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3월 8일 3회 수업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3-10 15:57
조회
2892
 

 

“일어나서 앉아라!” 공통과제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용맹정진의 경>의 후렴구입니다. 비록 토론에는 두 번째 참여해본 것이 전부지만, 저는 이렇게 모여 앉은 선생님들과 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방일함과 미혹 없이 청정행을 지속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조금씩 다른 와중에도 엇비슷한 지점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진흙밭이어도 이승이 좋고, 감각적 쾌락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계속 도취되기를 원하고, 괴로운 것 같은데도 그것을 끊어버릴 정도로 ‘아직 죽을 만큼 괴롭진 않고’, 애착이고 갈애인 걸 들어서 아는데 여전히 좀처럼 벗어나지지가 않고...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하는데, 끊어야 하는데, 없애야 하는데 하는 반성과 책망이 반복됩니다(예, 제가 매일 하는 일입니다ㅎㅎ). 이것들을 저희에게 익숙한 문구, ‘앎과 삶의 불일치’라고 요약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말에는 언제나 빛나는 대답도 있죠(^^). ‘앎과 삶은 일치하고 있으며, 아는 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은 아는 게 아닌 것’이라는! 그렇다면 제가 점검하고 되물어야 하는 것은 제 이해의 설익음과 빈약함이지 몸뚱이나 의지가 아니게 됩니다. 미영샘 과제대로, 가장 안 좋은 것은 “약간의 배움을 등에 업고 반성하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아드님에 대한 복희샘의 고민을 두고 샘들이 해주셨던 말씀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애착이 고통인 걸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가?’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거기서 벗어나는 일이 더 수고롭고 더 큰 고통이기에 오히려 그 자리를 원하게 되는 건 아닐까. 또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문제 될 때, ‘이 애착이 정말 그 사람에게 좋은가, 아니면 나에게 좋은가?’하고 끝까지 물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흥미로웠습니다. 애착도 습관이니, 다른 습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은 콕 박혔습니다. 문제는 ‘이게 잘못됐으니 이러지 말아야 한다’라는 즉각적인 의지적 부정이 아닙니다. 그 결과는, ‘번뇌여도 어쩔 수 있나’라는 체념 혹은 합리화의 순환입니다. 그러니까 틀린 것과 나쁜 것을 부각하기보다 더 바르고 좋은 것을 향해 계속계속 따져 질문해가는 것이 관건입니다. 여길 부정하고 벗어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새롭고 고귀한 생활과 리듬에 참여한다는 발상이 더 신날 것 같습니다.

강의 중에는 ‘아낀다는 것’에 대한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어떤 것을 아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희는 보통 물건을 소장하듯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태도를 생각합니다. 마치 거부들이 미술품을 집안에 진열해두고 자신만 보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라울라의 경>을 보면 완전히 다른 태도가 엿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왕족 부처님의 아들로 자란 라울라는 교만하기 쉬울 것이니 교만을 주의하여 수행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히 챙겨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덜 신경 쓴 것도 아닌 이 말씀이 여러 생각 거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랬듯, 전체로 보아 지금 그가 처한 위험과 곤경을 보시고 그에 맞는 말과 마음을 전하는 것이 부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사랑, 거기에는 이미 ‘우리 아들’이라는 집착은 없습니다. ‘나의 것’도 아니고 ‘n분의 1’도 아닌, 한 명의, 그러나 독특한 실재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도리. 들뢰즈와 가타리의 표현으로는 ‘탈개인화 속에서 명명함’이 바로 부처님의 아낌이었습니다.

여기에 비추어보아 우리의 애착의 문제를 달리 볼 질문을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흙이더라도 여전히 이승이 좋고 거기에 쾌를 느낀다면,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좋음을 틀렸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때 저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악마 빠삐만의 조언입니다. 쾌의 원인이 동시에 불쾌의 원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죠. 중생과 수행자의 차이는 지금 이 쾌의 원인이 다음 순간에도 똑같이 쾌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착각임을 통찰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몸이 아프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아닙니다. 나의 건강과 상황과 그 순간 그러그러하게 맞아떨어진 일시적인 조건들로 인해 나타난 것이 쾌감이며, 그 균형이 조금만 틀어져도 얼마든지 불쾌감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애착과 갈애는 이 사실에 충분히 무지할 때에만 커질 수 있는 것이겠네요.

바라문들을 타락시킨 감각적 쾌락의 중심에도 바로 이런 무지, 즉 전도된 견해가 들어있습니다. 세상이 살기 좋아지고 유혹이 많아져서 타락한 것이 아니죠(그랬다면 이 첨단 과학의 시대는요!). 문제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일으키게 된 전도된 견해입니다. 식욕, 성욕, 예쁜 것에 대한 소유욕, 자만 등은 즉각적인 쾌감을 줍니다. 물론 쉽게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 희귀하고 찰나적인 감각은 우리가 그것을 쉽게 실체화하게 합니다. 또 보고 싶고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이죠. 그렇게 그 감각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고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극단적 감각일수록 전도된 견해를 일으키기가 쉬운 것이라고 합니다.

<천개의 고원> 강의에서는 다양체, 주름, 펼쳐냄 등의 개념을 배웠습니다. 아주 많은 부분이 아리송했지만, “모든 존재가 이미 부처다”라는 말과 무한/유한, 개체/전체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은 영 어려웠습니다. “다양체는 열린 전체 내에서 분기와 변주를 끊임없이 하는 거대한 포텐셜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소화해볼 수 있을지, 곰곰 생각해보며 일주일을 보내야겠습니다. 후기 마치겠습니다!
전체 2

  • 2021-03-10 23:07
    저는 어떤 감정이나 표상에 매여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고 여기는지 곰곰 생각해봐야겠습니다.

  • 2021-03-11 09:49
    감각적 쾌락이 주는 전도된 견해를 화두로 한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앎과 삶은 항상 일치한다는 것! 오늘 나의 행이 현재 나의 앎의 주소라는 것!
    다시 확인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