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3학기 5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1-09-05 00:29
조회
2695
1.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들뢰즈는 하나의 ‘사건’이란 물질적인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의미의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미란 어떤 대상, 어떤 주체 안에 들어 있다거나 특정한 의미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질문하며 물질적, 비물질적 차원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발생합니다. 가령 연구실 책상 위에 부침개 접시가 놓여있다고 합시다. 이 부침개를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생각은 각기 다릅니다. ‘부침개 - 정성 어린 간식 - 맛있음- 기쁨’ 의 계열화로 부침개에 대한 의미를 발생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침개 - 번다한 준비 - 수업에 지각 - 불편함’ 의 계열화로 의미를 발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부침개를 만드는 사건 자체에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것이 없지만, 어떻게 의미화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생겨납니다.

불교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하죠.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 좋거나 괴롭다고 인식하는 것은 그 대상 자체에 좋음 또는 나쁨이 내재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 대상과의 접촉에서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들뢰즈의 표현으로 ‘사건을 의미화’ 하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합니다. 대상이나 사건은 그 자체로 선악도 호불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 사건을 즐거움으로 또는 괴로움으로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상태로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작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건이나 대상을 환호하거나 비난하기에 앞서 그런 식으로 의미화를 하는 내 마음의 작용을 먼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때 주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 작용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검열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자기 검열에선 어떤 외적 잣대를 들이대므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스스로에 대한 죄의식과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불교에서 말하는 알아차림이란 일어나는 마음 작용을 그대로 지켜보고 통찰하는 과정입니다. 올라오는 번뇌를 누르고 억압하거나 혹은 밀쳐내며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일어나는 마음 그 자체를 관찰하고 그 번뇌가 어떤 원인과 조건에서 일어났는가를 분석하고 통찰해 갑니다. 따라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감정 자체의 공(空)한 메커니즘을 보는 것입니다.

아침에 부침개를 부치는 도반을 보고 한 사람은 애쓴다며 도와주고, 또 한 사람은 고소한 냄새가 맛있겠다며 칭찬을 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번다한 간식 말고 간단하게 준비하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우리는 모두 다르게 의미화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의미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감정을 겪습니다.

2. 분별하지 말라 = 제대로 분별하라!

일어나는 감정을 검열이 아닌 알아차림 속에서 바라보고 통찰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라면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의미화를 일으키는 계열화, 그 맥락을 어떻게 볼 것이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의미화란 대상과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이자 분별하는 방식이 아닐까요? 불교 경전에서 분별하지 말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만, 이 분별 가득한 세속을 어떻게 분별하지 말고 살아가라는 건지 더 분별이 올라오곤 했습니다. ㅎㅎ 그런데 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있죠. 분별하지 말라는 것은 실은 제대로 분별하는 것이라고! 이번 수업에서도 이 말씀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에서는 분별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잘 분별을 해야 한다고요. 잘 사유하고, 잘 말하고, 잘 행위하려면 아주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정도(正道)도 실은 제대로 분별해서 바른길을 가는 것이라는 말씀에 공감이 갔습니다. 세상 자체는 분별 되어 있지 않은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별을 하니, 분별을 못 하는 것이라는 말씀도요. 분별은 없다는 냉철한 깨달음 속에서 잘 분별하라! 화를 잘 내셨다는 성철스님이나 지극히 예민하셨다는 법정 스님처럼 큰 스님들은 버럭 화를 내셔도 거기에 감정의 찌꺼기가 남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분별없음에 대한 이해 속에서 분별하여 화를 내셨기 때문이겠죠. 꾸지람을 듣는 당사자도 큰 스님들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있었던 것은 스승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어서이기도 했겠고요.

그럼 함께 공부하는 장에서 도반끼리 서로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희는 매주 함께 모여 명상을 하고 글을 읽고 서로의 글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고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낭송을 합니다. 그뿐입니까. 코로나가 괜찮았던 시절에는 하루 종일 수업을 마치고 나서 뒤풀이까지…. 이렇게 몇 년을 지속할 수 있는 관계란 정말 드물고도 귀한 관계입니다. 하여 서로에게 코멘트를 해주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하고 때로는 마음 깊이 사무치기도 합니다. 저희는 서로의 자질구레한 일상까지 모두 공유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서로의 공부를 지켜보면서 상대가 어떻게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지 혹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매주 글 속에서 상대의 번뇌가 어디서 실마리를 찾았는지 아니면 묵직한 번뇌의 실타래를 여전히 꼭 쥐고 있는지를 봅니다. 각자 우리는 자신이 내려놓지 못하는 번뇌의 지점들, 지독한 습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때로는 부드럽게 얘기해주고, 때로는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도반이 바뀌지 않고 계속 고집스럽게 그 자리를 맴돌고 있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샘께서는 더 단호하고 더 따끔하게 조언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죠. 그만큼이라도 했으니 다행이라고 기특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게 제대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는 관계나 다름이 없다고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안타까워하다가 화를 내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무시하려는 경계에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상황과 맥락, 인연 조건 등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화내거나 포기하는 태도야말로 상대에 대한 분별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이겠죠.

3. 기관 없는 신체, 그것은 하나의 수련이다

선과 절편, 기관 없는 신체와 유기체, 리좀과 나무, 고른판과 지층... 천 개의 고원에는 대립적으로 보이는 여러 두 항들이 등장합니다. 이 두 개의 항들은 극단적 경향성을 보여주지만, 우리가 속한 배치는 언제나 이 두 경향성 사이에 있다고 하죠. 모든 것은 이 극단의 두 경향성 속에서 역동적인 흐름으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주어진 being 아니라 언제나 되어가는 becoming! 이것은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불교의 사유와도 통하는 부분이죠. 어떤 것으로 고정적으로 주어진 것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공부를 하는 장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렇고 그런 존재로 규정된 채로 있지 않습니다. 공부하는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의 주고받음 속에 우리는 어떤 경향성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서로에게 조건이자 becoming 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랜 고질적 습관을 버리지 않고 켜켜이 지층화의 경향성으로 가려는 도반에게 ‘그래도 그 정도 하니 다행’이라고 하는 것이 격려일 수 없는 것이겠죠. 그렇게 된다면 그 도반의 지층을 형성하게 하는 조건 속에 다름 아닌 우리도 함께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관계 속에서도 계속 같은 기운만을 반복해서 쓴다면 우리는 하나의 기능에만 충실한 유기체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기관 없는 신체가 ‘수련’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신과 타인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르게 시도해보고 실험해 보라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련을 하지 않으면 고착된 어떤 것도 절대 변환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 자신의 공부도, 여럿이 함께 하는 공부의 장에 있음도, 도반과의 관계도 모두 수련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려워 말고, 명료하다고 모든 것을 쉽게 판단하지 말고, 어느 지점에 올라왔다고 우쭐하여 머물지 말고, 더 이상 귀찮다고 물러서지 말고... 우리는 공부에서도 관계에서도 계속 이런 실험과 수련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체 2

  • 2021-09-05 16:28
    서로 익숙해진만큼 편한게만 대하고만 있는게 바로 나의 게으름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공부의 길에 도반이 전부라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나의 공부, 너의 공부 이렇게 분리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같이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내내 생각해볼 큰 물음을 먼저 건네줘서 고마워요~

  • 2021-09-06 09:08
    도반들이 할 수 있는 '잘' 분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불교팀에 와서 매주매주 놀라며(식겁하며)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불교 수행의 요청은 무분별이 아니라는 것! 세계에 대한 이해 속에서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자기 발밑을 살아가기를, 관계맺는 방식을 퉁치지 않고 시도하기를 기억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