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8월 9일 3학기 2주차 후기

작성자
호정
작성일
2021-08-11 15:17
조회
2744
점심 먹기 전

코로나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직접 접촉에 대한 아쉬움도 커지지만, 온라인상으로 연결된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게 되면서 다른 감각과 감정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교팀에서는 온라인 명상을 처음 시도해봤습니다. 규문까지 굳이 시간 들여서 꾸역꾸역 가지 않아도 컴퓨터만 켜면 접속할 수 있어 편리할 것 같지만, 오히려 화면에 붙들려서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하니, 눈은 물론이요 팔 다리 허리 어깨 찌뿌드드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자꾸 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명상도 별 이물감 없이 했습니다. 혼자 집에서 하는 것보다 여럿이 같은 시간대에 연결된 느낌으로 하는 명상이 더 집중된다는 중평이었습니다. 명상에는 깍두기로 건화샘도 반짝 접속했는데요, 이런 식으로라도 규문 식구들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온라인 연결의 예기치 않은 즐거움은 각자의 개별 공간에서의 접속으로 인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 현숙샘 남편, 규문 정옥샘의 카메오 출연, 화면 속 배경을 통해 유추되는 개인의 환경 등등. 사생활 노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네요. ㅎㅎ. 인스타나 페북 사진처럼 ‘생일 축하 케이크 사진 구석에 무심한척 페라리 걸리게 하는’ 화면 연출하셔도 못 본 척 눈감아 드립니다.

2교시에는 이띠붓따까를 낭송하였습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정신의 이러한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않는 수행승이 있다. 식사에 분량을 모르고 감관을 수호하지 않는 자,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 두 가지 고통을 겪는다’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시각에는 지혜와 육신의 시각이 있고, 지혜의 시각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그중 부처의 시각에서, ‘부처님은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아니 깨달았다는 분이 이러시깁니까? 이렇게나 분별을 하다니? 그런데 이게 정말 우리들의 분별과 같은 분별일까요? 부처님은 세상을 드러난 그대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보신 것입니다. 오염된, 둔한, 추한, 가르치기 어려운 것들을 나쁜 것이라고 여겨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우리의 집착이 부처님의 분별과는 다른 지점이겠죠.

바르게 분별하는 것은 분별 없이 사는 것입니다.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서는 분별의 토대가 되는 자신의 감관을 수호해야 합니다. 탁발하는 수행승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자신의 수행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먹는 것과 관련된 것이겠죠. 그래서 ‘식사에 분량을 모르고’를 따로 빼서 강조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식사에 분량을 안다면’ 아마 성불했을 거라고 했는데, ‘감관을 수호하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경험담들을 나누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감관을 자극하는지, 그 배경엔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지. 이런 사회에서 자신의 감관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다음 에세이 주제로 삼고 싶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적당한 분량을 알고’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점심 먹은 후

역시 적당한 분량을 알기 어려운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비디오 화면을 작동시켜 얼굴을 대했습니다. 정말 웃는 얼굴에 침뱉고 싶은 ‘얼굴, 얼굴성’이라는 개념. 알 듯 모를 듯 모르겠네요. 3교시는 「천의 고원」의 7고원 얼굴성을 읽고 0년, 얼굴과 얼굴성, 얼굴성의 작동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 빼고는 다들 뭔가 조금씩 알고 계신 것 같아 열심히 주워듣고 이리저리 꿰맞추느라 머리가 아팠습니다. 우선 7고원 첫장에 있는 예수의 그림과 0년의 의미.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BC와 AD가 나뉘죠. 모든 것의 시작점, 의미작용의 출발점으로서의 슈퍼스타 예수의 탄생. 기독교적 문화가 종횡으로 가로새겨 있는 일상을 영위하는 서구 문화라면 몰라도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우주가 발생하고 의미가 생성된다는 사고방식이 우리에게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BC/AD가 아니라, BC(Before Corona)/AC(After Corona)라는 말에 모두 빵 터졌는데, 이게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학계에서 진지하게 나온 얘기래나 뭐래나. 점점 기억력이 떨어져가는 와중에도 어쩜 이런 내용은 깨알같이 기억이 나는지. 앞으로 언젠가는 0년이 아니라 2020년이 의미생성의 출발점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마주 대하고 반가워하는 얼굴은 개인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사물인 것 같지만, 이 구체적인 얼굴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태어납니다. 채운샘은 지난 시간에, 들뢰즈는 의미화의 중심인 언어를 벗어나고자 얼굴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미지는 언어에 비해 다층적이고 다의적입니다. 얼굴은 의미가 기입되는 흰 벽, 주체화가 일어나는 검은 구멍의 체계입니다. 얼굴이 몸의 일부분인 머리가 아닌 것은 눈, 귀, 코가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기능을 떠났을 때입니다. 어떤 기능을 하는 기관이 아니라, 의미가 기입되는 둥근 하얀 벽, 주체화가 일어나는 검은 구멍의 체계로서의 얼굴. 이런 얼굴이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얼굴입니다.

우리가 학생이 되는 것은 단순히 교복을 입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실, 교탁, 책상, 의자, 벽에 걸린 대통령 또는 교장의 사진, 이런 배치물들 안에서 우리는 학생으로 기능합니다. 벽에 걸린 대통령 또는 교장의 얼굴을 통과하는 독재자의 권력.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는 이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의 구체적인 배치물로부터 얼굴성이 나온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검은 구멍-흰 벽의 추상적인 기계에 시동이 걸리면 이 구멍 뚫린 표면 위에 의미생성과 주체화의 새로운 기호계가 설치됩니다. 학생이라는 의미와 주체가 있어서 그것이 학생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학생이라는 정체성으로 고정된 나’가 아니라 배치에 따라 내가 학생으로, 엄마로, 자식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얼굴과 그것을 생산하는 추상적인 기계의 관계, 얼굴과 이 사회적 생산을 필요로 하는 권력 배치물들과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관계들 속에서 계속 지층화, 탈영토화, 재영토화의 과정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들뢰즈는 ‘우리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오로지 신경증 환자만이 … 퇴행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기표의 하얀 벽, 주체성의 검은 구멍, 얼굴 기계는 막다른 골목이며, 우리의 굴복과 예속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태어났고, 우리가 몸부림 쳐야 할 곳은 그 위이다. 그것이 필연적인 계기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용법을 발명해야 할 도구라는 의미에서’(359쪽).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의미생성과 주체화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의미생성과 주체화와 함께 하는 얼굴 해체, ‘나’는 없지만 주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불교.

4교시에는 다음 학기 에세이에 관한 거칠고 간략한 구상을 나눴습니다. 후기가 길어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토론 시간에 나왔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더 쉽게 녹여내지 못해 무척 아쉽습니다. 열심히 하지 못해 안달인 우리 학인들이 다음 시간부터는 천개의 고원을 좀 더 심도깊게 읽기로 했습니다. 저 혼자 소리 높여, 두 손 들며 반대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자신이 맡은 분량을 좀 더 세밀히 읽고 학인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이런, 식빵!!
전체 2

  • 2021-08-11 16:35
    대단하시군여... 불교 공부가 점심을 먹기 전과 후로 나뉜다는 심오한 사실을 간파하신데다가, 아무리 읽고 낭송하고 토론해도 분량을 알지 못하는 식사를 하고야마는 우리의 깊은 습을 알아채시다니!

  • 2021-08-13 09:35
    점심 먹기 전과 후는 몸과 마음의 상태가 매우 다릅니다. 우리 도반님께서 그것을 간파하신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