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0월 10일 수업 후기

작성자
동하
작성일
2016-10-17 00:54
조회
3654
10월 10일 많이 늦은 불교세미나 후기입니다

드디어 채운샘과 함께 하는 불교세미나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선 지난 시간 공통과제를 두고 평가를 해주셨는데요. 경전의 토픽 한 가지를 박스 인용하고 그 중에서 하나의 개념을 자신의 key-word로 삼아서(예, 계행, 고귀함..) 이런저런 공부와 연관시켜 자신의 사유로 고민하고 풀어내는 실천방식으로 가도록, 붓다의 말씀을 도그마화하지 말고 어떻게든 내식으로 돌파해나가는 글쓰기를 바란다는 말씀과 함께 이번 학기에 처음 이런 공부를 시작하신 보리샘부터 자신이 선택한 공통과제를 읽고 그에 대한 평가를 들었습니다.

‘잘 살아야 되겠다’ 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설명하면서 돌파하는 것, 언어를 자신의 말로 현재화시키고, 만약 현대사회의 분석해야 한다면 지금 나 자신과 접속할 수 있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사유해본다. 예) 의/식/주를 줄인다=> 소박한 밥상은 무엇인가. 이것 역시 우리가 가진 표상이 있지 않은가. 영양을 철저히 지키려하는 것도 과잉일 수 있다. 등 여러 방식으로 생각해보고 키워드는 반드시 매듭을 짓고 새로운 질문으로 마무리되었으면 하셨어요. 모든 샘들이 격려하는 말씀을 보리샘은 들으셨지요? 초발심의 분발을 보리샘을 통해 보게 되네요. 저는 수경샘이 계속 지적했던 바를 채운샘께 단단히 들었습니다. 개념을 제대로 풀지도 못하고 듬성듬성 뛰어넘고, 성급한 당위의 결론만을 나열하는 글로 붓다의 말씀을 도그마화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요. 후기를 쓰는 지금까지 참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숙고하는 시간을 갖고 찬찬히 설명하는 글이 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은하샘이 쓰신 글이 불교 글쓰기의 표본이라 하셨는데 질문을 정확히 던질 것을 말씀해주셨어요. 은하샘은 계행에 대해 우리사회에서 규율이 작동되는 방식과 연관 지은 공통과제를 쓰셔서 참 신선하다고 생각했어요. 수행차원에서의 불교의 윤리였던 계율과 근대사회의 규율과 차이점에 대한 비교를 좀 더 자세히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고요.

수경샘은 경전자체의 형식과 공부에 대하여 쓰셨는데 무심코 반복되는 경전이 주는 지루함과 대충 읽어버리게 되는 것에서 간과하게 되는 중요한 지점, 매번 다른 에피소드 속에서 새로운 배치 속에서 다른 가르침을 발견해내는 우리에겐 바로 그 읽기가 수행의 다름 아니라는 글을 쓰셨지요. 은남샘은 계행과 지혜, 올바른 새김에 대해 쓰셨고, 현옥샘은 여윔과 선정에 대해 쓰셨는데 채운샘이 말씀하신 것이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죄송@@

글쓰기는 되든 안되든 재해석의 방식으로 노력하기를 당부하셨습니다. 질문이 많았던 경덕샘이 이 좋은 자리에 빠지셔서 아쉬웠고, 이번에 새로이 김범회샘이 오셔서 반가웠습니다.

채운샘은 붓다와 붓다이전의 수행과 앎에 있어서 통일성은 다르지 않았고, 도를 향하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붓다를 혁명적이라 하셨습니다. 존재자체가 이미 업이다, 나의 현존은 미래의 업이므로 지금의 삶에서 인간이 변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도덕 부정론, 윤회청정설, 무인무연론, 회의론, 등 이런 육사외도의 견해는 대체로 허무주의적이며 이런 삶의 태도에서는 지금 현재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자기 문제에서 윤리를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며 연기를 통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 현존을 부정하지 않고 고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붓다의 혁명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요. 승가공동체가 바로 사회에서 탈주하는 삶의 증거가 될 것이고요. 공부를 하는 이유도 지금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고민에 의한 것인데 무엇을 제대로 해야 할까요.

초기경전에 있는 기본개념은 반드시 정리하고 숙지하도록 한다는 말씀은 하셨고요. 그 중 뭐니뭐니해도 핵심은 <연기> <사성제> <팔정도>가 중요하겠지요.연기는 고대 의학담론과 같답니다. ‘어떻게 몸을 보살피며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이니까요. 우리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겠습니다.

사성제(四聖諦) 고집멸도(苦集滅道)-고는 현실의 괴로움으로 육체의 병, 집이란 병의 원인, 멸이란 고가 멸한 병이 쾌차한 건강 상태, 도란 편안한 상태에 도달하는 바른 방법입니다. 고(苦)는 몸과 마음을 편치 않게 함으로 병으로 봅니다. 모든 인간은 ‘고’의 현실에 놓여있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 있고요. 생노병사,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오취온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미운사람과 같이 살아야하는 것,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괴로움, 이 모든 것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괴로움이 바로 8고입니다.

집제- 고의 원인으로 갈애를 말합니다. 지금 현실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늘 결핍되어있다 생각하고 목말라합니다. 자기 욕망을 어떻게 펼쳐 내야하는 것인지 갈증을 유발하는 시대에서 제대로 보는 통찰이 절실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대 자본의 논리와 결합한 기독교와 달리 이 번뇌가 모든 사람에게 경계가 없는 불교는 그래서 탈근대적 성격을 띱니다. 내 스스로의 번뇌, 이 집착, 억매임을 어떻게 끊어내고 갈 것인가, 멸제- 탐, 진, 치가 다 멸하는 상태, 멸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로 가는 길, 어떻게 괴로움을 끊어내고 도(道)로 갈 것인가. 고를 끊어 내가는 과정의 길이 8정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여기서 정견- 존재의 조건을 정확히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가니까야 1장 법망경- 설법은 견해로 시작하는데 왜 정견으로 시작하는가. 인간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갖는 존재입니다. 개인적, 집단적 무의식 등 등. 지금의 견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법망경에는 과거에 대한 견해18개 미래에 대한 견해 44개로 62개의 존재의 그물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놓인 자리에는 무수히 많은 견해가 있는데 법망경에 있는 외도수행자들의 견해들이 마치 내 것처럼 느껴지고 그물에 조여 발버둥치는 것이 현실감이 있었던 이유가 이런 조건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우며, 어리석으며, 그럼에도 갈 길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연기적 조건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조건으로 해서 견해는 체험되고, 새로운 조건이 만들어지고.. 조건을 달리하면 또 견해는 새로워지고... 견해는 조건에서 체험된다고 할 때 그 조건은 우리의 감각기관에서 출발합니다. 육근(안이비설신의), 육경(색성향미촉법), 대상과 감각기관의 접촉과 식(識)의 조건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집멸도 사성제에서 정견이 요구됩니다. 여기서 바르다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자기 조건 속에서의 사유, 연기조건을 깨닫는 것입니다.

3- 계 정 혜

계- 마음과 몸을 조절하는 것. 자기의 번뇌를 번뇌가 아닌 방식으로 멸할 수 있는 방식을 익히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에 좋은 습관을 붙도록 하는 것. (일반사회의 개념-계: 도덕의 의미, 율:법률의 의미에 가깝다. 비구니 328계) 디가니까야 p160 계행의 다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버리고...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을 여의고.. 하루 한 번 식사하고...축적하는 것을 여의었다. 휘황한 놀이와 이야기. 점술과 미신 등 저속한 지식에 빠져있었던 당시 인도계급사회 상황을 고려해 보면 수많은 계율이 있어야 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견해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바라보는 것. 믿음이 철저하면 자연적으로 계도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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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17 09:21
    ㅋㅋ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아- 잠시 후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