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023 수업 공지합니다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10-17 17:21
조회
2358
지난 시간에는 <맛지마니까야> 19경부터 하나하나 경들을 살펴보고, 이어서 선생님들이 쓰셨던 과제들에 대한 짧은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번 주 후기 담당인 이응과 임성희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리라 믿으며^^ 저는 역시나 가장 인상에 남는 이야기 하나만 복기하고 공지로 넘어갈게요.

제게 있어 지난 수업의 핵심 주제는 ‘어떻게 하면 기존의 경향성을 지울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어요. 수업을 들으면서 조금 궁금해진 것은, 존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성을 대신해서 능동적으로 거듭나게 하는 경향성이라는 것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게 어떤 것이든 특정한 경향성을 지운 존재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능동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것.

채운 선생님 설명에 의하면 업을 일종의 경향성으로, 또 욕망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하지요. 내가 자주 하는 생각, 내가 자주 입에 올리는 주제, 내 눈에 잘 보이는 대상, 이게 곧 내 행동의 경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니 시쳇말로 ‘빼박’입니다^^;

스스로 ‘좋다’고 여긴 것 앞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약해지지요. 내 실제 감각이 정말로 그것을 좋다고 정말 느끼기 때문에 절로 몸과 마음이 그리로 향합니다. 여기서 정신이란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는, 익히 알려진 스피노자의 정리를 떠올려볼 수 있겠습니다. 신체의 감각 작용이 특정한 것을 붙들어 그에 따라 일련의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불가피하게 특정한 경향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내 몸이 겪는 일이니 그것의 좋음에 대한 의심이 일기 어렵지요. 하여 그때부터 부단히 같은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느라 다른 것을 방기하게 되며, 또 방기하는 자기 자신을 봐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허용하는 일이 많아지는 만큼 아무래도 추구하는 그것 외에 다른 것에 대해서는 허술해지기 십상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을 훼방 놓는 것에 대해서는 발끈하거나 슬퍼지고요.

불교는 바로 이런 것을 수동적인 상태로 간주합니다. 대상에 고착되어 반응적으로밖에는 존재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을 얻고 잃음에 대해서만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있는 존재야말로 가장 수동적인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라는 거죠. 상대와 상태에 따라 일희일비, 헌데 그런 자신의 꼴을 볼 능력이 없고, 그러므로 자신이 왜 이런 것에 탐착하고 이런 것에 편향되어 있는지 물을 수 없는 존재야말로 가장 연약하고 속박되어 있고 무지한 존재라는 것!
반대로 붓다와 같은 능동적 존재는 그 어떤 사건과 사물과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마음이 이러저러하게 흔들리지 않고 지복을 누렸다는 게 채운 선생님 설명이었죠. 남들과 무관하게 홀로 평안한 존재인 거냐, 하고 한때 삐딱하게 본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조금(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상대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그 강인함은, 나와 남 그리고 그 어떤 감정이나 세상사에 대해서도 실체화해서 그 공과를 따지지 않을 수 있는 자에게만, 지금의 상황을 여실히(상 없이, 그러니까 특정한 표상 체계를 발동하지 않고,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볼 수 있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경지 같습니다. 하지 않는 일이 없지만 그것에 대해 선악이나 시시비비를 판별하지 않고 그래서 감정을 생산하지 않을 수 있는 자, 그런 존재야말로 가장 자유롭고 가벼울 수 있겠고, 또 번다하지 않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도 나는 수동적인 게 좋아! 라고 한다면야 할 말이 없지만-_- 채운 선생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좋아서가 아니라 몰라서래요; 제게 정말 좋은 것, 이로운 것이 뭔지 모르는 중생이, 그 컴컴한 상태에서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을 얻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것, 그게 그의 수동성의 표현입니다. 채운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바로 그와 같은 탐착을 버리는 것, 그로부터 진정한 ‘이익’을 얻을 길이 열린다고 설명하십니다.
그런 맥락에서 19경의 이런 구절을 이해할 수 있겠네요. “이익을 원하고 안녕을 원하고 안온을 원하는 사람”은 곧 깨달은 님입니다. 이익을 원하지 않고 안온을 원하지 않는 사람, 그것은 잘못된 견해와 사유를 증거하고, 무명을 증거하니, 그게 곧 악마입니다. 달리 악마가 있어서 나를 덮어씌우고 괴롭히는 게 아닙니다. 탐착에 의해 내가 무거워지는 것, 앞뒤가 잘 안 보이는 것, 그럼에도 더더욱 그 안에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 그게 악마와 같은 상태겠지요.

자,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할까요? 채운 선생님 표현에 의하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그 생각과 행동을 중지시킬 수밖에 없는 곳으로 자기를 던져야 한답니다.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집을 뛰쳐나온 출가자들이 딱 그렇지요. 특정한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곳, 특정한 욕망을 더더욱 불어넣는 곳, 그 장으로부터 일단 빠져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몸의 배치를 바꾸지 않는 한 관념과 사유와 욕망, 정신의 운동이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관계에 둘러싸여 똑같은 자극들을 받으며 사는 이가 어떻게 욕망을 바꾸고 행동 패턴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붓다가 섭생을 중시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게 채운 선생님의 설명이었습니다. 붓다는 결코 감각 자체를 도외시한 게 아닙니다. 다만 감각에 매이는 것에 대한 경계가 줄곧 있었고, 끊임없이 외부와 접촉하고 감각하면서도 그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신체를 어떻게 다스리고 단련하고 주시해야 하는지를 세심하게 살폈답니다.

하여 채운 선생님의 당부! 알지만 너무 멀다, 어렵다, 이런 말 하지 말랍니다. 그저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이 없답니다. 만약 자기 삶이 무겁다면요. 자꾸 같은 데서 걸려 넘어진다고 느낀다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뭔가 바뀌길 원한다면요.
하여, 오늘도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경전을 읽고 생각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으로~ ^^

다음 시간에는 51경부터 64경까지 읽어오시고요, 씨앗문장은 일요일 오후 10시까지. 앞으로는 시간 넘기면 벌금 5천원 받겠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올리신 개념정리 과제도 각자 출력해와 함께 읽을게요.

간식은 은하쌤과 제가 준비합니다. 후기 담당이신 두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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