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9월 13일 3학기 7주차 후기 & 9월 27일 8주차 공지

작성자
미숙
작성일
2021-09-16 21:28
조회
2746
 

우선 2학기 에세이 수정본 전원 통과한 것을 축하합니다~~~^^ㅎㅎㅎ 다들 내심 걱정이 많으셨을 텐데 잘되었어요.^^ 4학기 에세이 구상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하나는 대충 마무리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첫 번째 에세이가 ‘나’로부터 시작하는 글쓰기였다면 두 번째 에세이는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우리들’로부터 시작을 하는 글쓰기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4학기 에세이는 ‘자비’의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고요. 우리가 함께 처해있는 문제를 불교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다르게 사유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의 글쓰기입니다. 그리고 문제를 느낀 지점을 확실히 보고 구체적인 사건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글이 밍밍하고 문제를 사유하는 길이 없어지게 된다고 하셨어요. 저희의 구상은 너무 범위가 크고 구체적인 연결고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다음 주에 시간 날 때마다 다시 열심히 궁리해보아요.^^ 내게 보이는 그 문제가 드러나는 단적인 사건은 뭘까요? 코로나 바이러스를 둘러 싼 문제에서도 확진자나 백신의 문제를 넘어서 코로나를 함께 겪는다는 게 뭔지 시야를 넓혀 관찰해보며 놓친 문제를 찾아보는 것에 관한 말씀도 인상적이었어요. 타자에 대한 혐오가 사실은 자기 혐오에서 오는 건 아닐지, 아이의 문제가 사실 부모의 문제가 아닌지..한걸음 더 나아가 살펴보는 시선이 필요하겠습니다.

이띠붓따까 <70잘못된 견해의 경과 71올바른 견해의 경> 올바른 견해라는 것이 뭔가요. 한마디로 말해 사성제에 관한 이해입니다. 상반기에 공부했던 사성제 세미나로 이제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요.^^ 계-정-혜의 순서로 말해지지만 정견(혜)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계, 정을 할 수가 없어요.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심적인 믿음이 아니라 사성제에 대한 이해이고 그것이 정견입니다. 정견은 8정도의 맨 앞에 자리 잡고 있어요.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고, 모든 불교 수행의 출발점이라고 선생님께서 짚어 주셨습니다.

<76 행복의 열망에 대한 경> 저번에 우리 도반끼리 토론했던 게 생각나네요. 명예, 재산, 좋은 곳. 이런 걸 바라는 건 세속적인 것이 아닌가?하고 얘기했었지요. ㅎㅎ 부처님은 중생들이 좋아하고 바라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중생을 교화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다 바꿔버리네요.ㅎ 어떤 것이 진짜 명예이고, 재산이고 좋은 세계에 태어나는 것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이때 선생님께서는 니체의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우리 모두 빵터짐..ㅎㅎㅎ 내게서 다 빼앗아가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 남는다.. 우리는 부동산부자가 될 수 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재산이겠지요?^^ 불교는 명예, 재산, 좋은 곳, 세속인들이 이것을 원하는 것이 나쁘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원하는 것을 가지면 되는데 그 척도가 외부에 있다면 그건 어떤 건가요. 내가 좋아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게 아닌가요? 내가 원하는 것이 왜 좋은 것인가라고 이해하고 바라는 것이 아닌거죠. 나에게 정말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게 나에게 좋은 것을 찾고 추구하게 될까요?

악한 친구와 사귀는 자를 사귀고 접촉하는 자와 접촉하는 것은
독 묻은 화살이 깨끗한 화살묶음을 오염시키는 것과 같다.
...
악취가 나는 물고기를 길상초의 잎사귀 끝으로 닿게 하면,
길상초 또한 악취를 풍긴다. 어리석은 자를 섬김은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목향수를 잎사귀들로 감싸게 하면,
잎사귀들이 향기를 풍긴다. 슬기로운 자를 섬김은 이와 같다.
....

진정으로 나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로운 것을 추구하는 무리 속에 있어야 한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변용’이고 들뢰즈의 ‘되기’입니다. 우린 어떻게 기쁨으로 변용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도주선을 만들어낼 관계 속 변환을 이루어내는 되기의 차원이 될 수 있는가, 이게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질문이고요. 내가 진정 원하는 행복, 그것을 열망하는 것이 나 개인의 본래적인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거라면.. 어떤 무리 속에 있는가가 정말 중요하겠어요. 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며 열심히 사는데도 지나고 보면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나..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무리와 세계는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곁에 있으면 ‘감염’이 되기 때문이에요. 바이러스가 몸에 침투하면 면역체계를 교란시키고 바꿔버립니다. 이것은 실재적인 것이고 들뢰즈가 강조하는 ‘되기는 실재적인 것이다’라는 말이라고 해요. 모방이 아닌. 뭔가를 배운다는 것도 모방이 아닌 감염이기에 머리에 쥐가 나고; 열이 나고 안 하던 생각을 하려니까 힘들고 부정되고..하는 것이라는데 딱 저의 이야기였어요. 공부를 느슨하게 하면 그런 증상도 없고 아무렇지 않고 감염되지 않으며 나는 변하지 않겠지요...

<79 퇴전의 경>에는 세속적인 일, 잡담, 수면을 즐기고 기뻐하고 즐기고 몰두함이 수행승을 퇴전으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각자 찔리는 것이 달랐겠지요. 저는 늘 수면이라는 말만 나오면 찔립니다.^^; 세속적인 일, 잡담, 수면, 이것들의 특징은 뭘까요? 쾌,불쾌의 느낌을 강화하는 것 아니냐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세속적인 일을 하고 잡담을 하다보면 쉽게 동화가 돼요. 편을 먹고 쾌, 불쾌의 느낌을 키웁니다. 그것은 곧 번뇌의 증식이겠지요.

<80 사유의 경>에서는 세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체면에 묶인 사유, 이익과 명예와 칭송에 묶인 사유, 타인의 배려에 묶인 사유인데 ‘타인의 배려에 묶인 사유’가 악하고 불건전하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요. 주석을 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가명 아래 세속적 애정에 묶인 사유를 말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자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세속적 애정에 묶인 사유라는 거에요. 세속에서는 매우 인간적인 것이 될 수 있으나 수행승에게는 수행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사유입니다. 수행자의 덕목은 "자기를 포함 모든 것에 대해서 떨어져서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도 방관자는 아닌 적당한 거리두기, 어떤 것을 더 많은 실재성 속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정념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게 쉽지 않음에도 정념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이유는 정념의 발생 자체가 애착이기 때문입니다.

<81 공경의 경> 팔리어로는 Sakkarasutta. Sakkara는 숭배(공경)라는 뜻입니다. “공경에 의해 정복되어 마음을 빼앗긴 뭇삶들”이 나쁜 곳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 원인은 뭘까요? 스피노자가 말했던 경탄, 외경의 감정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공경이 일종의 우상화라면 불공경은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해주셨어요.

<85 부정관의 경>에 대해 말씀해주시면서 ‘왜 그렇게 감각기관을 수호하라고 했을까’ 물으셨어요. 무의식 속의 에고는 우리가 바깥 사물과 접촉하는 순간 바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감각을 억눌러야 할까요. 불교에서는 감각기관을 ‘수호’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의 뜻은 “우리의 감각하는 방식을 외물에 내어주지 말아라”는 선생님의 표현이 참 좋았습니다. 저는 감각기관을 수호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잘 몰랐거든요. 외부 세계에 대해서 종속적이고 노예적으로 반응하며 사는 게 어떤 것인지 관찰해보려고 해요. 그러려면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살면서 만드는 영토들- 집, 학교, 직장.. 거기 가면 하게 되는 일정한 행동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곳만을 오가면 점점 진해지고 견고해지는 선분성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게 우리 삶이라고 하죠. 여기에서 도주선을 만든다는 건 어떤 걸까요. 무조건 도주하는 게 아닙니다. “아주 미세하고 주의 깊게 자신의 욕망이 어떻게 그 배치 위에서 구조화되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작업”입니다. 이런 준비 작업 없이, 훈련없이 도주하면 도주 안한 것보다 못한 것이 된다고 하죠.. 특히 요즘은 옛날과는 달리 삶이 더 복잡해졌으니까요. 욕망도 감각도.. 그래서 더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해요. 이런 시대에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청정한 삶을 살 것인가. 왜 불교 공부를 해야하는가.. 복잡해진 세상에서 감관을 수호하고 외부지향적 사유의 경향을 끊어내고 조금은 더 심플한 삶을 만들려면 어떤 수행이 필요한지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번주에는 이띠붓따까로 말씀을 많이 해주시고 4학기 에세이구상을 봐주시느라 천개의 고원 강의를 듣지 못했네요. 추석 연휴 끝나고 8주차에 강의가 있습니다.^^ 도반님들~~ 추석 연휴 잘 보내시고 27일 월요일에 뵈어요~~~^^

 

<9월 27일 3학기 8주차 공지>

* 이띠붓따까-여시어경 제3장. 제오품(p413~444) 읽어오고 낭송+법담 나눕니다.

* 4학기 에세이 주제를 구체적으로 구상해 옵니다.

* 천개의 고원 강의가 있습니다.
전체 2

  • 2021-09-17 11:38
    공지와 후기를 동시에 해결하는 1타2피. 이렇게 울 반장님이 정성들여 정리해주시니 지난 시간에 배운 내용들이 다시 한 번 복기되네요. 담시간 천개의 고원 강의도 기대됩니다. 진짜 들뢰즈 강의는 오랜만인듯.

  • 2021-09-22 09:44
    "우리의 감각하는 방식을 외물에 내어주지 말아라” 그까이꺼 명절이 대체 뭣이라고 그것에 휘둘려 울 미숙 후기를 읽지 못했던 게 한이 되네요.
    추석을 보내며 '온갖 외물들'에 그만 감정들이 왼통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보니 모든 게 도루아미타불!ㅠㅠ
    까이꺼!! 이미 지난 일 소용없지요. 더 내려갈 곳 없는 바닥에서 또 시작해야지요. 비가 태양을 가리긴 했지만 오늘도 해는 분명 떴으니까요!
    미숙 甲木의 튀어오르는 힘을 빌어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