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11월 30일 6차시 수업 후기

작성자
미영
작성일
2020-12-04 01:00
조회
3523
불교공부는 과학, 철학, 종교를 아우릅니다. 종교를 더 확장하여 영성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에 영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샘께서는 주역을 빌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주역의 64괘 중 51번째인 진(震)괘는 우레가 쳐서 사물을 진동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기가 지면의 음기를 뚫고 나오는 형상을 본 뜨고 있으며 사계(四季)중 봄을 상징합니다. 겨울에서 봄이 되듯 음에서 양으로 되는 큰 국면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지요. 일상에서 번개가 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중용에 나오는 ‘계신공구(戒愼恐懼)’라는 말로 풀 수 있습니다. 계(戒)란 계율을 말하며 경계하라는 말로 군자나 불교에 귀의한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계속 지켜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신(愼)이란 삼가다, 신중 하라는 의미입니다. 신중하다는 것은 자기의 판단에 대해 확신하지 않고 회의하는 힘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감각에 의한 정보가 기억되는 방식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경험이나 판단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이란 새롭게 들어오는 정보와의 결합과 해체로 항상 유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은 이렇게 밖에 판단할 수 없지만 이것이 절대적일 수 없음을 숙고하고 회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곧 계신(戒愼)이란 자기 스스로가 지켜야 할 태도를 말합니다.

공구(恐懼)는 두려워하다는 것으로 경외심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 두려워해야 할까요? 천둥치고 번개가 칠 때 우리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공포는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그런 자연현상을 신의 분노라고 믿어 서로 불신하고 인간의 삶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주역은 우뢰가 올 때 두려워해야 복을 이룬다고 해석합니다. 깜짝 놀랄만한 상황에서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태도로 임하면 어떠한 위험과 고난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생기는 원인은 우리가 의도하고 계획한대로 세상이 펼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중중무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라 내가 미처 파악할 수 없는 일들이 무시로 일어납니다. 우주의 연기법을 완전하게 아는 자는 부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의 인식으로 인과를 지울 수는 있지만 왜 나의 의도와 상반되게 세상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는 내가 왜 이런 일을 겪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어있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어떤 일에 대해 좌절하고 기대하는 것은 계신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공구(恐懼)는 계신(戒愼)의 전제가 됩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거나 천둥번개 치듯이 완전히 다른 결과가 이어질 때 좌절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공구함이 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면 어떤 대가가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연연하지 않고 계신하며 계속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무상한 세상에서 어떻게 열심히 살지 라는 질문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상하다는 것을 알 때만 지속적으로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좌절과 기대야말로 인간을 병들게 합니다. 좌절한다는 것은 오만한 태도입니다. 세상을 미리 재단했다는 것이며 살아온 삶에 대한 부정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대하기 때문에 좌절하고 좌절하면 또 다른 것에 의존하며 기대하게 되고, 반복되는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한한 연기법 속에 내가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섭대승론』에서는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모든 것들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정보망에 의해서 세상이 현현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 순간의 인지상태만 알 수 있으며 인지시스템과 기억 속에서 내가 어떠했다고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정보들이 결합해서 형성해낸 이미지들만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들을 파악하는 중심인 자기 자신조차 이미지의 생성입니다. 나라는 신체이미지와 다른 것들의 이미지의 단면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미지는 생성의 한 단면이며 우리는 사진을 찍은 듯이 볼 수 있습니다. 단면 단면의 이미지만 가지고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한 순간 찰칵 찍힌 사진들만 있는 것인데 그것들이 움직이는 현상으로 보이는 이유는 마치 영화를 보듯이 순간순간의 흐름을 한 장 한 장의 필름들을 이어 붙이듯이 보기 때문입니다. 사진처럼 절단되는 면들의 연속이 사물이 됩니다. 즉 사물자체가 이미지들의 총합입니다. 영화처럼 우리의 감각은 세상을 거짓된 방식(幻)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불교로 표현하면 무상하고 무한한 순간의 이어짐이 사물, 사건으로 현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시간이 개입하고 기억을 가져오면서 연속해서 움직이는 것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을 실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면들의 연속되는 작용이 하나의 사물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아뢰야식이 이 단면들을 연속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인지공능의 작용인 것이지요.

 

정보를 어떤 것을 중심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장기(贓器)는 이런 감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기의 발달 여부가 치우쳐 있기 때문에 감각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나 판단을 잘 하려면 감각정보를 골고루 다 활용해야 합니다. 어떤 것을 판단하는 감각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의 균형이 잡혀야 감각정보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앎이 신체화되어 있다는 것은 앎이 있는데 이것을 신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앎 자체가 신체가 받아들이는 정보에 기반 해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몸이 치우친 것을 바로 잡지 않으면 계속 하나의 감각에 예민하고 편협한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불교에서는 감각 정보에 치우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어떤 감각작용도 특권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골고루 감각정보가 작용한다면 편협하지 않고 하나의 어떤 감각에 끌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감각에 끌리게끔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기질은 일단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이 생성될 때 에너지의 결합하는 방식이 그 순간에 정해집니다. 에너지의 차원에서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비슷합니다. 다만 그 구성 성분이 결합하는 방식이 다 다를 뿐입니다. 그 다름에 따라 치우치게 정보를 받아들이고 치우진 정보로 치우친 판단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조건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세팅되어 있는 무명의 조건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지혜로 바꾸는 것은 굳어진 에너지의 결합도를 느슨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하나의 에너지의 결합체를 다른 에너지의 결합체들과 관계 맺으며 발현되는 방식을 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을 아뢰야식이 만든 것이라는 보편성만 따지지 말고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식은 식이 어떻게 발현하여 어떤 식으로 현현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자 생긴 것과 다르게 발현 되도록 하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불교는 무엇이든 공(空)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공만 얘기하면 실천적인 지점은 무력해집니다. 공성이 어떤 연기법 속에서 발현되는지를 파악해봐야 합니다.

공은 존재론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내가 이 광대한 우주적 작용에서 아주 미소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활동이 필요합니다. 바로 무의식으로 되새김질하는 활동이지요. 그러려면 의식적으로 ‘나는 없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되뇌고 계속 질문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이 나인가, 먹고 있는 것이 나인가? 이 기쁨이 나인가? 등 큰 감정들이 올라올 때마다 질문을 던지는 일상의 수행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체적 경험이 뭐든 사유훈련을 통해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에 의해 우리에게 익숙한 에너지의 결합도가 다른 에너지들에 의해 끊임없이 교란되며 바뀌는 과정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되어가는 존재, 곧 생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늘 우리 앞에는 어떤 다른 것들과 교류를 활발하게 이어가며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실천의 과정만이 있습니다.
전체 2

  • 2020-12-05 21:42
    한 장 한 장 사진찍힌 이미지를 연결해서 마치 그것이 실재인양 보는 것이 우리의 인지 시스템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일단 내가 보는 것들을 의심하게는 합니다만... 그것이 스크린 위에 올라가 영화로 펼쳐지니 거기에 홀딱 몰입되어 그걸 진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 부처님께서 현대에 살아계셨다면 중생에게 꿈, 메아리, 물속의 달, 아지랑이 같은 비유를 해주실 때 영화도 포함시키지 않으셨을지... ^^

    촘촘함만으로도 누구 썼는지 맞출 수 있는 정성 가득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미영샘~!

  • 2020-12-06 10:37
    세상이 무상하다는 걸 알때 계속 열심히 살 수 있다! 우유에 에이스먹다가 이 말이 가슴에 와서 박히네요..미영쌤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