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11월 22일 4학기 5주차 후기

작성자
경아
작성일
2021-11-25 22:53
조회
3341
불교와 글쓰기 4학기 5주차 11월22일 후기

1. 우다나 낭송 및 토론

제5품 쏘나의 품을 같이 낭송하고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나병환자 쑵빠붓다는 대중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저기 가면 음식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찾아들어갑니다. 가보니 음식은 없고 대중들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쑵빠붓다는 음식이 없으니 가버린 것이 아니라 ‘나는 가르침을 듣겠다.’라는 의지를 냅니다. 저는 처음 이 경을 읽을 때 쑵빠붓다의 이 단호한 의지가 좀 의아했습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의지를 냈을까? 쑵빠붓다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무언가 이익이 되는 것들이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동네 잔치처럼 말이죠. 그런데 음식이나 물질적 보상이 없음에도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설법을 듣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나 봅니다. 음식도 없는 이곳에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모였을까? 라는 호기심이 생겼을 것 같기도 하고 음식이 없음에도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며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마음이 동했을 듯도 합니다.

그렇게 법문을 들을 준비가 된 쑵빠붓다를 알아보신 부처님의 맞춤형 법문을 듣고 쑵빠붓다는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자리를 떠나서 얼마 되지 않아 쑵빠붓다는 암소에 받혀 목숨을 빼앗깁니다. 불경에는 이렇게 깨닫자마자 혹은 많은 보시를 하고 바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옛이야기나 드라마에서는 착한 일을 하면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인데 말이죠. 그래서 수행승들이 부처님께 묻습니다. 깨달은 후 바로 죽는 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패턴의 서사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깨달음을 좋음, 죽음을 피해야할 것으로 분별하기에 두 사건의 인과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우리의 분별을 짚어주기도 하고, 죽음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른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행승들이 물을 때 부처님은 종종 죽은 사람의 전생의 업을 이야기 해주십니다. 어떤 하나의 사건도 우리가 볼 수 있는 단선적인 인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인과만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과 죽음을 일대일 대응으로 보자면 아무 상관없어 보이지만 중중무진의 인과 속에서 보자면 뭐 그리 황망한 일도 아닐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전생의 업을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든 인과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정론일 뿐이죠. 형성력으로서의 업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한 행으로 다른 삶이 펼쳐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과거에 매이거나 미래에 저당잡힌 현재가 아닌, 지금이 전부인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그 한 행으로 과거가 해방되고 다른 미래가 분기합니다. 하나의 에피소드에서도 도반들 각자가 고민하는 지점, 겪고 있는 일들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사이좋은 왕과 왕비 말리까의 이야기입니다. 서로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가를 묻는데 둘 다 아주 쿨하게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부처님께서는 “자기가 그렇게 소중하니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 되리.”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해치면 안 된다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언뜻 모순처럼 보인다. 상식 선에서 볼 때 나와 네가 다른 실체일 때 이기적인 것은 이타적일 수 없습니다. 공자님은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 하셨답니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죠. 그런데 보통 우리는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안하는 것보다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에게 권하고 강요할 때가 많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친다 생각할 때는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자기를 좀 돌아봅니다. 그런데 좋은 걸 해준다고 생각할 때는 그걸 전혀 강요라고 생각하지 못하거니와 그걸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 서운한 마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의보다 어쩌면 우리는 선의를 가질 때 그 폭력성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 폭력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장자에서 숙과 홀이 은혜를 갚는다고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주었는데 그 선의가 바로 혼돈을 죽게 만듭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주었을 때 상대에게 그것이 꼭 좋으라는 법도 없거니와 상대가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지 않으면 급서운해지기도 하죠.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말은 소극적 윤리처럼 보이지만, 존재론적으로 각자의 본성, 코나투스를 펼치고 있음을 인정하는 긍정의 적극적인 윤리입니다. 이런 다른 본성들인데, 내 입장에서 좋은 것이 다른 이에게 좋은 것일 수 없습니다. 단지 다른 것의 본성을 해치지 않는 것 살려고 하는 의지를 꺽지 않는 것이 그들의 본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본성이란 실체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독특한 실재로서 각자의 역량을 펼치는 그 자체입니다.

2. 효암스님 덕담

내년 규문에서 불교 공부를 이끌어주실 효암스님과 인사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스님께서 저희에게 각자 한마디로 불교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으셔서 저희는 마음공부, 지금 여기를 사는 것, 행복하고자 하는 노력, 어렵다 등등이라고 답했습니다. 달라이라마 존자님께서는 불교를 행복의 기술(art of happiness)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매순간을 행복하기 위한, 우리의 마음을 보기 위한 하나의 테크닉이라는 겁니다. 테크닉은 그냥 숙련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서만 몸에 달라붙습니다. 천 명의 대중이 있다면 천 명의 불교가 있다고 합니다. 불교를 세상을 이해하는 철학 선에서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종교라는 신해信解로 받아들일 것일까를 결정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각자 가야할 길이 갈라진다고요. 이미 먼저 가신 분들이 길과 방법을 보여주었지만 각자의 길은 각자가 개척해서 갈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공부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자기 실수를 내보이는 것이 우리 공부의 보시행입니다. 마을과 대가족 공동체가 사라진 요즘은 다른 사람의 실수나 실패를 통해 배우는 기회들이 사라져 한 번의 실수를 치명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공부를 통해 서로의 실수를 용감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다른 사람이 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게 도와줄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실수나 단점을 숨기려고 할수록 그것은 깊은 상처가 되며 자기를 과잉보호하는 것입니다. 손을 베었을 때 아픈 줄 모르다가 벤 사실을 아는 순간 통증이 밀려온다고 합니다. 어떤 사건을 겪어도 그것을 가볍게 보낼 때 깊은 상흔이 남지 않습니다. 그러니 공부를 통해 내 실수를 드러내는 것은 나를 위하는 길이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을 위하는 자리이타행입니다. 더 이상은 스포일러라 내년 불교 공부하러 오시면 티벳불교의 정수를 스님께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3. <천 개의 고원> 강의

까마득하지만 7고원 얼굴성에서 “탈영화의 정리들 또는 기계적 명제들”을 공부했더랬습니다.

제1정리 : 혼자서는 결코 탈영토화될 수 없다. 적어도 두 개의 항, 손-사용대상, 입-가슴, 얼굴-풍경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 개의 항들 각각은 다른 항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제2정리 : 탈영토화의 두 요소나 운동에서 가장 빠른 것이 반드시 가장 강렬하거나 가장 탈영토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탈영토화의 강렬함은 운동이나 전개 속도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 다.


제3정리 : 가장 탈영토화되지 않은 것은 가장 탈영토화된 것 위에서 재영토화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대적인 탈영토화들(탈코드화)은 이런 저런 점에서 절대적인 탈영토화(덧코드화)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제4정리 : 따라서 추상적인 기계는 그것이 생산하는 얼굴 안뿐만 아니라 몸체의 부분들, 의복들,
그것이 (유사성의 조직화가 아니라) 이성의 질서에 따라 얼굴화하는 대상들 안에서 다양한 정도로 실행된다.


흑흑 천개의 고원을 읽었으면 적어도 탈영토화는 알아야한다고 하나, 사실 저는 탈영토화라는 개념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딱 잡히지가 않습니다. 영토는 어떤 사유 없이도 작동할 수 있는 업과 습, 코드가 작동하는 영역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얼굴이 되는 것은 몸체로부터의 절대적 탈영토화인데, 이때 얼굴만 탈영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동물의 머리에서 인간의 얼굴이 분리되고 직립보행하면서 앞발이 손으로 탈영토화됩니다. 인간에게 얼굴이라는 상징이 생기면서 ‘옷이 네 얼굴이다.’라는 말처럼 집, 물품, 물건, 의복 등의 사용대상도 얼굴화되는 것이 상대적 탈영토화입니다. 그런데 이 상대적 탈영토화는 사실 절대적 탈영토화 위의 재영토화입니다. 얼굴로 탈영토화된 위에서, 즉 얼굴이라는 것이 생긴 후 다른 것들도 얼굴화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얼굴화의 추상적인 기계’가 접속하는 어떤 대상이든지 얼굴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겠지요. 얼굴과 동물의 머리는 어떻게 다를까요? 동물들은 상대의 눈코입의 표정을 살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몸동작이나 다른 청각이나 후각 등 각자 가장 잘 발달된 감각을 사용할 텐데, 우리는 서로 얼굴 표정을 먼저 살핍니다. 이렇듯 얼굴은 어떤 실재가 의도하는 것을 읽어내는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장입니다. 그러니까 얼굴화하는 추상적인 기계는 의미생성과 주체화 작용을 실행하며 그 대상을 얼굴로 만듭니다. 몸체에서 분리된 얼굴이라는 절대적 탈영토화로부터 작동되는 다른 대상들의 상대적 탈영토화는 결국은 절대적 탈영토화 위에 재영토화입니다. 요것이 정리1에서 정리4까지 말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 절대적 탈영토화와 상대적 탈영토화가 우리 삶의 실천적 지점과 어찌 연결될지 아직 혼미합니다.

마지막 장인 15장 탈영토화의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절대적 D(탈영토화의 기능)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절대란 결코 초월적인 것이나 미분화된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또 절대는 주어진(상대적인) 모든 양을 넘어선 하나의 양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는 오직 상대적 운동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운동 유형을 표현할 뿐이다. 어떤 운동이 절대적일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양하다고 여겨진 하나의몸체를 매끈한 공간에 관련시킬 때인데, 이때 이 몸체는 이 공간을 소용돌이치는 방식으로 차지한다. 어떤 운동이 상대적인 때는 운동의 양과 속도가 어떻든 <하나>로 여겨진 몸체를 홈이 패인 공간에 관련시킬 때인데, 이때 몸체는 이 공간 안에서 자리를 바꾸고 또 적어도 잠재적인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직선에 따라 이 공간을 측정한다.”(969쪽)

상대적 탈영토화는 영토를 빠져나와 다시 다른 영토로 재영토화됩니다. 하지만 절대적 탈영토화는 새로운 대지를 창조한다고 합니다. 대지는 규정성을 가진 영토가 아니라 우주에 속해 있으며 인간이 우주의 힘들을 포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재료입니다. 절대적 탈영토화는 재영토화가 아니라 새로운 대지, 하나의 우주의 창조자라니... 음 저에게는 점점 더 뜬구름이 뭉개뭉개 피는 개념입니다.

영토라고 생각하면 물리적 장이 떠오르는데 그것보다는 코드화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듯합니다. 가족이라는 코드가 작동하는 영토, 학교라는 코드가 작동하는 영토 등등. 탈영토화는 어떤 물리적 장을 떠나느냐의 문제는 아니라 그 영토 안에 작동하는 코드 와해, 즉 탈코드화가 관건일듯 싶습니다. 엄마, 아빠, 자식들에게 주어진 코드에 맞추어 작동할 때 스위트 홈이라는 영토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스위트 홈이 어떤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하면 거기서 작동하는 코드들이 원래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핵가족의 역사가 기껏해야 100년도 안됐는데 말이죠. 그 코드들이 와해된다고 물리적 가족이 와해되는 것이 아니라, 스위트 홈이라는 망상이 와해되는 것이겠죠. 주어진 것으로서 가족이라는 망상을 떠나서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깨지고 시도해보는 것.  탈영토화되고 재영토화되는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손톱만큼씩이라도 깨지면서 코드로 규정되지 않는 다른 자리가 되는 차이 자체로서의 운동을 절대적 탈영토화라고 말할 수 있을지... 다음 주에 나머지 4개의 정리 강의 이어갑니다~

제5정리 : 탈영토화는 동시에 생성하는 대변수와 소변수의 공존을 함축하기 때문에 탈영토화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제6정리 : 비대칭적인 이중적 탈영토화는 탈영토화하는 힘과 탈영토화된 힘을 부과할 수 있다.
제7정리 : 탈영토화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표현 역할을 하고, 탈영토화 된 것은 상대적으로 내용 역할을 한다.
제8정리 : 탈영토화의 힘과 속도는 각 배치마다 다르다.
전체 1

  • 2021-11-28 10:16
    내일 월요일을 맞이하여.. 오늘 복습 완료!! ㅎㅎ 감사합니다~~^0^
    내년 티벳불교 피알까지!! 역시 최고!>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