다’고요. 한 우주기에 대한 설은 다양한데, 여기서는 인간의 수명인 120세를 뜻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나는 내 수명을 조절 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난다가 암기 제일이긴 하나 부처님 사후에 깨닫기도 했고 종종 분란과 연과된 에피소드에 등장하며 이해력이 부족한 캐리터로 묘사된다는 점, 그러나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부처님을 시봉했다는 점 등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주석에는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경계토록하기 위한 말이라고 하는데, 무엇에 대한 경계였을까요.

저는 최선을 다해 스승을 보필한 아난다의 마음은 갸륵하지만, 깨달음의 관점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보시나 성자에 대한 친밀감만으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고,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요. 제자의 집착과 어리석음을 경계하기 위한 부처님의 말씀을 끝내 알아듣지 못한 아난다가 안타깝다는 말도 깊이 공감되었습니다.

또 아난다가 부처님이 사신통을 성취해 수명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아난다는 자기 한계 속에서 부처님의 행동을 찬탄하고 존경했지만, 부처님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요. 그런데 사실 우리도 스스로 수명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다만 전통적 농경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천지의 운행에 대한 감각이 지금 우리와 달라, 종종 죽을 때를 아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옛날 이야기처럼 듣기는 하지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이에 채운샘은 불교 수행은 거기서 더 나아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을 통해 자신의 삶 전체를 관장하는 능동성을 가지면 죽음에 대해 두려움보다 죽을 때를 알고 조절하는 힘을 가진다고요. 가령 <달라이 마라, 죽음을 말하나>에서 티벳의 고승들은 전통적으로 수행을 통해 죽음을 나의 외부에서 닥치는 사고라 여기며 두려움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경험할 수 없는 정식적이고 육체적인 변화로서 영적인 진보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고승 중에는 숨을 거둔 뒤에도 오랫동안 신체가 썩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아주 미세한 의식이 이어지며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죽음을 대상으로 한 수행의 큰 틀을 소개해주고 있는데요, 죽음에 관한 수행승들의 연구와 실천은 채운샘이 말씀하셨던 고대철학 중 ‘지성에 의한 이해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윤리의 문제는 같다’고 여기는 불교 철학 태도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3.주제 에세이 코멘트

이번 주 도움을 요청한 세 분을 중심으로 코멘트를 받았습니다.

민호는 메타버스와 자아의 관계를 풀어보고 싶다고 했고 코멘트를 통해 질문이 좀 정리되는 것 같았습니다. 샘들은 오감의 지닌 신체가 있다와 없다로 가상과 현실을 분리하지 말고, 가상이든 현실이든 마음 쓰는 방식이 다르지 않음을 보라고 하셨지요. SNS에 올리는 글과 사진 하나에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는 것처럼요. 여러 샘들의 코멘트를 듣고 민호는 바로 메타버스와 더불어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게 될 것인지, 시공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 듯한 온라인이라는 체계는 왜 해방적이지 않은지, 왜 또 다른 위계와 권력관계가 생기고 집착이 강해지는지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주제를 푼다면, 채운샘의 코멘트처럼 메타버스와 관련해 내가 불편을 느끼는 지점은 무엇인가가 분명히 드러나야 하겠지요.

저는 의존에 대해서 풀고 있는 중입니다. 대상만 바꿔가며 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결국 대상에 대한 의존이라는 건 조금 풀었는데, 거기서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가 라는 부분에서 벙벙하게 마음을 길들인다거나 욕망을 전환한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내가 무엇에 어떻게 의존했는지 질문하며 더 파고들어서 더 좋은 대상을 바라는 마음이 어떻게 불안과 결핍을 낳는지를 정말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어를 가져와 보편적으로 우리는 대상에 집착하며 불안해한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이에 내가 집과 관련해 미적이거나 위생적이거나 혹은 크기이거나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에서 내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이전엔 결핍을 못 느꼈는데 왜 의존하게 되었는지, 풍요가 어떻게 더 많은 의존과 필요를 낳았는지 분석해 보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또 제목 지적도 받았습니다. 추상적인 제목이고 하고자 하는 주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척을 하려고 때, 추상적이 되는 것 같은데...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호정샘은 무소유를 실천하고 유지하는 공동체가 인상적이었고 공동체적 삶에 관해 써보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의식에서 공동체적 삶에 대해 쓰는가가 명확하지 않았어요, 일단 부처님이 말한 무소유는 사유재산 반대가 아니라, 소유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채운샘은 규문 공동체에서 돈을 어떻게 쓰는가를 예로 들어 주셨습니다. 돈을 어떻게 분배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것인가와 직결된다고요. 나의 활동과 연관되어 돈을 써야 축적되거나 잉여가 안 생긴다고요. 또 호정샘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공동체가 어떻다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삶을 살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고 거기서 공동체의 필요성이 나름 도출된다고 하셨어요. 가령 독신으로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살고 싶은가에서 출발해 보라고요.

우리가 지혜와 통찰을 닦는 공부를 한다고 할 때, 출발점은 자신의 고입니다. 내가 겪는 희노애락과 경험적 차원에서 출발해야 하는데요, 우리는 자기 경험에서 시작하라고 하면 그것을 진리화하곤 합니다. 온갖 견해가 생기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각자의 경험에 갇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거죠. 여기까진 얼추 따라가겠는데, 그다음부터는 어려웠습니다. 자기 번뇌를 충분히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긴 한데, 제게는 마치 지구는 핵과 맨틀 등으로 이루어졌다는 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걸까요. 샘은 글을 쓰면서 A를 설명하면 그와 관련해 A’를 설명해야 하고 또 A“를 설명하다가 ‘내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니 글을 쓰지 말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바로 이 자의식을 비워내는 것이 훈련이라고 하셨지요. 모든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다 설명하는 건 실제로 불가능합니다. 그때는 내가 누구한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하려던 이야기만 가지고 가면 됩니다. 물론 구멍이 보이겠지만, 그것은 독자에게 맡기면 된다고 하셨죠. 어떤 비난이나 칭찬에 끄달리는 글이 아니라, 비난과 칭찬을 대하는 내 마음의 분별을 직시하고 그것을 넘어간 지점에서 글쓰기...나의 경험을 진리화하지 않는 것과 누구도 하지 않은 시도 속에서 도출되는 나만의 스타일은 분명히 다를 것 같다고 막연히 추측해 봅니다.

 

   4.들뢰즈 강의

15번째 고원 – 추상 기계

추상 기계는 기존과 다른 힘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의식의 표면에서 이분법적인 분별을 행하지만, 그것을 넘어가 다르게 보고자 하는 욕망도 있습니다. 영토 안에서 그것을 새롭게 구성하는 실험을 통해 탈영토화 되는 건데요. 이러한 욕망의 첨점이 추상 기계라고 합니다.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단순히 기존의 것을 가져와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책에서 본 정견을 그대로 가져와 쓰면 탈영토화의 첨점이 아닙니다. 나는 정견을 어떻게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가 되어야 탈영토화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자리에서 질문을 던지는 거라고 합니다.

반 고흐만의 그림 스타일, 아인슈타인 E=mc² 그리고 부처님의 고에 대한 통찰 등이 바로 그들의 추상 기계입니다. 당연하게 여긴 것이 진짜 당연한지,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이런저런 분별을 하는지 다르게 질문하고 시도하는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된 결과가 그림으로 공식으로 드러난 거라고 하셨습니다.

추상 기계 강의 때 특히 힘이 딸려 집중을 못했더니 구멍이 많습니다. 샘들은 후기 쓸 것이 많지 않은 거 같다고 걱정해주셨는데 쓰다 보니, 할 말이 많네요. 부족한 부분과 과한부분 투성이지만, 더 늘어지기 전에 이만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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