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5월 17일 후기

작성자
호정
작성일
2021-05-20 21:49
조회
2740
공통과제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자 스승인 공통과제 시간입니다. 몇 주에 걸쳐 자신의 의심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끝에 대상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의심하는 자신의 자리를 보게 된 도반도 있었고, 지난 시간에 호되게 두드려 맞았음에도 케이오되지 않고 질책을 자양분삼아 맷집을 자랑하며 오뚜기처럼 우뚝 일어서서 칭찬과 격려를 받은 도반도 있었습니다. 계속 비슷한 내용의 피드백을 받은 도반도 있었죠. 자신이 고통스러운 건지 잘 모르겠다는 도반에게는 ‘내가 어떻게 세상을 분별 짓고 있는지, 그 분별이 고이므로 그것을 알아채야 한다. 멋있어 보이고자 하는 게 아니고,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고 볼 줄 아는 게 멋있는 것’이라는 중론이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자신의 글에서 우연히 질문이 제기되었는데도, 그게 자기 질문인지도 모르고 2% 어긋난 지점에서 알고 있는 결론, 즉 수행이라는 당위로 직행하는 습관을 되풀이하는 도반도 있었죠. 수행하고픈 진심을 강변하는 도반에게 ‘진심 따위는 필요 없어. 질문을 잡고 늘어져!’

사실, 오늘은 A의 글로, 내일은 B의 글로 나타나지만, 우리는 모두 거기서 자신을 봅니다. 문제를 다르게 본다고 배우지만, 그것은 문제를 본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문제임을, 고임을 안다는 것, 알아차리는 것이 문제를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습관 속에 있으면 보이지 않으므로, 이미 봤다는 것이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부합니다. 그렇지만 즐거운 것은 공부 말고 다른 것들 속에 있다는 구도 속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공부에 힘이 붙기가 어렵습니다. 즐거움을 억누르고 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밥 먹고, 똥 싸고, 잠 자는 것처럼, 공부 역시 의도 없이 하는 습관이 될 때가 공부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바뀐 때이겠지요.

 

법구경의 전생담 – 업의 윤회

苦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우리는 흔히 자신의 경험적 차원에서 아팠던 것을 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도 고통이지만, 불교에서 고란 좋은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세계는 여러 인연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인데, 일시적인 결합을 영원한 실체로 고정시켜버리고 이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집착에서 고가 생깁니다. 실체화해서 이름을 붙이고 고정화시키는 데서 오는 분별, 일련의 감정들, 인지체계들이 모두 고통입니다.

부처님은 여러 생을 통해 거듭되는 고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법구경에는 부처님을 비롯하여 여러 인물의 전생담이 나옵니다. ‘그래. 얘가 이번 생에 이러이러한 행을 하는 게 전생에도 그랬었던 거였구나. 아직도 못 벗어났네. 아이구 저런 쯧쯧.’ 저는 여러 생을 통해 같은 업이 되풀이되는 것을 당연하게 봤는데, 전생에 어떤 업을 지은 자가 다음 생에도 같은 업을 짓는다고 보았던 거지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모든 게 무상, 무아인데 어떻게 생을 이어가며 같은 주체가 있을까요? 업을 되풀이하는 주체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업의 형성력이 윤회하는 거지요.

윤회하는 업이라는 건 인간의 기질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기질이라는 건 타고난 경향성, 마음작용과 행위의 패턴 같은 거니까요. 그런데 보통 행위는 하고 나면 기억 속에서 사라집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의식주에 관련된 행위들은 하고나서 별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잘 해야지’와 같은 강한 의도가 행위에 들어갈 때, 즉 행위를 만들어낸 에너지장이 강할 때 에너지는 흩어지지 않고 무겁게 뭉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력이 강하다고 하죠. 의도한 행위에는 형성력이 사라지지 않고 뭉쳐 있다가, 비슷한 조건을 만나면 또다시 그런 에너지장이 형성됩니다.

기질은 전생의 업의 결과입니다. 유학을 베이스로 하는 명리학은 현세적인 반면, 불교는 현생의 기질을 전생이라는 확장된 시간성 속에서 설명합니다. ‘나’는 에너지가 물질화된 상태입니다. 나의 기질은 에너지가 뭉쳐진 특정한 방식입니다. 장이 계속 그런 방식으로 형성되는 게 업인 거지요. 에너지가 물질화된 것이 나이고, 내가 죽으면 나라는 물질이 다시 에너지가 되고, 이것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과정만 있는 거지요. 나를 구성하는 에너지를 알게 되면, 즉 기질, 업을 알게 되면 다른 에너지를 쓰려는 노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우주의 에너지장을 바꾸는 일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TV 프로그램에서 예전에 인상 깊게 본 영화 ‘그을린 사랑’에 대한 리뷰를 봤습니다. 다시 보니, 영화의 결말이 불교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은 전쟁을 겪으면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되는데,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남깁니다. 죽은 어머니의 편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식들은 어머니의 삶의 진실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닥친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운명을 저주하지 않고 그것이 전쟁이라는 조건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수를 거듭하며 되풀이되는 업을 자신의 생에서 끝내고자 합니다. 이것이 우주의 에너지장을 바꾸는 일이겠지요.

 

천개의 고원, 제5고원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제5고원의 키워드는 ‘주체화’입니다. 5고원에서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주체화되는가를 성전 파괴라는 2개의 사건을 통해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지금 우리는 어떤 기호체제에서 주체화되는가를 살펴봅니다. 5고원에 등장한 연도는 기원전 587년과 서기 70년입니다. 앞의 것은 예루살렘이 멸망해서 바빌론으로 망명을 떠난 해이고, 뒤의 것은 로마군이 예루살렘의 궁전을 파괴하는 해입니다. 멸망해서 그동안 살던 터전으로부터 쫓겨나간다는 것은 신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영토에서 쫓겨나면서도 자신들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스토리를 만듭니다. 신의 계시를 새긴 석판을 넣은 궤를 가지고 이주를 하는 거지요. 이 서판, 궤가 주체화의 준거점인 ‘주체화의 점’입니다. 몸은 이주를 하면서도 즉, 탈영토화하면서도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영토를 고수합니다.

주체화의 베이스는 기호체제입니다. 기호체제는 대상과 그것을 지시하는 기호로 이루어진 객관적인 언어체제가 아닙니다. 태초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배치 속에서 기호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기호체제와 주체화는 비슷합니다. 주체가 있어서 세상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기호체제 속에서 어떤 기호가 작동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받아들이게 되고 의미화 하는 게 주체가 구성되는 과정입니다. 같은 사람을 보고도 어떤 이는 ‘동성애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호모 새끼’라고 합니다. ‘형제, 자매’라는 말도 어떤 배치에 놓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형제, 자매가 혈육을 의미하기도, 같은 종교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군대에서는 ‘다나까’ 말투를 써야 정상이지만, 사회에서 ‘다나까’를 쓰면 좀 우스운 사람이 돼버립니다. 들뢰즈는 기호 체제가 하나의 실천이라고 합니다. 발화 행위는 하나의 실천이고, 그런 맥락을 기호체제로 확대한 것이 제5고원입니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 동일한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이미 실천입니다. 말을 할 때 그것은 이미 특정한 배치를 전제합니다. 누구에게 말하느냐, 어떤 장에서 말하느냐? 발화 행위를 할 때 배치해 있었던 수많은 변수들이 규정성을 가지고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형성되는 것이 기호체제입니다. 기호체제란 문법적 체제가 아니라, 그 사회의 발화하는 대중들이 배치의 다양한 변수들과 관계 맺으면서 일어나는 복잡한 언표적 실천입니다.

기호체제와 함께 만들어지는 주체는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구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체를 다르게 구성하려면 내가 어떻게 주체화되는지, 그 조건을 알아야겠지요. 지금 우리의 기호체제는 과거와 다릅니다. 일단 기호를 전달하는 미디어가 인터넷,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미디어는 단순히 매개가 아니라, 주체화되는 새로운 준거점이 됩니다. 미디어가 다르면 메시지가 달라지는 거지요. 미디어가 달라졌어도 여전히 작동하는 대표적 기호체제는 기표작용적 기호체제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정도로 요약될 수 있겠네요. 기호의 의미는 기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 최초의 발화자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당연히 최초의 발화자(신, 전제군주)의 의도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게 되고, 궁극적 의미는 알 수 없는 가운데 무수한 주석(해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세계에서는 사제, 관료와 같은 해석자들이 권위를 갖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해석해야만 하는 기표는 하나의 얼굴을 대응해서 가집니다. 신의 말씀은 신의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거지요. 기호는 신(왕)의 말씀과 신(왕)의 얼굴을 가집니다. 기표작용의 중심에 있는 신(왕)과 그것을 계속 해석하는 해석자들, 신(왕)을 거역하는 위반자들(희생양들), 그 사이에서 의미의 원환들을 떠도는 군중들이 하나의 세트입니다. 기표작용적 기호체제는 어느 시대에나 보편적인 기만의 체제입니다. 하나의 의미가 있을 거라는 것 자체가 기만입니다. 신의 말씀이 신민들을 위해 말해진 것이므로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얼굴을 잃을 것이라고 협박하며 그 의미의 원환들을 군중들이 계속 떠돌게 만드는 것도 기만입니다. 얼굴을 준다는 것은 하나의 준거점 속에서 주체화의 형식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지운다는 것은 사회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배제하는 얼굴은 사회마다 다릅니다. 여성, 혁명가, 철학자, 과학자, 장애인 등등. 희생양을 통해 그가 이 사회의 의미 원환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내부의 의미를 더 강고하게 합니다. 위반은 역설적으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포섭됩니다. 지워진 얼굴, 탈영토화된 신체성이 의미를 갖는 기호작용과 세트가 됩니다.

기호의 기표작용적 체제를 중심으로 전-기표작용적 기호계, 반-기표작용적 기호계, 후-기표작용적 기호계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 사회체제에 섞여 있습니다. 우리와 연관이 깊은 후-기표작용적 기호계는 다음 시간에 강의해주신다고 하니, 기대됩니다.
전체 4

  • 2021-05-21 12:39
    고(苦)를 붙들고 붓다를 만나고 계신 불교팀의 글쓰기를 내심 기대하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생에서 일어나는 분별, 일련의 감정들, 인지체계, 이것이 전부라고 붙들고 힘들어 하는 저 같은 중생은 전생의 업까지 사유를 확장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풀어주실지 몹시 궁금하거든요. 불교팀 간식스틸러 잠시 들렸다 기대를 전합니다. ㅎ
    참고로 불교팀은 후기를 왜 이렇게 길게 써요? 읽기 버겁게 ㅋㅋㅋㅋㅋ

  • 2021-05-24 09:29
    에너지의 응집이 강하게 형성되면(업) 관성적으로 다음 순간에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윤회), 그 비슷한 형성 패턴을 중지하는 것으로서의 수행이라는 말이 매우 와닿네요!!

  • 2021-05-22 18:36
    호정샘의 후기를 찬찬히 읽으면서 일상에서 나는 어떤 에너지장을 무겁게 뭉치며 살고 있는지 그것을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기호체제를 붙들고 주체화되는 것도 에너지를 강도 높게 뭉치는 것이겠죠? 그런 무거운 뭉침들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통의 무더기인 것 같고요.

    덕분에 지난 수업을 다시 돌아보네요~ 정성스러운 후기 보시 감사합니다, 호정샘!
    '그 와중에' 건진 질문은 버리지 마시고 담주에 꼭 다시 들고 오시길.... ㅎㅎ

  • 2021-05-22 20:54
    어렵던 지난 시간을 이리 차분히 잘 정리해주시다니...감사하여요...
    벌레는 이제 죽이지 마세요.. ㅡ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