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3학기 6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21-09-09 22:19
조회
2788
     1. 질문을 한다는 것

 

누군가 물었습니다. 불교를 공부한 뒤 뭐 좀 달라진 게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많은 생각들이 앞뒤 없이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글쎄... 달라진... 거?? 뭐지? 뭐가 달라졌을까?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디... 아니 그래도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긴 하지. ... 불교 공부가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지? ... 머릿속에서 숱한 생각들이 KTX보다 더 빠르게 스쳐가는 동안 입에서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온갖 말들이 뱉어지고 있었습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떤 과정일까요? 그것은 또 어떻게 구성되는 걸까요? 우리는 참 많은 질문들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질문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들뢰즈는 질문이 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벗어나기’란 뭘까요?


이번 주는 4학기 글쓰기 과제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어떻게 붓다의 가르침으로 접근하여 풀어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의 흔적들을 들고 와서 머리 맞대고 앉아 한참을 낑낑 대었죠. 자식에 대한 엄마의 역할, 생태주의, 분노, 안전 사회, 늙음, 감각적 쾌락의 욕망,불안 등에 관한 문제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냥 문제제기 수준이죠. 어떤 ‘만남’을 질문의 場으로 만드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요? 질문을 한다는 건 또 무엇일까요? 저는 아직도  삶의 장에서 어떤 사건을 낯설게 만나는 일이 어렵습니다. 질문이 잘 생기질 않습니다. 오래도록 정답을 찾기 위한 질문을 했고, 그런 질문을 받아와서겠지요. 그런데 들뢰즈는 질문은 정답을 재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대체 어떤 배치가 우리에게 질문을 생성하는 것을 막고 있을까요? 우리의 다양한 감각들을 하나의 기호체제로 흡수해버리는 그 배치는 어떤 배치일까요? 아마 우리가 만남을 낯설게 감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주체화, 의미화된 피상적인 기호-이미지들에 둘러싸여 그 틈새를 발견하지 못해서일 겁니다.


언젠가 스승님은 고타마 싯타르타가 ‘만남’의 순간을 문제의 場으로 만들었던 경험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고타마 싯타르타가 12살이 되었을 때 슈도다나 왕은 화려한 농경제를 통해 자신의 영화를 만끽하고, 싯다르타에게도 그의 지위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농경제에서 싯다르타는 화려한 왕과 대신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농부들이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떨어진 넝마로 겨우 몸을 가린 채 온몸에 흙을 뒤집어쓰고 맨발로, 주름살에 뒤덮이고 새까맣게 탄 채,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농부는 소를 마구 때리며 일을 시키고 있죠. 농부가 쟁기로 흙을 파니 굼벵이와 지렁이 같은 벌레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새들이 날아와 그 벌레를 서로 잡아먹겠다고 싸움을 벌이죠. 싯타르타는 이 처참하고 냉엄한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의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끔찍한 전율을 느낍니다. 그리고 생각하죠. ‘왜 강한 것은 약한 것을 잡아먹어야 하나?’  그리고 농부에게 가서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고생을 하고 있습니까?’ 농부가 탄식하며 대답합니다. ‘곡식을 거둬서 국왕에게 세금을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싯다르타가 그런 장면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단순히 자비 넘치는 마음으로 농부와 소와 벌레들의 고통에 가슴이 아팠을 겁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보고 느낀 그 고통이 자신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농부의 대답을 듣고 싯다르타는 그 고통이 바로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풍족하게 먹고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지요.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문제’란, 질문이란, 이렇게 어떤 ‘만남’을 ‘문제의 場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질문이란 어떤 ‘낯선 마주침’으로서만 생성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낯선 마주침은 어떤 배치속에서 일어나게 될까요? 우리는 문제를 ‘잘못된 것’,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場’이 된다는 것은 소란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그 소란은 습관적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만나는’ 질문일 것입니다. 당연하게 여겨오던 것이 균열이 가는 것이겠지요.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여겨온 것들에 균열이 생길 때는 뭔가 외부적인 충격이 있을 때일 것이고, 내부적으로 큰 갈등을 겪게 되는 그런 순간이겠지요. 그것은 예기치 않게 올 수 있겠지만, 배움의 과정에서 이치를 터득하게 된 그만큼의 강도로 균열이 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은 불교가 하나의 질문으로 차고 들어오는 어떤 순간이 있었는지 질문해보라고 하셨을 겁니다. 나에게 변곡점이 된 어떤 사건을 떠올린다면 그 순간이 낯선 것과 마주친 순간이 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삶의 어떤 장면이 다른 길로 미세하게 방향을 튼 그런 사건...이렇게 삶의 어떤 장면을 ‘다르게 만나는’  그 지점에서 질문이 생성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지난 여름 갑자기 찾아온 중풍 전조증상이라는 신체의 겪음이 생전 처음 겪은 낯선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몸과 병과 오래된 공부의 습관과 그리고 저 자신의 집착을 돌아보게 했던 사건이었죠.


들뢰즈는 “사람들이 질문들 속에서 쳇바퀴를 도는 동안 거기에는 이미 소리 없이 작동하는, 거의 지각할 수 없는 생성/되기들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때의 생성은 “[역사학이 아니라] 지리학에 속하며, 길 찾기, 방향, 출입구”에 속한다고 말하죠. 즉 자식에 대한 엄마의 역할을 묻는 순간, 엄마는 자신들의 과거와 미래, 자신들의 역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엄마-되기라는 생성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생태주의자-되기, 노인-되기, 수행자-되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생성은 결코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인 양 처신하는 것도, 모델에 자신을 부합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들뢰즈는 “비록 그 모델이 정의나 진리에 속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출발하고 도착하는 혹은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란 없다”고 말합니다.(『디알로그』, p. 8)



2. 다양체를 만들어내는 역량



여전히 어렵습니다. 들뢰즈-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개념을 내 것으로 변주하기는 커녕, 개념을 따라잡지도 못한 채, 그냥 주언부언 조각난 말들이 오갔습니다. 그래서 그냥  공부 삼아 정리해보려 합니다.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회상 1>에서 들뢰즈는 ‘존재의 일의성’에 대해 말합니다. “각 개체는 하나의 무한한 다양체이며, 전체 <자연>은 다양체들의 완전히 개체화된 다양체”라는 것이죠.(482) 들뢰즈가 다양체를 말하는 것은 변용 역량을 말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변용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무한한 다양체를 말하기 위해 들뢰즈는 ‘<자연>이라는 고른판’에 대해 말합니다. ‘고른판’이라는 개념은 ‘지각 불가능한’ 차원을 사유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하는데요, 이 고른판이라는 추상적인 기계의 부품은 “다양한 배치물들 또는 개체들”이며, “이것들 각각은 크고 작게 조성된 무한히 많은 관계들 속에서 무한히 많은 입자들을 한데 묶어 취합”하는 통일성으로 존재합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1부 정리28에서 모든 개체들 안에는 이미 운동 정지의 원리가 내재해 있다고 말하며,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모든 실재는 다른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다른 실재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한, 그러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활동하도록 규정될 수 없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판의 차원들은 그것이 자르는 다양체들 또는 개체들의 차원과 더불어 증가”합니다. 다시 말해 개체들은 양적으로는 유한하지만 생성의 차원에서는 무한하게 생성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일자>는 모든 <多者>와 유일하고 동일”하며, <존재>는 모든 <차이 나는 것>과 유일하고 동일”하다고 말하죠. 즉 고른판은 전체와 부분이 어떤 위계도 없이 일치되는 평등한 자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순수한 내재성의 판, 일의성인 판에서 어떻게 독특한 개체가 개체로 나타나는 것일까요? 들뢰즈는 이 판에서 개체들은 “속도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며, “서로의 연결접속과 운동 관계에 따라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요소들과 재료들이 개체화된 특정한 배치물로 들어오며” 독특한 개체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척추동물과 <문어>나<오징어>가 되기 위한 조건은 ‘접기’라는 운동요소 뿐이라는 것이죠. 이 때 ‘접기’는 기관이나 기능이 아니라 ‘조성’을 말합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조성’이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요소들과 미립자들’이 순수 내재성의 판 위에서 빠르고 느리게 이행, 생성, 또는 도약을 일으킬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신, 자연 안에 있는 모든 복잡한 실재들은 운동과 정지, 느림과 빠름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될 뿐입니다. 그리고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은 개체들이 보이는 ‘역량의 정도’에 따라 대응합니다. 역량이란 얼마나 다양한 것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조성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힘이죠. 어떤 낯선 것들과 만났을 때 자기 자신의 조성을 유연하게 변환시킬 수 있는 힘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강렬함’이고 ‘역량’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의 무리입니다. 그리고 이 무리들은 서로를 전염시키고 또 전염되며, 더불어 ‘전체’도 함께 증식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몸체를 구성하는 입자들과 그것들이 하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르죠. 들뢰즈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몸체의 변용태들은 어떤 것들인지, 그것들이 다른 변용태들과, 다른 몸체의 변용태들과 어떻게 조합되거나 조합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결과 다른 몸체를 파괴하는지 아니면 그것에 의해 파괴되는지 또는 다른 몸체와 ...더 강력한 몸체를 합성하는지 전혀 모른다.”(488) 그래서 우리는 곧잘 자신의 역량에 대해 규정하고 한계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일까요?


들뢰즈는 꼬마 한스의 말-되기를 통해 변용을 설명합니다. 한스의 말은 말이라는 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레를 끄는 말- 승합마차- 거리>라는 기계적 배치물 속에 있는 하나의 요소 또는 하나의 개체인 것이죠. 한스의 말-되기는 “자신을 말이 되게 해주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 변용태들을 자기 자신의 요소들에 부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되기’를 “전혀 다른 개체들 사이에 속도들과 변용태들을 조성하는 일이며, 일종의 공생”(489)라고 말하죠.  쥐와 인간은이렇게  ‘주체들의 변용 능력이 아닌 하나의 변용능력 속에서’, ‘형식들의 질료가 아닌 질료 속에서’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로 <존재>가 됩니다. 다시 말해 “되기는 ‘함께’ 생성되게 하는 관계 속으로 요소나 재료들을 집어넣는 일”인 것이죠. 이 때 중요한 것은 관계 맺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들뢰즈는 되기는 항상 소수적 되기라고 말하죠. 그렇다면 습관은  다수적이고 중심적인 힘에 끌려가는 일종의 관성적 힘이고, 되기는 낯설고 이질적인 요소들과 연결접속하는 탈영토화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되기란 우리를 낡은 지층으로부터 끌어내는 관계 맺음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지층 바깥에는 지층에 갇히지 않은 낯선 힘들이 흐르고 있죠. 그 낯선 무리 속으로 서로를 감염시키는 힘이 바로 생성/되기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이미 다양체입니다. 번뇌는 다양체로서의 자신을 모르는 무지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스스로를 하나의 다양체로 열어둘 때만이 낯선 힘과 연결 접속될 수 있을 겁니다. 존재는 ‘Being’이 아니라 ‘Becoming’, 즉 되기입니다. 그것은 고른판 위를 흘러 다니는 강도들이 '이것임'으로 합성되어 나타나는 복합체입니다. 이 낯선 개체화를 매순간 다른 정도들이 마주치는 사건의 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되기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에 필수불가결한 방식인 것이죠. 그렇다면 되기란 다른 개체들 사이에서 속도와 변용태를 조성하는 일이고, 그렇게 공생하는 일이죠. "어느 시각, 어느 계절, 어느 분위기, 어느 공기, 어느 삶과 분리되지 않는 배치물들 속에서 주체이기를 그치고 사건이 되는 것..."(497)  다른 정도들이 마주치는 사건의 장, '이것임'으로 사는 일, 그것이 실재입니다.

전체 4

  • 2021-09-11 10:22
    4학기 에세이 구상을 앞에 두고 샘이 해주시는 '질문'에 대한 이야기가 참 진지하게 다가오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네요.^^ 샘이 해주신 천개의 고원 정리로 복습도 다시 한번 해야겠어요!!! 샘 감사합니다.^^♡

  • 2021-09-11 10:56
    아. 질문이 곧 생성/되기 였다니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후기에서 알찬 배움 얻어갑니다.~^^

  • 2021-09-12 08:29
    각자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가지고 그 다른 속도를 서로 맞추면서 산다는 그 자체가 "문제"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다는 말은 그러니까 문제화의 능력일 수밖에 없고요!! 같이 하는 공부가 바로 시도와 실험의 장이 되어야하는 이유기도 하고요~ 샘 덕분에 정리 되네요^^

  • 2021-09-13 08:44
    되기에 대해 이미지처럼 부유하던 생각들과 토론에서의 내용들을 이렇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샘의 들뢰즈 되기 두고두고 참고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