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글쓰기> 8주차 후기

작성자
복희
작성일
2021-07-01 00:18
조회
2677
210628 2-8차시 수업 후기

<법구경-담마파다>

2학기 경전 담마파다가 끝났습니다. 이번 주에 마지막 공통과제를 토론했지요. 저를 비롯한 여러 도반님들이 낭갈라꿀라에 대한 글을 쓰셨습니다. 잠시 경전의 구절을 들려드릴게요.

스스로 자신을 훈계하고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라.

자신이 수호되고 새김이 확립되어 그대는 수행승으로 안락하게 지내리.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이고 자신이 자신의 안내자이다.

그러므로 상인이 훌륭한 말을 다루듯 그대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라. (법구경-담마파다/731)

넝마옷을 입고 쟁기질을 하며 살아가던 낭갈라꿀라가 한 수행승의 권유로 출가하여 생활하다가 출가생활에 불만족스러운 마음이 일어나 세속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다 과거에 입던 넝마옷과 쟁기를 보고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창피함도 모르고 이것을 걸치고 방황하며 품팔이로 살려고 하는구나!”라고 약해진 마음을 훈계합니다. 불만족이 일어날 때마다 넝마옷과 쟁기를 보며 마음을 다스리고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도 좋아하는 공부를 하면서 잘 살다가도 문득 불만족스러운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 우리에게 초발심을 되살려줄 각자의 넝마는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형성한 습관, 관념의 구조를 바꾸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냥 업습이 일어났구나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형성된 습관을 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관성의 힘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죠. 습관적으로 자책, 분노, 슬픔, 두려움 등 일어날 때, 그것이 일어나는 매커니즘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서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무엇에 대한 집착에서 일어나는지. 명예에 대한 집착인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인지, 아만인지 등등. 치열하게 분석적으로 지혜수행을 통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신만의 집착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나서 그것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의 수행을 찾아봐야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만트라를 암송한다고 할 때도 아만이 일어날 때 암송할 만트라와 육체에 대한 집착이 일어날 때 외울 만트라는 아마도 다를 테니까요.

분노와 스피노자의 슬픔을 연결한 도반의 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분노 속에는 쾌감도 숨어있지만 슬픔도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분노를 없애면 슬프지 않다고 하셨어요. 스피노자에 의하면 슬픔이란 자신의 역량을 끌어내리는 수동적 정서지요. 분노를 표출할 때 우리는 분노를 발산하면서 순간적으로 시원한 쾌감을 느끼지만 이내 마음과 몸이 쳐지고 힘이 빠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내 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분노로부터 나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지요.

<천개의 고원>

지난번 강의에 이어 6고원 기관 없는 몸체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어쨌든 몸체라고 하니 ‘기관 없는’이라는 말이 앞에 붙어 있더라도 뭔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CsO(기관 없는 몸체)를 道나 氣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철학에서는 개념이 중요한데 그 개념을 정의하는 언어, 문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무엇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게 해주는가 하는 개념의 용법이 중요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개념을 정의하는 순간 정의에 갇혀버리게 되므로 일부러 CsO가 무엇인지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열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6고원의 제목이 ‘CsO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CsO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인가 봅니다.

6고원에서 설명하는 CsO는 유기체에 반하는 개념입니다. 유기체란 할당된 기능을 가지고 작동하는 체를 말하는데 국가, 사회, 조직, 가족, 몸 등 어떤 체이든 유기체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가를 유기체로 본다는 것은 개인을 국가라는 공동체가 기능하게 만드는 부품으로 보는 것, 즉 구성원들을 전체를 위한 하나의 부분이라는 규정성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기계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으로 볼 때, 우리는 보통 기계가 고장을 일으켜 만들어진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것이 문제라고,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체도 팔 다리가 각자 해야 할 기능이 있다고 규정할 때, 만약 팔 다리에 이상이 생겨 그 기능을 하지 못하면 비정상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은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이죠. 기계는 고장나면서 작동합니다. 변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리가 없다면 휠체어를 다리로 삼으면 됩니다. 우리는 다리가 없다는 데에 집중하여 비정상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몸이 변형된 것이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기능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유기체는 규정에 벗어나는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변형을 싫어합니다. 전체를 계속 변형시키는 이탈의 힘을 가로막고자 합니다.

유기체가 변형을 싫어하는 것과 상관없이 유기체도 바깥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하면서 존재합니다. 여기서 바깥이 바로 CsO입니다. 유기체와 CsO는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 다른 것에 의해 침투당하고 있는 무엇, 무엇이지만 무엇이 아닌 것과 동시에 있는 것, 되어가고 있는 무엇이라고 들뢰즈 가타리는 존재를 발생의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교적으로는 색즉시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규정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조건에 의해 그런 현상으로 나타날 뿐이고, 현상이지만 그 자체로는 공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늙고 아프고 죽는 것은 체가 변형되는 것입니다. 외부의 기, 도 혹은 CsO가 변형을 가능하게 합니다. 외부가 없다면 변할 수 없습니다. 늙고 아프고 죽는 것은 자연이 나에게 주는 것이고 생명이 욕망하는 것이지 비정상이 아닙니다. 내부와 외부, 유기체와 CsO, 규정된 몸체와 규정되지 않은 몸체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모든 유기체 안에 유기체로 환원되지 않는 변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외부를 내재하는 외부라고 말합니다. 나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타자, 동시에 나도 타자를 만들고 있기에 내재하는 외부입니다. 그렇게 우리와 동떨어진 타자, 바깥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내기 전에는.

강렬함이란 intensity, 내적인 텐션을 말합니다. 외적 텐션은 우리의 외형, 키나 몸무게 등이라고 한다면 내적 텐션은 내적인 힘, 내공 같은 것을 말합니다. 강렬함=0에서 0이란 일종의 알 같은 상태를 말하는데 텐션이 가득한 상태이지만 밖에서 볼 때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표현합니다. 텐션의 균형이 깨질 때 알이 탁! 하고 깨지는 것이지요. 난초의 이파리 하나가 그려지는 순간 우주가 갈라진다는 표현이 있다고 합니다. 선을 그리는 순간 0이였던 균형이 깨지는 것이지요. 강도=0의 세계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세계입니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세계, 자기를 비운 상태입니다. 나를 고집하면 변형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정점을 향해 가게 하지도 않고 외적인 종결에 의해 중단되게 하지도 않는 그런 방식으로 구성되는 연속적인 강렬함의 지역들을 베이트슨은 고원이라고 부른다. (303)

고원에 대한 정의를 끝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천개의 고원>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치겠습니다. 7번째 고원 부터는 다음 학기에 계속됩니다~
전체 3

  • 2021-07-01 21:37
    저의 넝마옷과 쟁기는 무엇일까요...흑흑ㅜㅜ
    우리 도반들끼리 나누었던 강렬함에 대한 이야기는 틀리지 않았네요..^^ 정제된 언어는 아니어도 도반끼리 토론하는 재미가 새삼 느껴집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 2021-07-01 23:39
    보키샘의 후기가 오늘따라 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란으로 출국하시기 전 마지막 후기가 아닐까 싶어서인가 봅니다. ㅠ
    보키샘은 이란에서 어떻게 기관없는 신체를 만들어 가게 되실지...!!! 일단 법구경을 들고 가시는 것만으로도 '법구경 in 테헤란'의 흥미로운 실험이 기대됩니다. ^^

  • 2021-07-02 09:43
    샘의 차분하면서 치열한 고민을 같은 공간에서 나누지 못해 못내 아쉽지만 그 아쉬움을 '보키의 법구경 인 테헤란' 을 통해 달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