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3월29일 수업 후기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21-04-01 03:17
조회
2988

       미세먼지 땜에 하늘이 조금 부옇긴 해도 오는 봄은 막지 못하나 봅니다. 노란 민들레, 보라 제비꽃이 앙증맞게 피어난 성균관의 뒤꼍 마당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처음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노란 개나리는 어쩜 그리 화사한지, 골목길 담장으로 고개 내민 흰 목련은 왜 또 그리 화안한지, 벚꽃잎은 어쩜 그리도 하늘하늘 날리며 햇볕은 왜 또 그렇게 눈부신지, 마치 처음 봤다는 듯 그 봄날 우리 ‘고귀한 님’들은 성균관 뜨락에서 봄꽃보다 더 흐드러져버렸습니다.^^~~~룰루랄라♪♬




 

그런데, 공부보다 이 감각적 쾌락이 주는 흐뭇함!!을..... 여지없이 끊어낸 우리의 고귀한 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자세로 비장하게 책상 앞에 앉아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목청을 높이지 않았겠습니까? 채운샘께서 ‘자기주도학습’이라는 프로젝트를 발표하실 때만 해도 저는 내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게 과연 얼마나 잘 될까?’ 의심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부처님은 고귀한 님이 되는 것은 출생이나, 타고난 신분때문이 아니라 ‘행’으로서만이 고귀한 님이 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요즘 눈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우리 도반들이 어찌나 능동적으로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 뒤짐질하고, 정리하고, 질문들을 해대시는지, 매주 깜딱! 놀랍니다. 단지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이 고귀한 가르침을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모시지는 않겠다는 듯, 요리조리 의심하고 묻고 따지고 이해하려 하면서 이 공부를 나의 질문으로 가져와보려 애를 씁니다. ‘너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어이 몸으로 살고자 하는 듯 합니다. 우와~~~ 이 고귀한 님들 가트니라고!! 제가 절대 KTX를 포기하지 않고 매주 올라오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주제는 명확하지 않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한 발씩 더 다가가고 있습니다.


(앗! 벌써 두 문단이닷! 윤지도반이 이 후기를 다섯 문단을 넘기지 말고 끝내라 했으니, 기어코 세 문단만으로 마무리 해볼랍니다^^)



<우파니샤드>와 붓다의 혁명적인 가르침


불교를 배우면서 귀에 익은 몇 개의 단어들이 있는데, 그 것들 중에 ‘브라흐만’, ‘아트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의 진리와 상대되어서 ‘그놈 나쁜 놈’하고 한켠에 밀어놓은 그런 개념들이죠. 이번 시간에는 그놈들의 정체를 ‘학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에 미치신’ 두 분의 고귀한 님들께서 약속이라도 한 듯 <우파니샤드>를 공부해오셨는데, 어찌나 꼼꼼하게 정리 해오셨는지, 마치 하늘에서 은총이 쏟아지듯 인도의 사상사가 한 줄에 주르륵 꿰어졌습니다.(그렇게 느껴졌다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어난 자(buddha, 覺者)’가 될 수 있었던 그 배경에는 ‘성스러운 진리를 이미 주어진 것, 혹은 변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진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브라만의 산스크리트 텍스트인 <베다>가 있었더랬습니다. <베다>는 오래된 인도 철학을 시로 읊은 경전입니다. 그 <베다>의 마지막 부분에 <우파니샤드>가 있습니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인 ‘Upa(가까이)-ni(아래로, 완전히)-shad(앉는다)’는 의미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비밀리에 전수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즉  우주의 지고한 실재에 대한 스승의 영적인 체험과 깨달음을 무릎 가까이 앉은 제자에게 비밀리에 전승한 영적대화가 베다의 핵심 가르침인 <우파니샤드>입니다. 그런데 우파니샤드는 베다에 뿌리를 두고는 있지만 베다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권위를 지닌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신들은 베다의 신들처럼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형상화하는 지고한 존재로서의 브라만의 모습인 것이죠. 우리에게 익숙한 ‘브라흐만(brahman)’은 만물 속에 깃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만물을 초월한 존재로서, 이 지고한 신성은 리그베다 시대의 제사의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실재인 것이지요. 우파니샤드는 이 존재가 모든 존재의 핵이며 참자아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현상계의 각 존재의 중심에 머물고 있는 브라만을 ‘아트만(atma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베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들이 말하는 해탈이란 이 궁극적 실재와 하나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트만’이 모든 존재의 참 자아이고 영원한 ‘브라만’이니, 이 궁극적 실재와 하나임(범아일여)을 ‘체험하는=깨닫는’ 것이 해탈이라는 구도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과정과 비슷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지점이 있지요. 붓다는 베다 신앙을 배경으로 하였지만 대단히 혁명적인 새로운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無我와 緣起는 당시의  베다 신앙이 지닌 모순점을 깊은 통찰의 지혜로 넘어선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그 지점이 ‘혁명가 붓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 지점인 것이지요.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 오래된 베다 신앙의 핵심인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브라만과 아트만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고 번민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명상과 통찰을 통하여  ‘緣起’를 말했습니다. 緣起는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자아로서의 atman’에 대한 강한 부정의 근거로 제시한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인 것이지요. 당시 숲 속에서 수행하던 수행자들도 자신의 내부의 절대적 자아인 ‘아트만’에 대해 간절히 알고 싶어 하면서, 어떻게 ‘자아’를 발견하여 윤회의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해방을 얻을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붓다의 깨달음은 이러한 배경과 맥락 속에서 던진 숱한 의문과 질문들로부터 깨닫게 된 최상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붓다의 가르침이 혁명적인 것은 그가 ‘핍밧자(떠남)’로부터 내적인 방식의 영적 구도를 시작했다는 것과 그 진리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삶 안에서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붓다의 영적인 삶의 출발이 어떤 역사적 사회적 배경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살피기 위해 우파니샤드를 시작으로 고타마 시대 인도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사상적 변화를 좀 더 면밀하게 공부해보고 싶다는 야무진 계획도 내놓았습니다. 고귀한 님들의 공부에 부처님의 가피가 있으시길!



苦, dukkha, 그리고 우리가 서성이는 지점들



‘사람은 고통이라는 불가피한 현실을 깨달을 때에만 완전한 인간이 되는 과정에 들어설 수 있다.’(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71)


몇 주째 우리는 이 지점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苦라는 것에 대해 아시기나 해요?” 처음 불교 공부를 시작했을 때 스승님으로부터 들었던 문장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이 말씀을 하게 된 맥락을 생략하고 들으면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느껴질 수 있는 문장이지만, 그 때 이 말씀이 화두가 되어 ‘苦’라는 말을 입에 올리거나 글에 쓸 때마다 체증이 돋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苦의 언저리에서 여전히 서성이고 있네요. 정말 苦가 苦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苦라는 지층으로부터 탈영토화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게 가두고 있는 걸까요? 우리 도반들은 각자 나름대로 우리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 고통스러운 상태를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도 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고민의 흔적들을 내보였지만 ‘둑카’는 여전히 먼 곳에서 떠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통이라는 불가피한 현실’을 깨닫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갇혀 있는 지점은 어디쯤일까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편적 고통’과 붓다가 만난 그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붓다는 그것을 어떻게 체험했길래 ‘팝밧자(떠남)’을 결심했던 것일까요? 고타마와 나는 어떤 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다르게 경험하고 있는 걸까요? 지금 제가 하는 이 질문들은 또 어떤 지점을 놓치고 있는 걸까요? 이 답답함도 苦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또 한 명의 고귀한 님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공부가 ‘나의 질문이 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괴로워했습니다. 또 다른 님은 ‘의지(意志)’라는 개념이 불교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매우 헷갈린다며 불교에서 말하는 의지와 일반적 의미의 의지가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알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해야 할 공부는 많고 우리는 그래서 행복합니다. 이 두서없는 공부의 과정이 진리를 향해 가는 걸음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축거리면서 가는(行) 것이 ‘길(道)’이라면 우리는 이미 ‘고귀한 님’들입니다. 수행자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도덕의 지질학.... 이중분절, 내용과 표현, 그리고...



더러는 차분하게, 더러는 지가 이해한 대로, 더러는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채로, 잘은 모르지만 애써 정리하며, 들뢰즈의 개념들과 친해보려 애를 썼습니다만.  고장 난 무릎을 예로 들어 신박하고도 차근하게 우리는 '코드화와 영토화'에 대해 열띠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잘 모르겠는 것들은 다음 시간! 선생님의 친절하신 강의를 자알~~들어보면 된다는 희망과 틀려도 샘께서 기어코 바로잡아주실 것이라는 든든한 믿음을 거름 삼아, 우리가 거칠게 나눈 대화를 짧은 서사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흐름체로서의 윤지는 아픈 무릎과 함께 어찌어찌 지냅니다. 이렇게저렇게 해보다가 아프면 병원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불편한 무릎과 병이라는 것이 코드화로 만납니다. 즉 이것이 내용의 측면에서 비담론적 다양체로 일차분절되는 과정일까요? 이렇게 병원과 질병이 코드화가 되고 영토화되는 일차분절의 과정을 통해 우리 윤지는 이제 드뎌 병원에 찾아가 의사를 만나 상담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윤지는 이제 아픈 무릎을 수술 받아야 하는 ‘환자’로 표현되어 일종의 담론적 다양체로 다시 이차분절됩니다. 그리고 드뎌 의료체계 안으로 포획되고 영토화되면서, 이제는 빼박 환자로 규정되어 링겔을 꽂고 병원의 각종 의료체계에 완죤히 포획되어 굳어버리는 지층화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맞나?)  이러한 코드화와 영토화는 내용과 표현의 측면에서 동시에 일어나며,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삶의 곳곳에서 우리가 아는 새, 모르는 새, 숱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층화되는 것이지요. 지층화의 과정은 내용과 표현 측면에서 가차없이 이중 분절되면서 수없이 많은 심판의 체계 속에서 규정성을 부여하고, 부여받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층과 접속하여 그것을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만들고, 숱한 규정성과 한계에 갇혀 삽니다. 이 딱한 현주소가 바로 ‘둑카(Dukkha)’인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기관 없는 신체, 다양체로 살지 못하는지, 왜 리좀적으로 살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를 들뢰즈는 이렇게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아픈 무릎을 기꺼이 희생제물로 삼아 우리에게 ‘코드화’ ‘영토화’라는 이중분절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주고, 고귀한 님들께서 다시 그것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하여 정리하고 또 정리하면서, 우리는 지치지도 않고 끝까지 개념이해를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 고맙고 고마운 고귀한 님들!!  소중한 도반들 모두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있으시길 빕니다.


이상 오늘의 수업 정리를 마칩니다. (다섯 문단 성공!! 얏호!!!^&^)


 
전체 7

  • 2021-04-01 08:22
    오랜만에 같이 한 공부하는 시간에도 느꼈는데, 이 후기마저도 공동작업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ktx를 일주일에 두 번이나 타고 상경하는 부티(뷰티?)나는 현숙샘 감사합니다 _()_

  • 2021-04-01 09:49
    왜케 귀엽지? 후기 쓰는 과정이 그려지네요. 연신 울려대는 카톡에 웃다가 짜증내다가. ㅎㅎ. 도반들이 시키는대로 잘 따라하는 현숙샘 아주 칭찬해요

  • 2021-04-01 10:52
    "널리 배워 가르침을 새길 줄 아는 고매하고 현명한 친구와 사귀~"는 복과 기쁨은 무엇보다 "기쁘게 새김을 확립"하는 것임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고귀한 님들 감사합니다_()_

  • 2021-04-01 11:34
    선생님!! 저한테 혼나야겠어요!! 새벽 세시에 글을 올리시다니요!! 제가 그렇게~~쉬면서~~공부하고 글을 쓰라고 했는데!! 천천히!! 충분히 움직이고 잘 시간엔 자야해요!! >ㅂ

  • 2021-04-01 13:51
    공부하는 즐거움이 이런 건가? 하는 질문이 들 정도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후기네요!! 빠방한 다섯문단!
    이번 주에도 고귀한 샘들의 공부애와 동료애에 혼자 놀랐습니다. 슬금슬금 묻어가면서 배워볼게요 ㅎㅎ

  • 2021-04-01 23:41
    왕언니요, 저거시 어찌 다섯 문단인 거여유? 저는 암만 세어봐도 더 되는 거 같은디... 아하, 소제목별 다섯 파트로군여! 오호, 훌륭하심다! 짝짝짝~~ 암튼 울 현숙샘의 감칠맛 나는 후기 잼나게 잘 읽었어요. ㅎㅎ

    자기주도학습이 그 다양한 책들과 토론 속에서 (히말라야) 산으로 가고 있는 건지 (갠지스) 강으로 가고 있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각자 헤매는 와중에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는 듯 하긴 하옵니다.

    기차타고 오시는 고귀한 님이여, 담주엔 계룡의 봄기운과 함께 즐겁게 가벼이 오소서.

  • 2021-04-03 12:04
    제 자신이 겸허해지는 다섯문단의 정말 긴 여정이었습니다. ㅎ '흐뭇' 미소 짓게 되고 세미나의 토론 내용들을 상기하며 즐겁게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