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8월 16일 3학기 3주차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8-20 14:03
조회
2654
 

 

수희찬탄의 세미나

오랜만에 모여 앉은 자리여서 그런지 기운이 더 따스웠던 것 같습니다.

희심명상에 대해 배웠습니다. 희심은 부러움이나 질투심이 섞여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기쁨입니다. 마치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에 수희찬탄하며 춤을 추는 제자들의 모습과도 같이요. 그런데 이 마음이 저희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쉽게 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여러 인간관계나 기억, 표상들이 얽혀서 그렇겠지요. 그래서 진심으로 존경하는 대상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존재, 그들의 성취, 그들이 나눠주는 영향력에 대해 기쁨의 마음을 가져보는 거죠. 많은 도반님들이 마음이 푸근해졌다고 하네요. 그런데 저는 요즘 배우는 루쉰을 떠올렸더니, 기쁨보다도 그 치열한 세월동안 닳고도 그을렸을 모습에 먹먹한 마음이 일고 말았습니다. 아직 수행의 힘이 많이 부족한가봅니다.

이 수희찬탄의 기분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은 공통과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였습니다. 샘들은 도반의 생각과 마음의 힘이 한발 나아간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셨습니다. 늘 어려웠던 자기 관찰의 시도가 돋보이는 글들이 있었고, 일상 속 분리수거의 냉소와 단멸론를 연결시킨 글들, 자신의 공부를 돌아보거나 개념을 위주로 생각들을 나눈 글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감수성 약한 저조차 희심이 이런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복희샘의 글이었습니다. 이란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복잡하던 차에 채운샘의 강경한 요구가 겹쳐서 마음이 많이 무거우실 거라 내심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공통과제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경외감? 희심? 뭔지 몰라도 무척 멋지시고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습니다. 그 마음에 표상을 덧붙이고 장작을 늘려가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세우고 마주하는 ‘마음의 근육’을 말이죠! 찬탄의 말들이 전달되고, 자신의 문제지점을 돌아보는 데에도 도움을 주어 고맙운 마음이 든다는 샘도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이로움을 위해 질문하고 답하며 공부한 것이 다른 이들도 이롭게 한다는 자리이타의 마음이라는 말씀도요.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특별한 상태’라는 생각이 실은 굉장한 아만이라는 통찰이 와닿았습니다. 내 마음, 조건, 상태가 특수하니 인정받아야 한다는 심리는 저에게도 무척 빈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당화는 덧붙으면 덧붙을수록 억울함과 분노의 정념의 불을 증폭시킬 연료일 뿐이죠. 그 불의 열기에 마음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몸의 변화와 양상을 관찰하고 묘사하고 다른 방향으로 돌이킨 그 팽팽한 마음의 힘이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습니다. 그 힘은 어중간하게 내빼지 않고 자신의 막다른 처지와 속생각을 용기있게 다 말해볼 때 더 강해진다는 이야기가 공감되었습니다.

 

어떻게 저열해지지 않고 이 시기를 겪어갈 것인가?

채운샘께서는 ‘설법의 경’에 나오는 “그대들은 악을 악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구절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주석에는 “악은 저열하기 때문에 악이다”라는 설명이 나오는데요. 이것은 마치 니체의 귀족주의를 떠올리게 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귀족은 ‘내가 어떻게 내 삶을 고귀하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귀족입니다. 노예는 ‘내가 오늘 잘 먹고 괴롭힘 당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생각뿐이죠. 판데믹을 살아가는 지금이야말로 이 두 질문이 가장 절실한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부처님은 궁핍이란 지혜가 궁핍한 뭇삶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코로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궁핍하고 저열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제게 무척 크게 들렸습니다. 편안한 연구실에서 팔자 좋게 공부하면서 바깥의 난리는 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보면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뿐 아니라 생각의 폭조차도 묶어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인이 아침마다 동일한 행동을 합니다. 확진자와 사망자 수를 확인하는 것이죠. 코로나 소식이 뉴스를 가득 메웁니다. 우리는 거리두기의 연장과 백신 문제를 생각하고, 접촉을 줄이고, 배달시키고, 줌에 접속합니다. 어떻게 하면 코로나에 걸리지 않을까만이, 어떻게 더 안온하게 보낼 수 있을까만이 저희의 주안점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소식과 우리의 안전 바깥에는,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외면당하고 있는 훨씬 더 뿌리 깊은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프간에서는 국가가 뒤집혀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백신도 인권도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돌보지 못하는 오렌지밭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더 많은 배달업 종사자들이 새벽에 뛰어다니게 되고 곳곳에서 홍수와 가뭄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빨리 백신을 내놓으라고 안달하는 우리와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코로나의 문제가 대체 생태의 문제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아니면 무슨 문제겠느냐는 질문은 계속해서 생각거리를 남깁니다. 지혜가 궁핍한 이상 우리는 아무리 먹을 게 많고 입을 게 많아도 여전히 궁핍하다는 말도요.

이제 우리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일하는 것, 밥 먹는 것, 노는 것, 친구를 사귀는 것도 전과 같지 않습니다. 채운샘은 접촉의 관점이 달라진 지금이야말로 인간을 다르게 사유할 기회라고 하셨습니다. 좁아진 활동 반경에서 어떻게 이전의 감각적 쾌락을 극대화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굉장히 저열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부추기는 온갖 서비스와 신제품이 넘쳐나지만 우리는 여기서 잠깐 멈추고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안전 우리의 즐거움 우리의 불만이 조금 부끄럽지 않은가 하고요. 채운샘은, 철학은 삶을 더 풍족하게 해주진 못하지만, 우리 삶을 변환시킬 수 있게 하는 힘을 기르게는 해준다고 하셨습니다.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삶을 항상되게 가져가는 힘을 기르게 한다는 것이죠. 분산된 때일수록 중심을 잡는 것이 저와 모두의 공부의 방향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혜나 자비와 연관된 행위를 매일매일 하는 그 삶에는 영성이 묻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또 하루를 보내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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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0 22:00
    나날에 영성이 묻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