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사성제 팔정도 세미나> 3회 세미나 후기 및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5-04 11:47
조회
2748
불교와 글쓰기 수업은 달콤한 방학이었지만 3주차를 달려가고 있는 사성제-팔정도 세미나를 멈출 수는 없죠! 휴가를 즐기시던 샘들 모두 봄기운을 받으셔서인지 즐거운 마음으로, 이른 시간에 찾아오셔서 셈나는 활기차게 시작되었습니다. 경아샘도 줌으로 참여해 주셨구요.

이번 주에 읽어온 텍스트의 주제는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 고통의 원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주로 토론한 내용은 연기와 결정론, 상견과 단견, 업과 윤회, 내면의 적으로서의 번뇌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붓다의 옛길>을 입발제를 맡았는데, 기초개념이 부족해서인지 조금 뜬금없는 질문들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우선 ‘연기는 결정론이 아니다’라는 구절에 의문이 들었는데요. 현상의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외부적 요인(물리적 환경)뿐 아니라 내부적 요인(정신적, 심리적 원인)도 있다는 설명이 어딘지 불충분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주는 반면, 인간의 정신은 물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붓다의 옛길>, 99쪽) 저는 이 문장을 읽고 결정론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물질적 차원인 마음이 물질적인 차원인 신체에 영향을 미치기에 결정론이 아니라는 설명에서는, 결정론이란 물질들의 기계적 인과법칙임을 전제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외부요인이 결정한다는 생각이나 또는 내부 요인(자체 요인)이 결정한다는 생각은 아주 유치한 구분인 것 같습니다. 과학에서조차 결정론은 그렇게 얘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인들이 결과를 낳는 상호작용의 연속 과정을 말합니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의 상호작용 전체’가 결정론이 아닐까요. 빈틈이나 단절 없이 다음의 양상을 낳는다는 점에서 말이죠. 그럼 결정론이 아닌 건 뭐냐 하면, 중간 단계 없이 도약하는 것, 원인 없이 튀어나가는 것, 같은 것이 다른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등의 불연속적 현상입니다.

저의 이런 의문에 대해 경아샘과 현숙샘께서 대답해주셨습니다. 우선 경아샘께서는 양자역학에서 보이는 불연속적 운동들도 원인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점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양자가 도약하는 사건에서의 원인은 다름 아닌 관찰자의 자리 혹은 의도였습니다. 즉 우리의 지성 및 관찰로는 다 포착할 수 없는 수준에서의 관계적 원인들이 현상을 그러그러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라이라마 사성제>에서는 ‘잠재적 성향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현숙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업과 인과 과정의 흐름을 불교에서는 두 가지로 분석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연의 인과 법칙 과정만 작용하는 자연의 영역이며 다른 하나는 잠재적 성향들이 인과적 상호작용에 의존하는 영역이다.”(97쪽)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가 인과 과정을 생각할 때 드러난 차원의 요인들만을 고려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보이는 복수적 요소들 뿐 아니라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원인들이 관여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정한다’는 말 자체가 공허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마치 몇 가지 꼬집을 수 있는 원인들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니까요. 물론 지금도 뾰족하지 않고 혼란스럽지만 연기라는 사고가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갈애의 세 번째 유형인 ‘영혼 소멸’에 대한 갈망이 불경에서 말하는 소멸을 바라는 발심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비존재에 대한 갈망, 즉 단견인데요. 저희는 단견이 허무주의이자 불쾌한 모든 것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임을 배웠습니다. 이 단견이 염리심 혹은 윤회를 끊으려는 마음과 차이인 점은 그것이 갈애라는 점입니다. 즉 이때의 불쾌감은 실체화된 감정이고 분별의 결과로 발생한 싫음입니다. 즉 무지의 결과이고 그 자체로 번뇌인 것이죠. 그렇기에 단견에서 전제하는 불쾌는 그 원인과 발생의 차원을 고려하고 통찰함 없이 그저 부정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한 소멸과는 전혀 다릅니다.

업과 윤회와 관련해서는, “업의 힘, 즉 의도적인 행위가 어떻게 이 몸이 사라지고 난 뒤에 또 다른 탄생의 결과를 가져오는지”(<붓다의 옛길>, 106쪽)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변화하는 것이 연속되는가? 정신-물질 흐름은 어떻게 미래의 생을 초래하는가? 많은 분들에게 쉬이 풀리지 않는 구절이었습니다. 윤지샘께서는 한번 일어난 강력한 마음 작용이 그 다음 순간에도 쉬이 사라지지 않고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응집된 에너지가 쉽게 흩어지지 않듯이 우리의 생명작용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 혹은 집착은 강력한 힘을 발휘해 다른 물질적 몸체를 형성한다고 이해하면 조금 들어오는 것도 같습니다.

<달라이라마 사성제>는 몇 가지 구절에서 아리송한 의문에 부딪혔습니다. 그 중 하나는 전생의 존재를 증명하는 부분이었는데요. 의식은 물질에 영향은 받지만 물질적 원인에서 생길 수는 없습니다(스피노자의 념념상속?).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끊임없는 연속체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결론”(101쪽)이 나옵니다. 그런데 의식의 기원이 무시무종의 연속체라는 이런 전제가 왜 전생이 있음을 설명하는 것인지는 좀 궁금했습니다(데이비드 봄의 참고자료를 경아샘께서 찾아서 알려주시기로 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는 번뇌가 ‘내면의 적’이라고 표현됩니다. 어디에 있든, 어느 순간이든 우리를 따라다니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내면의 적. 윤지샘께서는 이런 적을 발견하고 이것과 전투를 벌이는 일이 사성제를 공부하고 불교를 배우는 우리에게 가장 윤리적인 일이 아닌가 하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외적인 조건이 문제가 아니지요. <붓다의 옛길>에서 고통의 원인을 다루는 장 서두에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는 괴로움이나 괴로움의 원인을 외적인 존재나 초자연적인 힘으로 돌리지 않고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찾는다.”(92쪽) 이렇게 발견한 내면의 적, 아무리 해도 잘 사라지지 않는 이 비릿한 맛을 우리는 계속 담고 데리고 다니고 싶은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저 역시 이런 물음을 가지고 불교를 배워야 함을 다시 새기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 공지입니다.

<붓다의 옛길> 149쪽까지 읽어옵니다. 발제는 경아샘이 맡아주셨습니다.

<달라이라마 사성제> 140쪽까지 읽어옵니다. 발제는 키키샘이 맡아주셨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전체 2

  • 2021-05-04 16:17
    이야아 정말 부지런한 민호쌤 ㅎㅎ
    저는 혼자 책 볼때는 알것 같기도 하고, 이해한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묵혀야 되는건가?하고 넘어가기도 하고...하다가
    쌤들이랑 토론하다보면 머리가 하얘지고..나 하나도 모르는구나..싶어서..화가 나요...ㅜㅜㅜ
    쌤 정리해주셔서 감사해요!

  • 2021-05-04 18:20
    "결코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원인들이 관여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정한다’는 말 자체가 공허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수한 원인 중 하나인 자신의 마음을 내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발심이란 그래서 결과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겸허한 마음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빠른 후기 감사합니다, "우리 민호"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