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8월 23일 3학기 4주차 후기

작성자
경아
작성일
2021-08-26 00:34
조회
2703
<불교와 글쓰기> 8월23일 후기

무엇보다도 복희샘과 하는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특별함을 기대했던 기대가 무너지시면서^^ 담담해지신 우리 복희샘  마지막까지 덤덤한 모습으로 같이 명상하고 질문하고 토론하고 산책하고 수다떨고 ...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보내드렸습니다.  같이 공부한 3년이 후딱 가버렸듯이 이란에서의 3년도 후딱 가겠죠. 모쪼록 몸과 마음 잘 살피시고 귀한 시간 보내시고 컴백하시길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1.명상 – 나에 대한 희심喜心 명상

이번 시간에는 자신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희심을 연습해보았습니다. 처음 자비명상을 할 때 특정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영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침에 앉아서 연습한 마음과 말들이 일상에서 슬며시 나올 때가 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칠 사람들이나 다른 생명들에게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그리고 오늘 하루도 잘 보내시길’이라는 발원이 나오곤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는 그런 마음을 자연스럽게 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남에게도 인색하지만 우린 우리 자신에게 가장 인색하게 구는 것 같습니다. 항상 뭘 해도 부족한 것 같아서 스스로를 닥달하거나 자책하는 마음이 제일 먼저 올라오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자기 자신에게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함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희귀함은 바다거북이가 백년 만에 한번 수면으로 머리를 내미는 그 순간 망망대해에 떠있는 작은 나무 도막에 부딪칠 확률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더구나 공부와 수행의 인연 속에 있는 것은 수많은 전생에서 선업을 쌓아야 가능하다고 하네요. 인간 아닌 다른 중생들 혹은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럼 불행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비교하거나 부정하려는 것이 의도는 없습니다. 나의 존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은 나를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제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 이렇게 명상하고 공부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감사하다보니 나를 있게 한 모든 물질적, 인간적 조건으로 계속 확장되면서 온 우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희심보다 자신에 대한 희심이 인색한 습은 언뜻 보면 남을 위하는 성향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온전히 긍정하지 못하는 자책, 열등감에 뒤에는 더 잘난 나에 대한 아상, 아만, 아애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 것 같더라구요. 그런 허상으로서의 나에 대한 집착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나에 대한 희심 명상을 통해 대놓고 나를 무한 긍정하는 연습을 해보려고 합니다.

2. 4학기 에세이 구상 토론

4학기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절인연들 속에서 만나는 이슈들을 불교적 관점에서 풀어보는 글쓰기를 계획 중입니다. 선택하신 주제들을 같이 이야기하다보니 각자의 삶에서 고민하는 지점과 사회적 이슈들이 맞물리는 분들도 있고, 약간 동떨어진 주제도 있었는데 어찌되었든 자기의 고민의 지점과 맞물리는 지점이 있어야 밀도 있게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긴 합니다. 생각 중이신 주제들은 특정 사건에 과도한 분노와 관심을 표출하는 우리 시대의 분노와 화, 사회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괴로움에 대한 취약성, 코로나 시대의 안전과 위험이라는 문제, 노년에 대해, 육아로 인한 우울의 문제 혹은 가족의 문제, 불안과 걱정의 문제로 시작해서 일상을 수행자로 사는 문제로 연결해보려는 시도, 청년들의 냉소와 한탕주의, 생태주의 등에 스며있는 단멸론적 태도들에 대해서, 감각적 쾌락과 중독의 문제들이었습니다. 2주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다음에는 조금 더 구체화해서 왜 그 주제를 선택했는지, 자료조사 등 간략하게라도 써온 물건을 들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3. 이띠붓따까 낭송 및 천개의 고원 토론

천개의 고원 중 8고원의 제목은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입니다. 단편소설들은 벌어졌던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서사구조가 아니라고 합니다. 육하원칙에 따라 누가 어디서 등등이 모두 써있다한들 그것이 어떤 사건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 방식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 지각될 수 없는 것들, 인식될 수 없는 것들이 펼쳐지는 것이 사건 그 자체입니다. 영원히 말해질 수 없기에 비밀이기도 합니다. 사건 그 자체가 펼쳐지고 흐르고 운동하고 있을 뿐인데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원망하고 복수하고 절망합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선들이 펼쳐질 뿐인데 어떤 지점과 다른 한 지점을 연결한 후 뚝 잘라내서 '행', '불행'으로 절편화하며 각자 다르게 의미화하면서 그 속에서 주체로 작동합니다.

사건 또는 우리 삶 자체를 연결하는 세 가지 방식의 선이 있습니다. 그램분자적인 견고한 분할선, 분자적인 유연한 분할선, 도주선. 원인에서 결과로, 과거-현재-미래처럼 단선적인 시작점과 종착점, 혹은 여자와 남자, 선생과 학생, 민족, 어떤 지위와 신분 등으로 명확한 구획과 정의를 가지고 삶을 바라보는 방식은 견고한 분할선을 긋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견고한 분할선은 의도치 않은 사건들을 통해 파열되며 유연한 분할선을 만들어냅니다. 어떤 일을 겪음으로 인해 우리는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됩니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주체화의 근거로 삶았던 절편들이 작동하지 않는 순간, 도주할 기회임에도 대부분 더 강력하게 흰벽(의미화)과 검은 구멍(주체화)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세 가지 선은 순서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서로 엇갈리고  중첩되기도 합니다.

지난 학기 저희 각자가 삶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에세이로 풀어내는 과정이 단편소설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란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견고한 분할선으로 나누어진 절대적 절편들 속에서 살던 삶, 자신이 확신했던 생각이나 지식으로는 뚫을 수 없는 사건들과의 만남, 파열된 분할선을 통해 공부라는 도주선을 탔지만 재영토화 되는 방식이 아닌 공부란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글들이었습니다. 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흐름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영토화는 나쁘고 탈영토화는 좋은 거라는 이분법적인 생각도 너무 도식적인 사고로 보입니다. 탈영토화는 언제나 재영토화와 같이 합니다. 도주선을 탔지만 그 도주선이 또 견고한 분할선을 그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변화과정을 보아도 신진세력이 구세력이 되버리는 것은 순간이죠. 한번 도주했다고  어떤 지점에 도달해서 멈춰있는 것은 도주가 아닙니다. 그저 달아나는 도망이 아니라 도주한다는 것은 무엇인지도 곰곰이 생각해볼 지점인 것 같습니다.

도망은 어떤 제한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도주선은 그 제한이라고 생각하는 배치 속에 이미 있습니다. 이미 있다는 말은 그 배치 속에서 어떤 계열의 선을 그릴 수 있는가, 어떻게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가처럼 미끄러짐의 문제처럼 들립니다. 어떤 사건 앞에서 불행과 고통이라는 방식의 계열을 연결하는 선을 그으며 계속 고통스러워할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이 왜 고통인지를 파보는 계열의 선을 연결할 것인지 각자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도주선을 그린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분별을 떠난 자리에서 선사들이 문자 그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할 때 아무런 걸림이 없듯이 말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도주라기보다는 그 제한적 조건에 정박하고 있는 ‘주체’라는 상을 계속 깨는 것, 그 주체가 드러나는 방식을 촘촘히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기관없는 신체를 작동시키고, 얼굴성을 지우고, 도주선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교의 무아를 통해 우주적으로 확장된 나를 발견해야 하듯이, 견고한 주체를 깬 자리에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홀로된 자, 나그네,  아무것도 아닌자로의 생성이  도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엄중한 미션입니다.

마침내 홀로 되기 위해 그리고 선의 다른쪽 끝에서 참된 분신을 만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자아를 해체해버리기. 움직이지 않는 여행을 하는 은밀한 나그네, 모든 사람들처럼 되기, 하지만 그것은 바로 아무도 아닌 자가 되는 법을 아는 자,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자를 위한 생성일 뿐이다. 그것은 회색을 회색으로 스스로 칠하는 것이다. (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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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6 18:10
    정성이 뚝뚝 묻어나는 후기 보시에 희심이 절로 일어납니다. 평소처럼 수업 같이 하고 간 복희샘. 얼굴 자주 볼 수 없지만 잘 지내길 바랍니다.

  • 2021-08-29 10:51
    경아샘의 희심명상에 대한 마음이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더불어 샘이 계시니 들뢰즈와 가타리 앞에서 쫄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