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 불교와 글쓰기> 5월 24일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5-25 12:02
조회
2852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된 지도 꽤 되었는데, 아직도 흠칫흠칫 놀라게 됩니다. 이런 코멘트를 한다고?! 우선 코멘트의 수위에 한 번 놀라고, 그것이 웃으면서 받아들여진다는 풍경에 한 번 더 놀라게 됩니다. 써온 글의 문장이나 개념 해석을 가지고 논하는 것은 기본이죠. 이번 글을 포함해 이전 글들(심지어는 수년 전의 에세이를 포함해)과 태도들에서 드러나는 그 도반의 문제, 고민, 변화, 성장 배경 등이 버무려져서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코멘트가 들어갑니다. 그 애정 어린 살풍경(?)을 저로서는 매번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속으로 몇 번씩 뜨악하며 바라보게 되는데요. 이번 주는 3주차까지 썼던 ‘내가 만난 불교’ 에세이를 중간 점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몇 가지 키워드만을 추려서 남겨보려 합니다.

 

개념어의 남발, 부처님 옹알이다!

에세이를 쓰다 보면, 자기가 내뱉은 단어에 스스로 묶이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개념어를 충분한 소화 없이 사용하는 순간 우리 자신의 구체적인 느낌과 미묘한 감정과 생각들이 탁 규정되어버리는 것이죠. 이것은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기도 합니다. 언어는 전달을 위해 고안되어서 언제나 체험의 다채로움을 다소 축소시키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또 그런 언어의 기반 위에서 돌아가기 때문에, 추상적인 용어는 자신이 풀어가야 할 이야기를 경직되고 붕 뜨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단어들에 스스로 속는 것이죠. 상황을 단정하거나 뭉뚱그리기는 단어들이나 개념들보다는 초점을 우리에게 맞춰서 의문부호를 던져보는 일이 저희의 글쓰기에 필요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가령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꼈다’ 같은 표현보다는 ‘이러이러한 사건에 나는 어떠어떠한 마음이 들었다’ 등의 표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또는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단정적 표현보다도,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떻게 동요되었는지 혹은 남들의 어떤 상태가 당시 내게는 부러워 보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정말 부러워할 만한 사람들인지 차근히 물어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 듯합니다. 또한 개념을 쓰게 될 경우에는 그것을 충분히 자신의 해석과 자신의 말로 풀어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와 같은 표현을 아무 부연 없이 쓰는 것은 부처님 옹알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에 흠칫했습니다. 그것은 결론을 가져와 덧대는 일이기에 무익할 뿐 아니라 넘어가지도 못한 문제를 넘어간 척 한다는 점에서 해롭다는 코멘트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불경 구절 백 마디를 정리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자기 말로 한마디라도 잘 풀어내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나르시스트다

우리의 주요한 문제는 역시 자신에 대한 애착과 깊이 닿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애착 역시도 ‘자아가 고의 원인이다’라는 식으로 결론지어져서는 곤란하겠죠. 자아의 문제를 다소 원론적으로 제시해버리는 글도 있었고 아직 자기 문제가 거기에 있음을 적어두지 않은 글도 있었습니다. 가령 저는 저의 인색함에 대해 적었는데, 그 인색함이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색함이며, 그런 쪼잔하고 억압적인 태도는 자신에 대한 강력한 환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코멘트를 받았습니다. 나는 오점이 없이 착해야 하고, 관대해야 하고, 화내거나 미워하지도 않아야 하고, 심지어 평온하고 강하기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 이 상태에 비추어 그렇지 못한 자신을 괴로워한다는 것은 나르시시즘이자 엄청난 오만이라는 말씀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자신이 자신에게 갖고 있는 표상이나,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스스로를 소중해 하는 애착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충분하게 짚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과 공감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도 자신의 욕망을 감추는 경향에도 나르시즘은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감하고 싶다는 것은 소외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시선을 받고 확인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욕망을 숨기는 태도 역시 무언가에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제스쳐이자 열등감 혹은 자만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애이기도 합니다. 또한 스스로 자신이라고 믿고 기대온 무언가가 상실되어버린 듯한 나락과도 같은 상황이 여러 수련 공동체를 돌고 돌아 불교를 만나게 해줬다는 이야기도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런 불변의 의지처이자 항상 확인 가능한 ‘나’는 없다고 말하죠. 이 말을 제 수준에서 어떻게 소화하고 이해해볼 것인가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나르시즘의 힘은 이렇게 모두에게 글감을 주고 있네요!

 

헤매는 중, 풀어가는 중

아직 7주가 남긴 했지만 저는 솔직히 마음이 좀 무겁습니다. 헤매고 있습니다. 불교를 만났다고 하기에는 기간도 깊이도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일까요? 그래서 오래 공부하신 선생님들은 좋겠다고 은연중에 부러워했는데 이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에세이가 내가 이러이러했다라는 서술적 기록이나 일기가 아니기 때문이어서인지, 샘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절실했던 물음들을 하나씩 파고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때의 어떤 상황이, 괴로움이, 질문이, 인연이 공부의 길로 이끌었는지 그 소중한 순간을 어렵게 어렵게 더듬고 계셨습니다(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샘들의 과거와 전업을 알게 되었네요^^). 너무 개념해설식으로 이어지면 ‘개론서다’, ‘개론제일이다’라는 놀림 섞인 조언도 있었고, 너무 사적으로 겉돌면 개념들을 추천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코멘트를 들은 후에 방향을 다시 잡고 다시 써봐야겠다는 분들도 계셨고, 자기 문제를 잘 발견했으니 이후를 쭉 써봐야 한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삼 주 동안 쓴 글이었지만, 이렇게 중간 점검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에세이 토론 후 경건하게 <담마파다>를 낭송하며 마친 수업은 사성제-팔정도 세미나로 이어져서 해가 진 후에도 열띤 토론이 계속되었습니다. 저녁 세미나의 토론은 복희샘의 후기에서 확인해주세요! 이만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월요일 수업 당일이 현숙샘 탄신일이어서 점심시간에 도반님들이 간소한 PARTY를 준비했습니다. 뭘 이런 걸 준비했댜, 하셨지만 무척 행복해보이셨습니다ㅎㅎ. 늘 명랑하고 밝은 에너지로 모두의 과제를 꼼꼼이 읽으시고 정성어린 코멘트를 해주시는 현숙샘, 건강하세요! (아침 명상시간에 엄청난 유연성에 놀랐습니다)

전체 4

  • 2021-05-25 15:19
    순간 눈을 의심했네요. 분명히 어제 하루 종일 같이 있다 헤어졌는데. 어제 맞지? 어? 아닌가? 하루도 안 지나서 후기가 올라오다니. 이런 빠름이란? 흠칫 놀라 몇 자 끄적입니다. 어제 일러주신 말씀들 다시 새기면서 찬찬히 돌아보겠습니다. 다들 고맙습니다. 현숙샘 첫돌도 축하해요

  • 2021-05-25 16:27
    아직 맥락도 잡지 못하고 있는 일인입니다 ㅠㅠ 공부가 느슨해진 것을 어케들 아셨는지 매의 눈들입니다^^ 저도 정신차리고 시작해볼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파 소리에 고개를 절래절래 흐드셨던 현숙샘이 케잌 앞에서 저래 손뼉치며 좋아하시는 밝은 모습에 모두들 빵 터졌답니다.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같이 공부해요~

  • 2021-05-25 17:11
    마치 태어나 처음 맞이한 돌잔치같은 파뤼였슴다~^^ 아이구 넘사시러버라! 그래두 우리 도반들 따땃한 맘을 느낄 수 있어 무쟈게 행복했다능.... 모두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한아름 담기시길!!
    에세이 써오신 걸 읽으며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어케든 행복해지기 위해 이리 치열하게 후벼 파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늘 말했지만 그대들이 있어 묻어갑니다. 캄솨합니다^____^

  • 2021-05-25 20:54
    우리 Saint 미노님께선 불교와의 만남에 전혀 조급해하실 필요가 없으실듯 하옵니다. 부처님은 이미 도처에 매 순간 와 계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마음 속의 부처님을 찾겠다는 한결같은 그 마음으로, 자신에게 인색하지 않은 그 마음으로 저희 같이 가보아요~

    그나저나 우리 배마리아는 얼마나 귀엽고 예뻤을까요! 저 귀여운 손동작과 표정을 보시라 ㅋㅋㅋ 오래 오래 건강하게 공부 같이해요 배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