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7월5일 9주차 후기

작성자
경아
작성일
2021-07-07 11:08
조회
2811
불교와 글쓰기 7월5일 후기

다음 주 제출할 에세이 초안을 읽고 도반들끼리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0쪽 글을 읽기에만 30분씩 걸리고 거기에 한마디씩 보태다 보니 6시가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제가 듣고 해석한 내용을 적어봅니다. 공통적으로 키워드가 부재하다보니 에피소드만 살고 맥락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제도, 제목도 부재 중입니다. 붓다와의 만남이 무얼까에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붓다는 무얼까요, 불교는 나를 어떤 자리로 데려다 주었을까요, 제대로 만나기는 했을까요? 뚜렷했던 이미지의 색조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무엇보다 우리 힘 빼고 써 봐요. 저에게 거는 주문입니다~

- 타인의 시선에 갇히는 문제로 고민하는 선생님은 욕망을 숨기기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자기 욕망이 그렇게 숨기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아는 데까지는 이르렀습니다. ‘좋은 관계, 착한 나’라는 이미지를 지키려는 쾌가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쾌보다 클 뿐이지 결코 참거나 남에게 양보가 아니였죠. 그런데 느낌이 문제라고 하셨는데 촉수상행식에서 수는 느낌(차갑다, 부드럽다)이고 그것을 좋다, 나쁘다로 판단하는 것은 상행식이 같이 작동하는 정서가 아닌지요? 느낌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나도 남을 욕하니까, 서로의 옳음에 대한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누군가 나를 욕한다면 그것을 감당하면 된다고 했는데, 감당한다는 것이 매번 알아차림 하지만 똑같은 행이 반복되는 것마냥 여전히 수동적으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감당하고 지켜보면서 적어도 자기 비하를 하거나 감정에 매몰되지는 않을 수 있으나, 반복되는 패턴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벌어진 일에 대해 연기적이라는 사후 해석보다는 그것이 연기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는 발생 지점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스킵된 것 같습니다. 타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사실 타인의 시선이라 하지만 자기가 보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타인에 대한 생각, 소통에 문제에 대해서도 무언가 있지 않을까요.

- 대상과 장소를 바꿔가면서 겪는 관계의 불통 패턴을 찾기 위해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모두 풀어보는 미션을 수행 중입니다. 10년 전에도, 작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음에도 어떻게 이 문제를 대해야할지 막막해하는 모습에 저희도 같이 막막했습니다. 아직 억울함이나 자신에게 쌓였던 감정이 다 드러나지 않은 것 같은데 이것을 머리로 이해한 공부로 좋게 마무리해보려니 힘들어 보였습니다. 이상적인 어른의 태도, 공부하는 사람들, 화목한 관계 등을 이미지로 가지고 그에 대한 기대가 커서 실망도 컸다고 하지만 그 속에서 정작 본인은  마음을 어떻게 썼는지가 안 드러납니다. 상을 걷어낸 자기는 어떤 사람인지, 어른인척 하지만 관심과 이해만을 바라며 속으로 보채고 삐지는 모습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해야하지 않을까요? 그 미워하고 억울한 마음을 솔직하게 써보라는 조언도 있었습니다. 특히 자기에게 어떤 외적인 힘이 주어졌을 때 그 힘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쓰는 것에 대해 집중해야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반응을 분석해봐야 서운함과 억울함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에 반응했던 나의 마음으로 중심이동했으면 합니다.

- 몸과 병에 대해 분석한 개론서 같고, 글을 통해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인식의 전환이 보이지 않습니다. 불교와의 만남이라기보다는 니체로 풀어간 글입니다. 불교에서의 몸에 대한 인식, 붓다의 병, 부정관 등 불교와의 연계성을 살려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몸에 대한 무상성을 통해 공포, 걱정, 두려움을 뚫는 것을 본인의 이야기로 풀어야 하는데, 머리로 뚫고 나가는 개론서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공감이 되지 않고 어렵게 읽힙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회향의 글이 될 것 같습니다.

- 의미있는 삶에 질식해서 재미있는 삶으로 도망갔다 뒤통수 맞으시고 피곤해진 도반님이 삶의 변곡점을 그 전보다 세세하게 풀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피로, 피곤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 무엇에 대한 피곤함인지, 스스로 책임져야한다는 중압감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 책임감을 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행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피곤하다고만 하는 그 지점에도 분명 어떤 쾌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이 점점 구체화되고 있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키워드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도망과 탈주, 과보와 윤회 등을 이야기하지만 첫 번째 에피소드 이후 글의 내용들이 하나로 꿰어지기보다는 이것저것 가져다 연결한 듯 맥락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 엄마에 대한 마음, 명예퇴직 했을 때의 마음들을 내비치기는 했으나 확 드러내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불교 이론으로 촘촘히 풀어내셨으나 그것보다는 선생님의 마음을 보고싶습니다. 자기연민, 슬픔, 억울함 등은 과거의 감정이 아니라 지금 기억들을 소환할 때 드는 감정들일 수 있습니다. 그걸 쭉 써보시는 것도 방법일 것 같습니다.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세상은 왜 나한테만 이러지, 적어도 이 정도 했으면 어느 정도 결과가 있어야하는 것 아니야 라는 여러 가지 전제에서 작동하는데, 선생님의 전제들이 무엇인지 사례를 통해 치밀하게 써보시는 것이 어떨지요. 그리고 별일 아닌 것에 불편한 마음이 든다고 하는데, 본인에게는 별일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일 텐데 왜 그걸 별일 아니라고 문제시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시는지요?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임지고 할 도리를 하면서 힘들어하시는 데, 그것도 그런 방식으로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별일 아닌 듯, 하기 싫어도 한다고 하시는 자잘하다고 밀쳐내는 마음들이 사실 선생님의 가장 큰 불편함처럼 보입니다.

- 감각적 쾌락을 벗어난다는 말 자체가 이분법적으로 들립니다. 감각적 쾌락을 벗어난 이상향이 있다는 뉘앙스입니다. 불교와의 만남 에피소드들은 좋으나 뒤편으로 갈수록 불교 정답지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흘러가서 글을 쓴 후 본인이 정작 힘을 얻거나 무언가 작은 거라도 해결됐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조금은 지루한 글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회향으로서 글이라고 가르치듯 설명하듯 쓰는 글이 지금 우리가 써야하는 글은 아닐 듯 싶습니다. 자기 문제를 치열하게 풀어낸 글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 문제로 공감될 때 회향이 될 것 같아요. 감각적 쾌락이라고 말과 욕망이라는 말은 뉘앙스가 많이 다른데, 그 둘은 어떻게 달라서 굳이 감각적 쾌락이라고 쓰는지도 궁금합니다. 에피소드들에서 고민했던 감각적 쾌락과 지금 현재 진행 중인 고민의 접점이 잘 안보입니다.

- 8주차까지 글 진행되지 않아서 고민하시던 분이 부실한 몸을 통해 불교를 만난 과정을 쭈욱 풀어 오셔서 좋았습니다. 몸의 문제로 계속 직진을 할지, 거기서 마음의 문제나 자비의 문제 등을 어떻게 엮어갈지는 글을 더 써보면서 정리해야할 부분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너무 방만해지면 글이 집중도가 떨어지고 산으로 갈 수 있으니 몸이라는 키워드를 꼭 잡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불교를 자기 단련으로 방편으로 삼을 때 계속 “굳세어지는” 방향으로만 맹신하는 듯한 데 만약 현실적으로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벌어지면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합니다 . 불교가 몸도 마음도 굳세게 만들어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니까요^^ 아직은 부실한 몸을 벗어나고픈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은 아닌지 그 지점을 더 보았으면 합니다.

- 자신에 대한 인색함을 써오다 갑자기 통큰 자비로 방향을 돌리신 도반에게 눈치 빠른 불교샘들이 ‘당위’를 본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나’, ‘열심히 사는 나’라는 상이 떡하니 있으니 공부가 잘 안 되는 것 같으면 얼마나 자기를 채찍질하겠습니까. 공부뿐이겠어요 뭐든 아마 열~씨미하며 살아왔을 도반에게 그 열~씨미에 깔린 것을 한번 들쳐보라는 조언들이 이어졌습니다. 공부는 왜 하는지, 왜 열씨미 하는지 등을 보는 게 먼저 일 것 같습니다. 나에 매몰된 상태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도 봐야지라는 당위가 아니라, 왜 나에만 매몰되었는지 파보는 과정에서 전제가 깨지든 그 근방 언저리라도 가보게 되는 거 아닐까요.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가볍게 써보셨으면 합니다. 가벼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힘주기보다 힘 빼는 게 더 어려운 것은 알지만 말입니다.

- 새로운 경험담이 마지막 9주차에도 등장하는 정말 파란만장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경험담이 신기하기는 하나 글을 쓴 사람이 쏙 빠진 전지적 작가 시점입니다. 선생님을 보여주세요~ 우리 글은 일차적으로 자기를 위해 쓰는 것이지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닌데 말입니다. 불교의 연기도 그냥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조건으로 해석해버리시고 본인은 쏙 빠지셨습니다. 왜 자꾸 사라지는 겁니까? 배치만 남고 나는 어디로 갔습니까? 과연 그 모든 경험과 사건들이 조건 때문이고 나는 원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요? 누구보다도 자기 욕망을 충동적으로 실현하며 사신 듯한데 말이죠. 에피소드 하나 만이라도 붙잡고 그 때 우글거렸던 그리고 지금도 우글거리는 마음을 보여주세요. “별 볼 일 있는 사람”, “좋아하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는 말처럼 선생님을 움직이게 했던 그런 말들과 마음, 이미지를 붙잡고 후벼 판 글을 기대합니다. 노모어 경험담!

모쪼록 마지막 퇴고하시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다음 주에 뵈요~
전체 5

  • 2021-07-07 12:27
    뭐라도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힘을 얻어갑니다!!!^^
    명심할게요!! 힘빼고 쓰기!!!!

  • 2021-07-07 13:02
    잉여도 수사도 없이 필요한 조언만 날카롭게 콕콕 들어있군요!
    그 밑에는 응원이 있네요. 월요일에 웃으며 만나요!

  • 2021-07-07 20:02
    흐흥.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후기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우린 현숙샘의 빈자리를 채워가네요. 없던 애교가 절로. 홍홍홍

  • 2021-07-08 07:16
    오마나, 그 많은 얘기들을 요로콤 콕 집어 정리해주신 경아샘 수희찬탄 합니다~ !!! 코멘트들 중에서도 내게 불편하게 걸리는 지점이 더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겠죠? ^^;; 월욜에 한 주간 더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를 가지고 만나요. 모두 화이팅입니다요... _()_

  • 2021-07-08 16:05
    보내주시는 응원에 감사함이 계속 솟아나는데 이를 다 담을 말이 없습니다.
    정신차리고 제 마음으로 중심이동 해보겠습니다.
    월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