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3학기 8회차 후기 (9월 27일 수업)

작성자
미영
작성일
2021-10-03 15:18
조회
2831
<이띠붓따까-여시어경>

삼명통(三明通)

불교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순차적으로 세 가지 지혜(三明)를 증득하고 정각을 성취하셨습니다.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인 숙명통(宿命通), 중생의 생사를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번뇌의 소멸을 이룰 수 있는 누진통(漏盡通)이 그것입니다. 삼명이라는 용어는 원래 브라만교에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브라만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오로지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 계급에게만 비밀스럽게 알려지고 전수되던 것이었죠. 이를 부처님께서 바르게 수행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열어놓았습니다. 깨달은 자들이 갖추게 된다는 삼명을 우리의 삶속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엄마 배속에 있는 열 달 동안 인류의 모든 진화 과정을 아주 빠르게 겪는다고 합니다. 그 후 출생해서 백일동안은 전생의 기억에 의해 살아가며 백일이 지나야 비로소 외부적 힘들과 작용하며 현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몸을 구성한 것들의 신진대사가 이루어지는 기간들은 다 다른데 백일이라는 기본 단위는 피부 차원의 신진대사가 바뀌는 기간입니다. 우리 몸의 근간인 뼈는 삼천일 정도의 수행에 의해 바뀝니다. 그리고 대략 구천일 정도의 수행기간이 지나면 환골탈태하는 시기로 한 사람으로서 독립을 하는 때가 됩니다.

숙명통은 백일을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수행에 정진하여 증득한 신통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습관대로 해석하는 틀이 탈각되는 수련을 통해 우주의 모든 정보가 드나들게 하는 것이죠. 이를 통해 수많은 세계가 괴멸되고 생성되는 시간 속에서 모든 과정의 삶들을 경유하며 나의 신체와 정신이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천안통은 삼천일을 수행에 정진한 결과로 자기 마음에 어떤 외물이 다가오더라도 거울처럼 투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곧 타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비추니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숙명통, 천안통은 번잡하지 않은 단순한 일상을 살며 수행에 열심히 정진하다 보며 보통사람들도 도달 가능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두 신통력을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루면 자기가 마치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착각하고 행동하는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진통은 “수행승이 번뇌를 부수어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증득하고 깨달아 성취”(P443)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깨달아 나와 너의 분별이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전생을 알거나 미래를 꿰뚫어 아는 것보다 시시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제일 어려운 문제입니다.

삼명은 인간의 의식을 어떤 방식으로 깨우치느냐에 따라 인간이 도달할 의식의 경계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의식의 한계를 짓지 말라는 것이지요. 신은 우리 안에 내재해 있으므로 누구나가 신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스피노자의 말과 연결됩니다. 만물이 생성하는 연기 조건을 꿰뚫은 지성의 힘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동양 철학에서 본성을 회복하라는 것과 천명을 안다는 것, 불교에서 불성을 회복하라는 의미는 외부에 기대지 말고 원래 내 안에 있는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걷어내는 수행의 길밖에 없는 것이지요. 자신을 덧씌우고 있는 것들을 지우고 버리는 일은 지난한 과정이지만 지성의 힘을 힘껏 작동시키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천 개의 고원>

미시정치와 거시정치

정치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입니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는 거시정치인 동시에 미시정치이다.”(P406)라고 했습니다. 정치란 결을 달리하는 두 가지 운동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지요. 거시와 미시라는 것은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영향력이 크고 미미한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시정치란 할당되어진 영역들 투표, 청와대, 국회 등으로 사람들을 어디에 고정시켜 둘 것이냐의 문제이다. 반면에 미시정치는 이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일상을 지탱하는 흐름, 곧 욕망의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은 파시즘의 문제입니다. 스피노자와 『천 개의 고원』에서 던지는 윤리적 질문. ‘왜 우리는 억압을 욕망 하는가?’ 대중은 그 자체로 혁명의 편도 반동의 편도 아닙니다. 조건에 따라 혁명적으로 될 수도 있고 반동적으로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때 자기를 지배하는 것에 종속적으로 머무르는 것일까요? 이는 미시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외부에 우리를 억압하는 힘이 있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외부 힘의 변화가 없으면 우리는 그냥 억압된 상태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바깥의 무언가에 의해 침해 받는다는 것은 자기의 능동성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군자는 시대가 아무리 이상해도 자기 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시대가 어두워도 덕이 있고 밝아도 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면에 있는 덕을 문제 삼지 않고 외부 탓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이 잘못되어서 이렇게 밖에 살수 없다고 생각하면 원만 감정만 쌓이게 됩니다. 원한감정이란 나는 잘살고 싶은데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든다는 것으로 반동적인 에너지입니다. 파시즘은 이런 원한 감정을 이용하여 작동합니다.

우리는 욕망하는 기계입니다.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모든 행동들이 다 우리의 욕망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의 흐름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배치입니다. 배치는 무수한 욕망의 선들이 흘러 다니는 장으로 욕망은 바로 이 선들을 따라 흘러갑니다. “욕망이란 필연적으로 여러 분자적 층위들을 지나가는 복합적인 배치물들과 절대 분리될 수 없으며, 이미 자세, 태도, 지각, 예감, 기호계 등을 형성하고 있는 미시-구성체들과도 분리될 수 없다.”(P409) 욕망은 역사적, 정신적, 물리적 차원으로 형성된 복합적 배치물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개인화할 수 없으며 시대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형성됩니다. 모든 사람이 깨끗하고 안락한 집에서 사는 것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걸식을 하고 한 벌의 옷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도 만족하는 삶도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획일적으로 어떤 스토리로 살아야하는지 주입 당하며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닐까요. 네트워크를 통해 사람들의 지각방식과 느끼는 방식이 비슷해져서 누구나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억압은 욕망을 금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욕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각, 지각, 사고의 다양함이 없는 빈곤한 우리의 사회는 억압적입니다.

욕망이 복합적 배치물들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을 사유하지 않고 정치란 마치 이성과 판단의 영역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좋은 정치를 욕망한다는 단선적인 구조로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습니다. 욕망도 제도와 권력 등 전체 배치를 이루고 있는 선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배치가 욕망을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 배치를 욕망하기 때문에 배치가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집값이 떨어지는 것은 싫지만 자기의 이성으로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습니다. 집에 대한 욕망을 변환하지 않는 한 어떤 부동산 정책이 나와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집’이라는 배치물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혼동하기 쉬운데 전체주의는 국가가 모든 것을 장악하여 모든 코드를 다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군대가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전체주의 단계로 끌어 올리는 장치로서 작용하며 개인적인 것을 다 차단시키므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파시즘은 전쟁기계와 관련됩니다. 모든 국가는 국가를 공격하는 전사들을 포함합니다. 국가의 외부에서 중심을 만들지 않고 중심을 계속 공격하며 해체시키는 힘들과 함께 작동하는 것이지요. 국가는 이런 도주선들을 봉쇄하여 국가 안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런데 파시즘 국가는 전제주의라기보다는 자살적입니다. 국가는 어떡하든 국민을 살려야 국가가 유지되기 때문에 죽음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파시즘에는 실현된 허무주의가 있습니다. 이미 그 밑바탕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는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렇듯 파시즘은 국가의 도덕적이고 전통에 따른 삶을 따르지 않고 강렬한 도주선을 타다가 죽음의 선과 만난 것입니다, 도주선을 파괴와 소멸의 선으로 변형시켜 생명의 능동성을 발현하지 못하도록 덮어버리므로 파시즘은 가장 반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써서 돌파하지 않고 누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무력화시키는 선, 누군가의 죽음을 욕망하는 선은 자기가 자기를 죽이고 싶은 욕망입니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경멸하는 마음의 밑바탕에는 이렇듯 허무주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이면에는 이상주의가 흐르고 있습니다.

욕망의 구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자기의 욕망을 죽음의 선이 아니라 또 다른 생성의 선을 만나 어떤 실험을 하며 어떻게 변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미시정치의 문제입니다. 내가 놓여있는 배치가 어떤 방식으로 내 욕망을 규정하는가? 나는 아무것도 결여하지 않았는데 자꾸만 결여한 것처럼 만드는 배치는 무엇일까? 이것을 분석하는 만큼 도주선을 발명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처한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욕망의 변환은 완벽하게 자기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더 좋고 올바르다는 기준이 없으며 누구도 어떤 대안을 마련해 줄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변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다른 접속을 통해 어떻게 실험할 것인가와 연결됩니다. 이는 나를 능동적인 변용으로 이끄는 되기의 문제이며 우리의 신체와 정신이 무수한 인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문제와 결부됩니다.

 

 

 
전체 2

  • 2021-10-04 13:21
    누진통과 욕망의 구도 바꾸기...촘촘선생님 지난 수업 잘 정리해 주시고 복습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__) 그리고 방학은 끝났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ㅎㅎ ^^

  • 2021-10-04 17:06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