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사성제 팔정도 세미나> 정념正念, ‘바른 사띠’

작성자
경아
작성일
2021-07-01 09:47
조회
2850
<2021.06.28. 사성제, 팔정도 세미나 후기>

이번 시간은 팔정도의 7번째 정념正念, ‘바른 사띠’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붓다의 옛길, 308쪽)
부처님께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에서 자리自利는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이기적인 행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자기 수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향한 공부는 결국 하나로 통하는 듯합니다. 오롯한 자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점차 알아가는 것이 자기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이도 하면서 동시에 자연스레 다른 이들을 향한 자비가 생겨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리이타는 따로 떼어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공부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보호하는 수행법이 바른 사띠, 알아차림입니다. 마침 주말에 티벳 린포체님의 알아차림 명상 세션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알아차림은 팔정도의 수행법이자 우리 마음의 본성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명상의 두 가지 목적 중 첫째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본성이 바로 알아차림(awareness)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아차림은 순수하고, 평화롭고, 자비로운데 우리가 그것을 놓치고 있을 뿐입니다. 생각, 감정 등과 같은 구름들이 수시로 나타났다 사라져도 하늘과 같이 맑은 본성인 알아차림은 그대로라고 합니다. 두 번째 명상의 목적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삼아 알아차림을 챙기는 것입니다. 몸의 감각,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 폭류같은 생각, 격한 감정, 미세한 감정, 행주좌와, 수면 등 일상이 모두 알아차림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알아차림을 놓치는 그 순간을 알아차리는 방법으로도요. 불방일의 팁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왜 알아차림을 챙겨야 할까요? 알아차림을 통해 우리가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밥을 먹지만 핸드폰을 보느라 씹는지 삼키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분노를 토해내고 있으면서도 우리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모르고 뒷목 잡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잠에서 일어나 깨어있는 모든 순간에 진짜 깨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일 뭘 할지 걱정하면서 또는 어제 놓친 것을 후회하면서 지금을 그냥 덤처럼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것은 지금밖에 없는 데도 그 모든 기회를 다 놓치면서 말이죠.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인 방일하지 말라는 불방일은 알아차림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당부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바른 사띠(정념)와 바른 견해(정견)이 같이해야 가능합니다. 어제 보았던 영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을 그저 눈치 챘다는 것만으로 바른 사띠라 할 수 없습니다.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함이고 다른 말로 하자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습니다. 우주는 우리를 기쁘게 하려고 또는 우리를 해코지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누군가에 갑작스러운 비는 재해이고 누군가에게는 감상에 젖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부분을 가로채서 ‘괴롭다’, ‘즐겁다’로 이름 붙이는 것이죠. 그 조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나 생각일 뿐 그것을 실체로 집착할 필요가 없는데도 무슨 보물마냥 부여잡고 놓지를 않습니다. 집착할 필요가 없다기보다는 실체가 아니니 집착할 수 있는 대상은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죠. 이 세계는 조건 지어지고 고정된 것이 없다는 무상, 무아, 고, 연기라는 바른 견해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바른 사띠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바른 사띠를 통해 바른 견해가 체화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맛지마니까야>>와 <<디가니까야>>에 ‘마음챙김의 확립 경’은 수행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신수심법身受心法(몸, 느낌, 마음, 법)을 관하는 사념처四念處 수행은 깨달음으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호흡관찰, 몸의 부분들을 천천히 관찰하는 것, 걸음명상 등은 신념처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수념처 수행은 지금 일어나는 감정을 보기도 하고, 혹은 자신이 쉽게 휩싸이는 감정을 불러와 그때의 몸의 변화와 떠오르는 이미지 또는 어떤 목소리 톤 등을 조각조각 잘라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정은 그냥 ‘분노’, ‘부끄러움’ 등으로 뭉뚱그려서 추상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체를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이런 세세한 알아차림을 통해 생각, 감정, 느낌 등이 바로 그 자체로 있지 않다는 것, 흘러왔다 흘러가는 무상한 것임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것에 순간 휩싸이거나 빨리 수습해서 제거하려고만 합니다. 그것에 휩싸인다는 것은 감정을 그냥 나와 바로 포개는 방식이고, 빨리 수습해서 제거하려는 것은 감정에 좋고 나쁨을 붙이기 때문입니다. 제3의 방식, 알아차림은 감정이 올라오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감정을 일단 빨리 수습해버리지 않고 인정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 감정과 거리가 만들어지면서 지켜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거기서 멈춘다면 동일한 감정이 계속 반복되는 윤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알아차림과 더불어 그 감정의 발생과정을 하나하나 잘게 쪼개는 분석수행을 통해 그것이 허상임을 스스로 납득해야만 그 감정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투철하게 이해했을 때에 비로소 다른 행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발심이 가능합니다. 정념과 정견의 콜라보가 우리 공부의 핵심인 듯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붓다의 옛길』 팔정도 중 마지막 ‘바른 집중’를 집중해서 읽어옵니다.
마지막 발제는 ‘모두의 발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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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1 22:21
    정념과 정견의 콜라보... ㅋㅋ 핵심 맞네요~! 경아샘께서 린포체님의 명상 세션을 듣게 될 것을 이 우주(?)가 눈치채고 정념의 발제를 맡겼나 봅니다. 정념 실습의 생생함이 살아있는 발제와 후기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