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사성제 팔정도 세미나> 4회 후기 및 공지

작성자
경아
작성일
2021-05-14 13:44
조회
2703
2021.05.10 사성제 4회 세미나 후기

이번 시간에는 사성제 고집멸도 중 ‘고통의 소멸에 대한 진리인 멸제’와 ‘고통을 소멸하는 수행에 대한 진리인 도제’에 대해서 『붓다의 옛길』과 『달라이 라마의 사성제』를 길잡이 삼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고통 또는 괴로움의 소멸의 상태인 니르바나는 불이 꺼진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의 소멸인 열반은 원인과 결과를 넘어서 있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이 열반이 아닌지 부정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 시간들에서 공부한 고제와 집제에서 고의 원인은 갈애임을 이해했습니다. 고통의 소멸은 바로 이 갈애로부터 벗어남입니다. 갈애를 벗어남으로서 어떤 행위가 더 이상의 잉여인 업을 만들지 않는 상태가 열반, 해탈입니다. 열반은 이생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한 ‘상태’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세간에 속하지만, 열반은 세간이 아니고 조건 지어진 것들 밖에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얻고 실현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주체-행위 그리고 실체 개념을 전제합니다. 열반은 어떤 도달지가 아니라 완전히 불이 꺼진 소멸 상태 즉 무언가를 형성하는 작용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최상의 행복’입니다. 이런 행복은 완전한 고요, 즉 모든 느낌이 완전히 사라짐으로 드러납니다. 부처님께서는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포함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불교가 너무 고통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한계적 존재인데 불교에서 말하는 무지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생로병사를 겪는 것을 꼭 고통이라고 말해야하는가,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로 받아들이면 될 것을 그걸 고통으로 단정하고 거기에 오히려 매여 있는 것 아닌가라는 중요한 질문들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두카는 고통, 괴로움, 불편함 등으로 번역됩니다. 물질적, 신체적 조건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순간도 평온하지 않은 우리들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좋았다가도 시들해지고, 만족은 잠시 바로 무료해지거나 다른 것을 더 원하는 불만족으로 빠지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휘둘리는 우리의 마음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한 최상의 행복은 이런 마음의 파도가 가라앉은 완전한 고요라고 합니다. 물론 파도치는 마음이 괴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수행을 시작하기는 힘들겠지요. 그래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여 일어나는 두카를 인식하는 고제가 사성제 중 첫 번째일 수밖에 없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사성제』에서도 강한 감정들에 휘둘리는 그 바탕에 객관적 실재에 대한 가정이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물에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착각에서 벗어난다면 그 강한 감정은 더 이상 지지받을 수 없습니다.

사성제의 마지막인 도제에서는 그 착각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로서 계정혜(계율, 선정, 지혜) 수행을 제시합니다. 감각적 욕망의 탐닉과 금욕적 고행 양극단을 벗어난 도덕적, 정신적 수행의 길이 팔정도입니다. 불교는 공허한 철학적 사상이나 논쟁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입니다. 수행의 첫 단계인 계율(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은 자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계율은 정신적인 생활의 자양분이며 정신적인 생활을 안정되고 고요하게 해주는 신체적 수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신체의 좋은 자양분을 바탕으로 두 번째 마음의 집중인 바른 노력, 바른 사띠를 닦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진정한 지혜를 닦는 바른 견해, 바른 사유에 대한 수행입니다. 바른 견해는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 즉 사성제에 대한 명확한 이해입니다. 팔정도의 낮은 단계, 높은 단계 구분은 도달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각 단계에도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가 항상 같이 작용해야 하고 높은 단계에도 낮은 단계의 수행들이 지지해주어야 합니다. 이 팔정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부터 하나씩 자세히 공부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달라이 라마의 사성제』에서 해탈은 공성을 통찰함으로써 착각과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것 또는 고통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기에, 공성의 이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무아 또는 공성에 대한 네 가지 해석이 좀 어렵지만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초기 불교 문헌과 유식학파의 무아론은 크게 헷갈리지 않았으나, 용수의 중도를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나누어진 두 중관학파인 바바비베카(청변)의 자립 논증파와 찬드라키르티(월칭)의 귀류 논증파 각각의 입장이 어려웠습니다.

“자립 논증 중관학파는 ... 존재하는 사물들의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의 지각에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과 사건에 어떤 본질적인 실체가 있다. 이 학파는 대상이 지각과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이것이 그들이 이해하는 공성이다. 귀류 논증 중관학파는 사물이나 현상에 고유한 실체 즉 독립된 실체가 없다는 생각을 없애지 않는 한 사물이나 현상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귀류 논증 중관파는 사물과 현상의 고유한 실체를 부정하며, 이것이 진정한 공성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112쪽)

우리의 뒷배 윤지 반장님의 깔끔한 정리 덕분에 가볍게 패스할 수 있었습니다. 자립 논증학파와 귀류 논증학파는 두 학파 모두 공사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용수의 <중론>을 주석하는 과정에서 공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증명하여 상대를 설복시키느냐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자립 논증학파는 3가지 추론식을 이용해 논증을 하는데 그 방식은 주장을 펴는 종(宗)과 그 논거인 인(因) 마지막으로 예증인 유(喩)의 3단 논법입니다. 그러나 주석자 스스로 추론을 세워 (自立) 주장하는 방식은 그 전제가 논파될 수 있는 모순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자립 논증의 방식으로는 공을 논증할 수 없다고 비판한 귀류 논증학파는 자립 논증학파와 달리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되 대론자의 주장이 포함한 오류와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논증을 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자립 논증이란 전제의 참을 증명하는 연역적 방식과 비슷합니다. A가 참이라는 전제에서 ~A의 모순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다른 것을 다 논파해도 A라는 전제가 남기에 철저한 공성이라고 말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류 논증파는 귀납적 논증 방식인데 자신들의 전제를 세우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논증이 오류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삿된 것을 파함으로서 올바른 것을 드러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멋진 말로 반장님이 설명해주셨습니다. 자립 논증파 또한 모든 것의 공성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하지만, 연기하는 객체들이 독특한 존재양식을 갖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귀류 논증파는 그런 존재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철저히 부정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귀류 논증파의 철저한 공성론을 지지하는데 공성을 이해하면 윤회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어떤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윤회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수행의 길을 가는 것만 남았군요.
다음 시간에는 『붓다의 옛길』 팔정도 중 첫 번째 ‘바른 견해’를 읽어옵니다.
지영샘 발제 부탁드립니다~
전체 1

  • 2021-05-14 21:11
    고통(苦)과 집착(集)의 고리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말고 이제 해탈과 수행의 길로 가는 건가요. 그러나 그 길을 가기위해선 고-집에 머물려는 우리의 무지와 분별을 철저하게 들여다 봐야 하나봅니다 . 공성을 논증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용수의 제자들도 결국 중생이 분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 것일테니 말입니다. 그럼 일단 "바른 견해" 로 고고....!
    경아샘, 저희의 거친 토론을 까알끔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