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3월 22일 5회 수업 후기

작성자
미영
작성일
2021-03-25 23:55
조회
2896
2021.03.22./ 불교와 글쓰기 5차시 수업 후기

강의 첫 시간 샘께서는 암송과 필사가 공부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주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쩜 그렇게 저에게 말씀하시는 듯 찔리는지 다시 한 번 공부하는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공부는 시시하므로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하고도 쉬운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지레짐작으로 지루하거나 완벽히 못해낼 것이라는 망상이 자리 잡고 있지요. 작심삼일로 끝났더라도 계속 다시 시도하면 될 것을 말입니다. 또한 그동안의 공부 경험이 있으니 건너뛰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단순히 경험의 많고 적음이 필요한 공부의 시기와 관련되지 않는데 말입니다. 공부의 시기가 따로 있지 않음을 알고 매순간 초심을 잃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경험을 통해 판단한 것은 앎의 아주 일부분임을 자각하고 실체화하려는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그 출발이 암송과 필사이구요. 글씨를 바르게 쓰고 외무며 공부의 기초를 다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숫타니파타

꼬깔리아는 부처님의 두 제자인 싸리뿟따와 목갈라나에게 원한을 품게 됩니다. 저는 단순히 꼬깔리아가 탐심에 가려 심보를 잘못 썼다라고 해석했는데 그의 입장을 헤아려 보면 억울함과 서운함이 들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신경 써서 챙겨준 공양을 안 받았던 두 제자가 다른 곳을 유행할 때는 받은 것을 보고 그 사이에 욕심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신이 애쓴 마음을 몰라주었으니 무시 받았다는 생각도 들었겠지요. 더군다나 부처님께서도 제자들 편만 드니 더욱 더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항상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그의 번뇌를 알아보고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를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이 어떤 욕망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나쁘다고 생각하여 괴로워하는 네 마음을 보라고 말입니다. 상대방이 비록 나쁜 욕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입증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평안해 지지는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평안은 어떤 존재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갖고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나와 모든 존재를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꼬깔리아는 자신의 분별심으로 인해 부처님의 말씀을 상처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그 업으로 몸에 병이 생겨 죽었고 적의를 품었던 마음 때문에 홍련지옥에 태어났습니다. 이 경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꼬깔리아의 몸에 난 종기가 증식을 하며 병을 키우는 묘사는 우리 마음에 품은 미움이나 적의가 자가 증식을 하며 더욱 커진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을 품게 되면 그 사람이 더는 미운 짓을 하지 않더라고 계속 커집니다. 또한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이 칭찬하면 더욱 자기 마음을 어쩌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므로 홍련지옥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한과 적의가 가득해 마음의 황폐함을 겪는 것입니다.

팔정도(八正道)에서 정어(正語)는 바른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실천방안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참과 거짓의 말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을 그대로 전달한다고 참이라고 할 수도 없구요. 말을 주고받는 행위가 그 후의 작용력을 형성한다는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백하는 방법으로 불교의 포살(布薩)자자(自恣)와 서양의 고해성사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13세기에 시작하게 된 의식으로 사제에게 자신이 범한 계율에 대해서 말하고 그 죄의 사함을 받는 문화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검열을 동반한 고백과 사제의 특권의식에서 나온 죄 사함이라는 구도는 이후 더욱 엄격해지고 촘촘해져 자신이 범한 행위가 아닌 범하고 싶었던 마음까지 고백함으로써 도덕적 인간을 양산하게 됩니다. 이 문화를 정신분석이 대체하면서 사제 대신 정신과 의사가 환자의 욕망을 해석하게 됩니다. 그러한 해석은 생산적으로 되지 않고 주로 성적욕망과 가족적 표상으로 환원하는 일방적인 방식을 띄게 되지요.

포살자자도 고해의 방식이긴 한데 이것의 핵심은 공동체 안에서의 행의 문제를 다룹니다. 자신이 범한 계율을 대중 앞에서 스스로 드러내거나 상대방의 허물을 드러냄으로써 반성하는 자율적 참회의 절차를 밟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잘못의 사함을 받는 게 아닙니다. 다음 순간의 영향력으로 남는 업은 누가 대신 받아주거나 사해주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고백함으로써 그 다음의 형성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의 자장 속에서 보고 듣고 행위 하면 공격적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마음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포살자자를 통해 이 형성력을 끊게 됩니다. 즉 반복되는 업에 이끌리지 않겠다는 자기 결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른 말이란 공과 연기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깨달음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실천은 지혜와 함께 가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경전에는 바라문과 외도들이 부처님과 논쟁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유행자 싸비야는 수행승이나 성직자, 승리자, 지식에 통달한 자, 성취자들 즉 도를 추구하는 자들이 왜 그렇게 불리며 그들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답을 구하러 다닙니다. 우선 바라문 모임이나 세력이 있는 각종 종단의 창설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답변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당합니다. 이들은 대체 왜 답변을 제대로 못했을까요? 그 중 자이나교도들은 업을 일종의 물질 같은 것으로 여겨 이 물질이 형성하는 업이 영혼에 부착되면 이것이 원인이 되어 고통스러운 윤회가 발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방법은 엄격한 계율을 지켜가며 고행을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부처님은 업을 실체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학대해도 업이 씻어지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오히려 몸을 학대하면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자기를 있게 한 모든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확대된다는 것을 깨달아 고행이 수행의 방법을 아님을 확인하셨습니다. 경전에서 ‘다시 태어남을 부순 삶’이란 윤회하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이는 기존의 말들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사유를 의심하고 바꾸는 과정을 말합니다. 싸비야가 제대로 된 답변을 못 들었다는 것은 기존의 사유를 떠나지 않은 익히 아는 것, 즉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답변만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부처님은 바라문이나 외도들과의 논쟁을 통해 그 당시의 담론들에 대해 새로운 도주선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쎗타의 경’에는 다른 생물들과 달리 인간에게는 출생에 기인한 특징의 다양성이 없으며, 인간의 구별은 단지 명칭에 불과함을 밝힙니다. 고귀함은 출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따른 것이라는 이 말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말입니다. 고귀한 삶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나온다는 것, 바로 인간에게 너의 행으로 인해 고귀해 질수 있다는 것은 해방적 복음입니다. 구원을 어디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고 지금 너의 행을 통해 구하라는 것. 이것은 태생으로 인해 특권을 누리고 있는 바라문의 권의를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도주선을 탄 n-1의 사고입니다.

우리는 n+1의 사유를 하는데 익숙합니다. 이는 존재한 것들에 초월성을 부여해 것입니다. +1이란 의지처를 말합니다. 의지처를 만드는 한 이분법을 양산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돈, 명예, 권력, 이것들로부터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한 그렇습니다. 바라문들은 베다 전통의 권위에 기대서 사회를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출현한 시기는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사상들이 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런 운동성에 의해 비판을 받은 바라문들도 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1은 빼기가 아니라 +1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외부와의 접속을 통해 변이하는 다양체의 조건 자체가 +1 곧 중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연기법과 무아를 말하는 불교는 모든 것들과 접속할 수 있습니다. 패치워크처럼 중심이 없이 조각과 조각들의 연결접속에 따라 만들어지는 무한한 다양체의 세계입니다.

〈천 개의 고원〉

우리가 이원론을 부정한다는 것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여 두 개로 나누면 안 된다고 단순히 생각 하는데 n원론도 이원론입니다. 선택지를 두 개를 두거나 10개를 두고 선택하라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곧 헤아릴 수 있는 차원에서 사고하려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도 실체화하지 않고 그 대상을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도주선은 나쁜 것에 대한 대안으로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 게 아니라 그 어디에도 정해져 있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 곧 머무는 바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이하는 지평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도주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변이의 지평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드러난 결과를 만들어 낸 원리의 차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곧 모든 것이 출현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리인 공(空)과 연기의 차원을 사유해 보라는 것입니다. 변화된 것들은 다 지각하고 감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됨 자체, 그 변화들의 사이는 감각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사유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being(존재)과 달리 becoming(되어감)은 경험적 차원에서 지각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becoming이 없다면 being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being는 becoming의 일시적 결과일 뿐입니다. 사실은 becoming의 과정만 있는 것이지요.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연기 밖에 없습니다. 연기 작용으로 인해 모든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불교는 현존하는 being의 세계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위해 공(空), 연기를 말합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출발점으로 삼아 발명해 낸 원리인 것이지요. 우리가 다른 것을 부정하거나 어떤 것을 집착하는 것은 어떤 상태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상반되는 것들을 부정하게 되고, 이 부정은 어떤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런 경험은 있는 것을 다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려면 나타나는 것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천 개의 고원』 제3고원의 제목은 ‘도덕의 지질학’입니다. 도덕은 인간의 문화와 정신의 차원, 지질학은 물질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제목을 통해 들뢰즈는 이 세계의 물질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을 일원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곧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 생명과 무생명의 이분법을 넘어가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은 단순하고 정신은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 두 차원이 형성되는 원리는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물질은 비활동적이라고 생각하며 생명체를 비생명체와 구분 짓고 특권화 합니다. 이는 또 생명체 속에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분하고 연속하여 세계를 다 이분화 하는 방식으로 나아갑니다. 불교는 연기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 생명을 특권화하지 않습니다. 연기의 차원으로 생각하면 생명체만이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 만물이 다 나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3고원의 목차는 ‘기원전 1만년’입니다. 이 시기는 홍적세로 빙하기 말기를 말하며 지질학자들에 의해 현세라고 명명됩니다. 이 시기로부터 인류가 발생하고 몇 천 년이 지나는 동안 인류는 진화를 거듭하며 동물과 접속하여 가축화하고, 식물과 접속하여 작물화를 이릅니다. 인간이 없었다면 가축도 작물도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이때부터 벌목이 되고 자연이 개발되는 등 자연자체가 인간과 접속을 통해 길들여지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인간은 무엇을 기준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근거는 무엇인가? 인간을 특권화 할 수 있는 종적 특징이란 뭘까? 입니다. 들뢰즈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박탈합니다. 과연 인간의 생명은 지층을 형성하는 과정과 다른 과정이었을까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지층이 형성되는 과정과 다른 특별한 것일까요? 인간이 도덕을 형성한다는 게 다른 것들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환경은 주어진 것만이 아니라 거기서 서식하는 것들에 의해 변화되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우리와 상호작용하므로 우리 안에 환경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환경을 만듦과 동시에 환경이 인간을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3고원의 부재는 ‘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입니다. 지구는 그 자체로 어떤 규정성도 갖지 않습니다. 즉 탈영토화 된다는 것입니다. 이 탈영토화는 어떤 영토가 만들어짐과 동시에 공존합니다. 이는 지구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곧 지구는 하나의 기관 없는 몸체입니다. 질료들의 흐름이 이어지다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입자화한 것들이 결합해서 굳어지는 것이 성층작용 곡 지층화입니다. 질료는 무규정적 흐름인데 반해 지층의 본질은 이런 흐름들에 어떤 형식이 부여된 것입니다. 즉 어떤 물질들이 서로 공명함으로써(코드화) 동시에 어떤 시스템 속에 흐름이 가둬지고 붙들어 매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구는 흘러감과 동시에 지층화 되고 있는 기관 없는 몸체입니다.

지층들은 지구 위에서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작동합니다. 흘러 다니는 것들을 내용과 표현의 측면으로 붙들어 매어 규정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지층화하는 모든 것에는 이러한 이중의 분절이 이루어집니다. 영토 안에서 나름대로 질서 지워진 구역을 배치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영토화와 탈영토화는 대립적이 아니라 늘 동시에 일어나며 지구상에는 도처에 이러한 과정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 3

  • 2021-03-26 08:13
    아고 휴가나온 아들 해먹이느라 바쁜 그 와중에도 여전히 촘촘함을 이렇게 탁월하게 발휘하시다뉘!! 역시 미영샘이네요.^^
    후기를 읽고 있노라니 미영샘의 촘촘함의 기예가 그날의 배움을 차분하게 영토화하며 또 다른 도주선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수년 동안의 공부 내공이 이제 봄을 만나는 건가요? 미영샘과 이리 즐겁게 배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요~~~^________^

  • 2021-03-26 22:10
    저도 바셋타가 부처님의 대답을 듣고 기뻐한 것을 단순히 막혔던 부분이 풀리는 n+1의 기쁨이라 생각했는데, 기존의 가치관과 사유에 대해 질문하므로써 의지처를 부수고 완전히 다른 도주선을 만들어냈을 때의 기쁨이라니! 강의 들으면서도 기뻤고 미영샘의 촘촘한 후기 읽으면서 어떻게 머무는바 없이, 공과 연기에 대한 이해속에서 볼 것인지하는 질문이 더 크게 다가와서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1-03-27 20:00
    너무 촘촘해서 다 읽고났더니..힘들다.....ㅎㅎㅎㅎ 촘촘한복습 끝~~! >ㅅ<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